인간 로키x천둥의 신 토르

 

 

 

 

마주친 시선에서 일어나는 불같은 스파크

 

소설이나 노래 가사에 흔히 나오는 비유를 로키는 통감했다. 그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온몸에 전기가 통한 것처럼 짜릿짜릿한 느낌. 맞은편의 푸른 눈동자가 동공에 담길 때마다 저릿저릿해지는 심장. 그도 그럴게 로키의 애인은 천둥의 신이었다.

 

첫인상의 끌림과 몇 번의 우연, 또는 운명을 통해 그들은 드디어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호감을 넘어서 성애로 이어진 뜨거운 감정. 토르가 저보다 큰 근육질의 남자라는 것도, 지구가 아닌 우주의 이방인이라는 사실도 그들 사이에 장벽이 될 순 없었다. 얼어붙은 심장에 박힌 거울 조각을 녹이듯 로키는 토르로 하여금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둘이서 찬란한 여름을 맞을 터였는데.

 

일주일 전, 밀린 업무를 해치우고 늦은 귀가를 했을 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토르를 보고 로키는 내심 감동했다. 그의 입술이 부르는 제 이름이 안겨주는 기쁨과 충만감. 오직 거리를 좁히기 위한 구실인 뿐인 사사로운 대화를 마치고 마침내, 마주친 시선 속에 서로가 오롯이 담겼을 때 초조함과 긴장에 살짝 말라있던 입술이 겹쳐졌다. 그리고 로키는 기절했다.

 

좀 과로였던 모양이야.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토르의 얼굴엔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로키는 은근히 웨이트 트레이닝과 영양보급에 신경을 썼다. 슬림한 체형이지만 체력이나 지구력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체면을 구길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로키는 토르와 스킨십을 나눌 때면 가슴께에 전류가 통하는 뻐근함을 느꼈고 몇 번 더 정신을 잃었다.

 

내가 널 너무 좋아해서 그런 모양이다.”

 

거기까지만 말하지 그랬어. [네가 이렇게 여린 줄도 모르고미안하구나.] 이어진 소리가 로키의 예민한 심기를 건드렸다. 여전히 그를 걱정하고 있지만 분위기가 농밀해질라치면 번번이 흐름이 끊기다보니 토르도 약간 짜증이 난 것일까. 온몸의 털을 바짝 서게 하는 스파크를 참고 견디기도 해봤지만 인간의 몸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저 건방진 천둥의 신은 제가 조절할 생각은 못하는 건가, 괘씸하게.

 

요는 시선이 마주치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그리하여 결심을 마친 로키가 토르를 데리고 간 곳은 시내의 러브호텔이었다. 그는 경박함을 멸시했지만 역시 이만한 장소가 없었다. 영문을 모르는 토르의 손을 붙잡고 비장하게 들어선 룸은 사방이 거울로 덮여있는 방이었다. 천장 역시 전면이 거울로 되어 있었다. 로키가 이끄는 대로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있으니 그들로 꾸며진 만화경 속에 갇힌 기분이 되었다.

 

여기라면 직접 시선을 마주치지 않더라도 얼굴을 볼 수 있어.”

 

어처구니없다는 듯 돌아보다 이내 털털한 웃음을 터트리는 토르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다. 로키 네가 이렇게 많구나. 그래 오직 너와 나뿐이야. 그리고 이제 그들의 사랑으로 충만해질 공간이었다. 하던 도중에 시선이 마주치면 어떡하지? 감은 눈에 입을 맞추면서 로키가 속삭였다. 그럴 여유는 없이 울게 될 거야, 토르.

 

 

 

 

Posted by 모노님 :

[MCU/로켓토르] 룸메이트

2018. 8. 17. 02:56 from MCU

 

 

 

* 로켓X토르 대학생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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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태양'이라 할 수 있다. 저기 봐, 토르 오딘슨이야. 그 유명한? 마치 해바라기가 태양을 좇듯 모든 고개가 그를 따라 움직인다. 그가 밝은색의 블론드여서만이 아니라 찡긋 날리는 윙크나 해사한 웃음을 지을 때 드러나는 새하얀 치열 등 모든 게 반짝거린다는 느낌이다. 그에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목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달'인가. 어느 정도 음습한 구석이 있음을 로켓은 인정했지만 그는 달이 뜨면 야수로 변하는 늑대인간은 아니었다. 비유는 집어치우고 아무튼 토르는 빛났다. 좀 지나친 게 문제지만. 

 

토르는 로켓의 대학교 기숙사 룸메이트였다. 공과대와 예대 건물이 서로 떨어져 있음에도 둘은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지난해 디자인과 놈팽이 새끼와 트러블이 있었기에ㅡ침대에서 싸구려 대마를 핀 흔적을 발견하고 룸메이트를 묵사발로 만들었다(로켓은 후각이 예민했다, 그의 침대에서 핀 것이 문제였다)ㅡ로켓은 살짝 언짢았다. 예술에는 딱히 조예가 없는 그였기에 어느 정도 편견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어떤 놈팽이 새끼가 기어들어 오나 싶어 팔짱을 끼고 입구를 노려보는데 북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토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 앞까지 따라와 짐 풀기를 도와주겠다, 우리 방에도 놀러와라 소란스럽던 친구들이 돌아가고 나서야 토르는 뒤늦게 인사를 건넸다. 미안해, 시끄러웠지. 토르는 로켓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두어 번 부드럽게 주물렀다. 혹시 운동하나? 체육관에선 본 적 없는데. 첫 만남에 건네진 친밀감의 표현에 로켓은 내심 당황했다. 미식축구 관심 있어? 우리 팀에 들어와, 끝내줘. 그가 <리벤져스>라는 미식축구팀의 쿼터백이고 그의 신생팀이 리그 상위권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것은 캠퍼스에 있는 학생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가십에 관심 없는 로켓 또한 토르에 대해선 어느 정도 주워들은 것이 있었다.

 

-<리벤져스>는 이번에 우승할 수 있을 것 같아? <시빌 워>대회에선 플레이 오프에도 없지 않았나.

-하하, 이번엔 기대해도 좋아.

 

한껏 비꼰 말에도 토르는 변죽 좋게 웃었다. 더 입부를 권하진 않았고 다만 아까운 어깨야, 아쉬운 척을 했다. 실은 지난 여름방학 가드 아르바이트를 뛰면서 저절로 배겨진 근육이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그래도 아예 눈치가 없어 뵈진 않아서 로켓은 어느 정도 그와 잘 지내볼 기분이 들었다. 운동하는 놈이 약을 빨진 않겠지...들고 온 박스를 풀고 짐을 꺼내 옷장부터 채워가던 중 토르가 문득 로켓을 돌아보았다.

 

-나도 너에 대해서 아는 게 있는데. 

-뭔데.

-별명이 <외로운 늑대>라며?

 

처음 들었을 때 로켓은 그것이 무슨 신종 악성 코드의 이름인 줄 알았다. 요즘엔 게임 아이디로도 안 쓸 유치한 별명. 공대에 괴팍한 천재가 있다고, 늘 혼자 다녀서 사랑을 모르는 외로운 늑대라던데. 그런데 작년에 룸메이트 코를 부러뜨렸다는 게 진짜야?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말하는 것이 더욱 가관이었다. 그의 새로운 룸메이트가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보름달이 떴다 해서 로켓이 야수로 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깊은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그에게도 은밀하다면 은밀한 비밀이 있었다. 그를 둘러싼 유치한 추측에 자존심이 상하지만 일부 맞는 부분도 있는 것이다. 최근에 그는 좀 외로운가 싶었고, 또 사랑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엄밀하게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늦은 밤, 그가 맥주를 마시며 낯선 남자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장소가 번화가의 펍이 아니라 게이클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로켓에게 새로운 별명을 붙일 것이 뻔했다.

 

로켓은 게이였다. 그렇다고 아무 남자랑 자고 다니는 클럽 죽돌이나 마성의 게이까진 아니고. 그냥 이따금 클럽에 들러 술을 마시고 대화를 나누면서 어쩌다 그럴 기분이 드는 남자와 하룻밤 욕구를 해소했다. 지나치게 이성적인 두뇌는 튈 때와 튀지 않아야 할 때를 구분했고 본의 아니게 금욕과 원나잇을 오가는 이중생활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작년 디자인과 룸메이트의 코를 부러뜨린 이유도 마약에 취한 새끼가 로켓의 침대 위에서 그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자위를 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클럽에서 제 이름을 부르며 헐떡였다면 좀 다르지 않았을까.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룸메이트와 섹스라니 말도 안 되지.

 

클럽에선 되도록 술만 마시는 그였지만 오늘 밤에 만난 녀석은 꽤 적극적인 타입이었다. 허벅지에 올려진 손이 술기운을 핑계로 몇 번이나 다리 사이를 터치하며 노골적인 싸인을 보내왔다. 달래듯 키스를 해주어도 반쯤 맛 간 눈이 한 판 뜰 생각으로 형형했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약에 취한 듯하다. 로켓은 쯧 혀를 찼다. 그는 마약에 절은 섹스를 혐오했다. 그래도 제법 취향인 녀석이었는데.

 

주위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당장이라도 바지 버클을 풀어내릴 기세인 녀석을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일단 복도의 간이의자에 앉히고 관리인을 붙여준 후 돌아갈 생각이었다. 벗어날 핑곗거리를 떠올릴 필요도 없이 술과 약에 취한 녀석이 바로 의자 위에 쓰러졌다. 관리인과 함께 차가운 생수를 찾아 나선 그때였다. 

 

-취한 파트너를 버려두고 가는 건가?  

 

아니면 그쪽은 볼 일 다 봤다는 거? 그의 매너를 비난하는 신랄한 음성에 로켓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등을 돌리는 그의 인상이 어쩔 수 없이 짜증으로 가득했다. 신경 끄고 꺼지라 말할 셈이었다. 하지만 인사불성으로 너부러져 있는 녀석처럼, 아니 그보다 더 밝은색의 블론드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뒤늦게 낮은 목소리가 귀에 익은 것임을 깨달았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늘 자신만만하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말도 안 돼. 지금쯤 그의 여자친구가 되고 싶어 안달인 치어리더와 드라이브를 하거나 밤새 불꽃놀이를 하는 수영장 파티에 가 있었어야 했다. 이런 늦은 시각, 어두운 뒷골목의 게이클럽이 아니라. 

 

-운동을 어디서 하나 했더니, 여기서 했나 보군.

 

고개를 돌아본 곳엔 인기스타 쿼터백, 빛나는 태양, 그의 룸메이트 토르 오딘슨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토록 어색한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사건의 당일은 물론 이후로도 며칠 외박을 하거나 새벽녘이 돼서야 들어가는 등 마주치는 상황을 필사적으로 피해왔지만, 같은 기숙사의 룸메이트인 이상 언젠가는 마주칠 운명이었다. 각자의 침대에 걸터앉은 채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만난 장소나 뉘앙스를 보아 아웃팅의 위험은 없어 보이지만 그런데도 로켓은 뭔가 약점 잡힌 기분이었다. 그날만 해도 얼어붙은 로켓의 어깨를 처음 만난 그때처럼 주무르고 떠난 것은 토르였다. 아니나 다를까 먼저 입을 연 것은 토르이다.  

  

-금발이 취향이면 말하지 그랬나.

 

상황의 국면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을 로켓은 이때 느꼈다. 그들 사이에 흐르던 긴장감이 어쩐지 묘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고개를 들어 흘겨본 토르는 태연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로켓은 문득 작년 자신의 침대에서 자위쇼를 펼쳤던 옛 룸메이트를 떠올렸다. 토르에게서 약 기운 같은 건 일절 보이지 않는데 어째서 그놈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걸까. 잠겨 드는 목을 한 번 가다듬은 로켓이 힘주어 말했다.     

 

-미리 말하는데 난 룸메이트랑 섹스 안 해.

-왜지? 

-왜냐니...룸메이트잖아? 클럽에서 만난 파트너랑 다르다고.

-그러니까 그 룸메이트랑 자면 굳이 클럽에 가서 파트너를 찾을 필요가 없잖아? 

 

고민할 가치가 없는 간단한 공식을 설명하듯 토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네가 제일 똑똑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거기까지 듣고 나니 로켓도 발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각했던 저에 비해 그가 내뱉는 모든 말이 장난처럼 대수롭지 않게 들려온다. 그만큼 분위기는 가벼워지고 로켓도 더이상 고민하는 자신이 점점 고집스럽고 비합리적으로 느껴졌다. 약간 될 대로 되라 싶은 자포자기의 심정도 든다. 금발만 아니었어도, 잘빠진 근육질만 아니었어도...바람에 이리저리 휘둘리던 그의 이성이 마침내 푹하고 꺾이고 말았다. 내가 갈까? 아니면 네가 올래? 마주친 얼굴이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Posted by 모노님 :

[MCU/로켓토르] Sweet Rabbit

2018. 8. 10. 04:49 from MCU

 

 

* 인워 코멘터리에서 '쪼끄맣고 따뜻한 심장'이 뛰고 있다는 로켓보고 쓰는 글

* '모든 것을 다 잃고 이기느냐 죽느냐 갈림길에 있는 남자와 극히 무감각한 캐릭터의 만남'

루소즈가 퍼주는 로켓토르 파세요...이건 대박이 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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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주에서도 괴짜 행성이라 불리는 하프월드에서 태어났다. 아니 만들어졌다는 것이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처음 그는 'SUBJECT: 89P13'이었다. 서브젝트 에잇 나인 블라블라는 아무래도 이름치곤 좀 길다 보니 스스로를 '로켓(Rocket)'이라 지칭하였고 현상금 사냥꾼으로서 차차 악명을 알려나갔다. 그러던 중 모종의 사건을 통해 피터 퀼이라는 얼간이 동료를 만나면서 그의 생물학적 종족이 '라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잠시 잡것이나 괴물, 설치류 따위로 불리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의 크루가 되었고 무엇보다 특별한 그에겐 보다 다양한 대명사가 붙었다. 트래쉬 판다, 싸이코 무기광, 사람 열 받게 하는 녀석, 아니 빡치게 하는 놈...어느 것 하나 점잖은 것이 없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언젠가 꼭지가 돌아버려 술김에 울분을 토한 적도 있었지만 최근에 들어선 자기혐오도 꽤 덤덤해졌다. 내심 인정하는 부분이 있었다. 세간의 기준에 따르면 로켓은 나쁜 놈이 맞았다.

 

한 번 폭발한 뒤로 크루들은 그의 과거에 대한 화제를 은연중에 피하는 것 같았지만 로켓은 몇 번인가 하프월드를 떠올렸다. 여생을 정처 없이 우주를 떠도는 그에게도 차마 고향이라 칭할 수 없는 곳이지만 태초의 기억은 그곳에 있었다. 로켓이 떠올리는 것은 무법천지의 끔찍한 혼종의 별이 아니라 그를 분해하고 조립한 과학자들이었다. 아마도 병기를 만들기 위한 유전자 변형 실험 같은 것이었겠지만 어쩌면 심심풀이 땅콩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정신 나간 새끼들 꼭 죽여버려야지. 이제는 분노의 감정보단 <내일은 퀼이 아끼는 젤리를 훔쳐 먹어야지>와 같은, 잠들기 전 세우는 하루 계획처럼 로켓은 시니컬한 복수를 다짐한다. 아무튼 로켓의 본성은 그 태초에, 그 수술대 위에서 기인한 것이다. 고도로 지능을 향상시켰으나 정신 나간 과학자들은 그릇인 짐승의 야성 만큼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공격적이고 비이성적인 야성.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그는 3피트(90cm)짜리 야수였다.

 

먼 과거로부터 거슬러 온 자기성찰 끝에도 로켓은 시원스러운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뜻밖의 정체성 찾기가 그를 고뇌하게 만들었다. 로켓은 한 번도 자신의 본성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껏 저지른 수십 건 이상의 절도와 탈옥, 방화 등의 전과를 후회하거나 반성한 적도 드물었다. 그래서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자신을 비롯한 세상 모두가 로켓을 나쁜 놈이라 하는데 토르는 그더러 스윗 래빗(sweet rabbit)이라 부른다. 어째서? 의문은 로켓의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Sweet Rabbit

 

 

 

 

 

 

아스가르드 재건을 위한 원조를 요청하고자 니다벨리르로 향하던 도중 토르는 조난 신호를 포착했다. 신호는 오래전에 버려진 외딴 별에서 쏘아 올리고 있었는데 아마도 양자 소행성 지대에 휩쓸려 불시착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가 지상에 도착했을 때 추락한 것치곤 주변에 멀쩡하게 우거져 있는 수풀이나 흠집 하나 없는 우주선이 영 수상스러웠다. 어쩐지 낯익은 느낌에 고개를 갸웃하던 토르는 이내 그 우주선이 언젠가 신세 진 적 있었던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의 밀라노라는 것을 깨달았다. 

 

"로켓이 우릴 배신했어."

"피터ㅡ"

 

이건 배신이나 마찬가지야. 망할 너구리, 내 우주선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부득 이를 가는 피터 퀼과 일행들은 밀라노의 조종석에 다친 구석일랑 찾아볼 수 없는 평온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그리고 우주선의 입구에 선 토르와 그들 사이를 레이저로 만들어진 촘촘한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여기서 며칠째 꼼짝도 못 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지 화장실로 가는 통로는 안 막아놨더라고. 퀼이 하나도 다행스럽지 않아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연인즉 이러했다. 최근 근방에선 우주 광견병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있는데 그것이 로켓에게 전염됐다는 것이다. 광견병이라는 대목에서 토르는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납득했다. (로켓이 진짜 '래빗'이 아니란 것은 토르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단순한 열병인 줄 알았으나 실은 바이러스의 잠복기였던 지난 수일간 점차 이성을 잃어버리는 횟수가 늘어나더니 막판에는 크루들의 얼굴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틀 전 아침, 온몸에 끓어오르는 열을 감당하지 못하고 바닥을 구르는 로켓에게 퀼이 다가가려던 때였다. 무언가의 스위치를 작동시킨 로켓이 그대로 우주선 밖으로 뛰쳐나갔고 뒤쫓을 새도 없이 견고한 레이저 벽이 올라와 밀라노의 입구를 틀어막은 것이다. 사전에 로켓이 남긴 메시지가 모니터 화면에 번쩍거리는 것을 크루들은 넋을 잃고 쳐다봤다고 한다. <통돼지 바비큐 되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

 

"다행히 바이러스는 시간이 지나면 체내에서 자연히 소멸하는 종류야. 하지만 병이 나을 때까지 로켓이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어."

"이 별에 외부인의 발길이 끊긴 지 족히 백 년은 되었어. 어떤 위험 요소가 있을지 나도 알 수 없네."

"지금 로켓이 제정신이 아니란 것도 걱정이야. 열 때문에 꽤 괴로워했어."

"그건 그 녀석 심보가 고약해서지."  

"로켓은 동료들한테 피해를 주는 것보다 혼자 감당하는 걸 택한 거야."  

"그래서 우릴 레이저 벽에 가둬? 지가 무슨 하드보일드 영화 주인공이야?"

 

펄쩍 뛰는 퀼에 벽에 기대서 상황을 설명하던 가모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토르가 살짝 미소지었다. 래빗은 좋은 동료들을 두었군. 두고 봐 나중에 털을 박박 밀어버릴 테니까. 허공에 대고 분노를 터트리는 퀼을 뒤로 한 채 가모라가 레이저 벽 앞으로 다가와 토르와 시선을 맞추었다. 보다시피 우리는 밖으로 나갈 수 없어, 그래서 당신이 도와주었으면 좋겠는데. 그 말에 고개를 돌린 퀼이 토르에게 삿대질을 했다. 지난번에 우리가 구해준 거 기억하지, 그때 공짜 밥도 먹었잖아? 집 나간 너구리 좀 잡아주겠어. 아니면 우리가 밀라노를 부수고 나가야 하나 싶거든? 토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오랫동안 왕래가 없었던 별인지라 밀림에는 길이랄 것도 없었다. 위를 향해 제멋대로 우거져 자란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서 방향조차 분명치 않다. 어린 시절 아버지인 오딘과 함께 사냥을 할 때면 이렇게 진흙 위에 남은 발자국을 좇곤 했는데...그리운 기억이 떠올라 잠시 감상에 빠지려던 것을 추슬러 토르는 수풀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이니 분명 무사할 것이라 믿으면서도 밤과 함께 어둠이 가까워져 올수록 토르도 로켓이 걱정되었다.

 

이렇게 로켓을 찾고 있자니 그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나라를 잃고, 친구를 잃고, 무기력한 상태로 동생의 죽음을 목격해야만 했던 끔찍했던 시절이 있었다. 전부를 잃었던 순간을 어렴풋하게나마 되짚을 수 있는 것은 토르 역시 시간이 흘렀기에 가능한 것이다. 1500년 이상을 살아온 신에게도 그만큼 괴로운 시련이었다. 운이 따라 같은 목적지를 갖게 된 로켓과 포드에 올랐고 복수심에 눈이 멀었던 그는 작은 친구에 대해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토르에게 먼저 대화를 걸어온 것은 로켓이었다. 그는 말을 가리지 않았고 잔인한 토르의 현실을 그대로 읊어주었다. 할 수 있겠어? 대수롭지 않게 나열한 단어들은 반대로 그의 상처를 헤집어 보여주는 꼴이었으나 어설픈 위로를 건네는 일은 없었다. 운명을 운운하는 자신에게 도리어 되물었다. 그 생각이 틀리면? 결국에는 말문이 막혀버린 순간이 찾아왔지만 이상하게 화가 나진 않았다. 로켓은 그를 비웃지도 현실을 직시하라 훈계하지도 않았으니까. 드러낼 만큼 드러냈다 생각하자 오히려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저만치 다가와 있을 죽음 또한 개의치 않아졌다. 그 날 토르의 운명을 빌어주며 로켓이 건네주었던 안구는 이제는 자신의 눈이 되어있다. 작고 상냥한 친구에게 신뢰를 갖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러고 보니 포드 안에서 자신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나. 그로선 막을 힘이 없던 눈물을 로켓은 그저 지켜봤을 뿐이다.

 

문득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친다. 수풀을 밟고 다가오는 소리였다. 숨을 죽인 토르는 주의를 집중해 그것과의 거리를 좁혀갔다. 익숙해진 어둠의 건너편에서 두 개의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서슬 퍼런 시선에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았으나 토르는 머뭇거리는 일 없이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몸을 날리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토르와 로켓이 서로를 주시하였다. 

 

발톱을 드러낸 네 발로 땅을 딛고 있는 모습은 완연한 짐승의 것이었다. 래빗? 동료들을 알아보지 못한다더니 토르 역시 그런 모양이었다. 자네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말을 건네 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성대를 긁는 거친 목소리가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울음소리였다. 못 본 사이에 꽤 터프해졌지 않나. 너스레와 함께 그를 붙잡을 타이밍을 생각하던 찰나, 먼저 달려든 것은 로켓이었다. 덩치가 작은 만큼 동작은 눈이 따라가지 못할 만큼 재빨랐다. 순식간에 타고 오른 로켓이 등 뒤에서 목덜미를 덥썩 물어오는 바람에 중심을 잃은 토르의 한쪽 무릎이 무너져 내렸다.

 

가장 연약한 목덜미를 공격해 단숨에 숨통을 끊는 것은 야생의 본능이다. 갑옷과 같은 근육으로 둘러싸여 있는 몸이지만 날카롭게 벼려진 이빨은 쉽게 살갗을 찢고 파고들었다. 로켓을 떼어내기 위해 어깨를 뒤척여 보았지만 악착같이 박힌 송곳니는 빠져나올 기세가 보이질 않는다. 통증과 함께 핏물이 새어 나오는 것을 느끼면서 토르가 외쳤다. 래빗! 정신 차리게! 

 

그제야 목덜미를 물어뜯는 턱에서 천천히 힘이 빠지는 것이 전해져온다. 숲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토르...? 들려오는 음성은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불안하게 떨리고 있어서 토르는 덩달아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제게서 벗어나려는 낌새에 토르의 손이 먼저 움직여 로켓의 머리를 눌렀다. 빠졌던 이빨이 다시 살을 파고들었지만 토르는 버둥거리는 로켓의 몸을 놓지 않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뜨끈한 피가 더욱 흘러나왔다. 그렇게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가 마침내 떨어져 나간 로켓이 바닥에 무릎 꿇은 토르에게 소리쳤다.  

 

"죽으려고 환장했어?!"

 

 

 

***

 

 

 

세상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표정. 정신이 든 로켓이 토르를 처음 보았을 때 얼굴이 딱 그랬다. 아스가디언의 육체에 바이러스가 전염될 일은 없다고 재차 말했지만 불안에 흔들리는 시선은 계속 토르의 목덜미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빨이 난 자리를 따라 뚫린 구멍에 생긴 핏자국이 흉측했다. 로켓을 안심시키기 위해 커다란 손으로 목덜미를 감쌌지만 더욱 피칠갑을 한 꼴이 되었다. 괜찮네. 피도 다 멎었다고.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자네도 알잖나. 싱긋 웃는 얼굴을 하자 겨우 흔들리던 눈이 잠잠해졌다. 

 

겨우 의식이 돌아왔지만 등에 닿던 체온이 내내 불처럼 뜨거웠으니 그가 앓고 있는 고통은 그대로일 터였다. 병이 더 진전되지 않도록 로켓을 진정시키고 최대한 회복에 전념해야 했다. 그새 내뺄 궁리를 하고 있는 로켓에게 토르가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섰다.      

 

"그만 돌아가게. 동료들의 걱정이 커."

"됐으니까 내 일에 신경끄고 꺼져."

"여기까지 와서 내가 그냥 갈 것 같나? 어떻게든 자네를 데리고 돌아갈 거야."

"젠장! 망할 해적천사!"

 

욕설을 뱉는 로켓의 모습에도 토르는 어쩐지 웃음이 날 것만 같았다. 알았으니 열이 더 오르기 전에 누워 있게. 다음엔 목덜미가 아니라 다른 데를 물어뜯는 수가 있어. 좋네, 대신 앞으로 예방주사는 꼭 맞도록 해. 결국 로켓이 진저리를 치며 등을 돌려 누웠다. 움직이는 기척을 느꼈는지 거기서 다가오지 마, 지친 목소리가 경고한다. 해서 토르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앉았다. 밤새 그를 지켜보기엔 충분한 거리였다.

 

그의 휴식이 방해받지 않도록 주위에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토르는 조용히 로켓의 상태를 살폈다. 진이 빠진 등가죽을 들썩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퍽 안타까웠다. 그저 선선한 밤기운에 어서 열이 떨어지길 마음속으로 바랬다. 솔직하지 못하고 애써 미움을 사려 하는 태도가 어쩐지 제 동생과도 닮아 있어서 토르는 그것이 밉지가 않았다. 지금도 제가 남긴 상처가 걱정 되어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 뻔히 보였다.

 

[여기 남겠나] 

 

니다벨리르에서 마침내 스톰 브레이커를 만드는 데 성공했을 때 빛나는 바이프로스트 앞에서 토르는 로켓에게 물었다. 그는 타노스라는 절망을 상대하러 갈 참이었다. 어쩌면 돌아올 수 없는 길. 그에겐 돌아볼 한 점 후회나 미련도 없었으나 로켓은 아니었다. 잃을 것이 많다고 했잖아. 포드에 태워 니다벨리르까지 인도해준 것만으로 감사했다. 그에게 이미 많은 것을 받았다. 자넨 폭풍에 휘말린 가엾은 친구일 뿐이야. 최후의 운명을 맞는 것은 자신과 타노스로 충분했다. 그러니까 로켓에게 더는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자네는 상냥해."

 

뾰족한 귀가 쫑긋하니 움직이는 것을 보았으나 잠결인 모양인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토르도 뒷말은 소리 내지 않고 삼켜냈다.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한 다네. 나의 용감하고 상냥한 친구여.

    

[날 두고 혼자 갈 생각하지 마]

 

 

 

***

 

 

 

가볍게 여긴 출혈이었으나 새벽을 지새우던 토르는 어느 순간 까무룩 정신을 잃고 잠들어 버렸다. 내리쬐는 햇볕을 견디지 못하고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벌떡 일어선 그는 가장 먼저 두리번거리며 로켓을 찾았다. 설마 사라진 건 아니겠지. 열이 더 심해지면 안 되는데...상상 만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다. 하지만 그새 고여 흐르는 땀방울이 무색해지도록 눈앞의 로켓은 그루터기에 걸터 앉아 제 할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수신기를 주무르느라 토르에게 시선도 주지 않는 것이다.

 

"래빗, 이제 괜찮은 건가...?"

"그럼 당연히 괜찮지.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언제 죽을 뻔했냐는 듯 열이 내린 그는 평소 보다 한층 더 시니컬해 보인다. 얼이 빠진 토르가 좀처럼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 밀림 사이로 고속음을 내며 날아온 거대한 그림자가 어느새 그들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밀라노였다. 내 우주선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는 하늘을 보며 로켓이 이죽거렸다. 니들은 나 따라오려면 멀었어. 잊었어? 내가 대장이잖아. 멈칫하던 토르도 이내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친구는 망할 스윗래빗이기도 했다.    

     

      

 

 

 

 

 

       

 

 

Posted by 모노님 :

 

 

* 지구인 브쿱로켓X아스가디언 토르(토르1 시점)

* 로켓토르 감금아닌 감금플:D

* 15금 정도 노골적인 단어 사용이 있습니다

 

 

 

 

 

 

 

 

 

 

 

 

외계인을 조심해!

 

 

 

 

 

 

 

 

 

 

꿈속에서 그는 짐승이었다. 이빨이 많은 주둥이가 뾰족하게 튀어나왔고 네발로 보행하다가 도중에 벌떡 일어서기도 했다. 어쨌든 토끼는 아니었다. 꿈이기에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좀 특이한 동물이 나오는 만화영화를 보는 것처럼 제3의 시선에서 그것을 관망하였다. 짐승은(그는) 이제 목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방목이 주요 사업인 뉴멕시코에선 흔한 풍경이다. 이제 슬슬 일어날 때가 된 것 같은데그는 아침뉴스가 보고 싶었고 최근엔 뉴스 뒤에 나오는 막장 소프 드라마에도 재미를 붙였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질 무렵 짐승이 수북하게 쌓인 건초더미로 뛰어들었다. 바짝 마른 건초가 얼굴에 달라붙으면서 그는 마치 4D 영화를 보는 것처럼 현실과 유사한 불쾌감을 느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발밑의 중력이 사라지는 묘한 느낌에 이어 별안간 짐승의, 아니 그의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이다.

 

누군가 뒷덜미를 잡아당긴 것처럼 그는 공중으로 끌어올려지고 있었다. 고개를 젖혀보니 천천히 회전운동을 하고 있는 거대한 원반이 머리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소를 납치하는 UFO 전설이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니까 지금 그는 꿈속에서 납치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버둥거릴 틈도 없이 그의 몸이 발광하는 비행접시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실험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무언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여전히 눈이 부셔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다. 어린 시절, B급 오컬트 비디오에서 보았던 산 채로 해부되었다가 장기만 쏙 빼놓고 버려진 소의 시체가 절로 상상되었다. B급답게 그 시체는 가짜였다. 이 꿈 역시 가짜일 텐데 슬금슬금 몸을 타고 올라오는 손길의 느낌이 너무 현실적이었다. 이윽고 '무언가'가 그의 귓가에 다가와 속삭였다. 

 

내가 자지 빨아준다니까.

 

뭐라고?! 말 대신 헉하는 숨소리를 내뱉으며 <로켓>이 잠에서 깨어났다. 피부에 착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러닝셔츠의 등이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조직에 몸담고 있는 동안 소름이 돋을 법한 순간은 종종 있었고, 생사를 오가다 총알도 몇 번 맞아봤지만 지금처럼 소름 끼친 것은 처음이었다. 씩씩거리던 그는 멀지 않은 곳에서 악몽의 원흉을 찾을 수 있었다. 같은 침대 위에서 길고 두꺼운 손가락이 여전히 그의 바지춤 위에 올려져 있었으니까. 너 지금 뭐 하냐. 그러자 '무언가'가 조금 멋쩍어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내가 자지 빨, 거기까지 듣고 그는 홱 등을 돌려 누우려 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둘의 손목을 연결하고 있는 핑크색 수갑 때문에 어깨가 돌아가다 말았다. 도리어 끌려온 '무언가'가 그의 위에 올라탄 자세가 되었다. 가슴 위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에 이번에는 턱하고 숨이 막혀왔다. 래빗 지금 살짝 커진 것 같은데. 토르가 슬쩍 움직일 때마다 맞닿은 하반신이 비벼지는 느낌에 그는 차라리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쟤한테 저딴 말을 알려준 게 누구냐. 씨발 누구긴 누구야 자신이었다.

 

내가 그, 그걸 잘 한다오!

 

손발이 묶인 채 버둥거리던 토르의 외침에 어처구니가 없어지긴 했지만 그는 이내 비틀린 웃음을 만들어냈다. 금발의 백치 미인은 취향이었지만 제가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줄도 모르는 약쟁이는 제외였다. 네가 뭘 잘하는데. 자지 빨아본 적은 있냐. 기대라곤 일절 없는 물음이었다. 발음을 할 때 동그랗게 벌어지는 입술이나 탐스러운 목울대를 보면 막상 잘 빨 것도 같지만그러자 토르가 전에 없는 순수한 얼굴로 되물었다. 

 

자지가 무엇이오?

 

꿈뻑꿈뻑거리는 눈동자를 마주하곤 그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져버렸다. 그런 상스러운 소리는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다는 반응이었다. 말투나 외견에서도 티가 났지만 그만큼 남자가 곱고 귀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뜻이었다. 정말 부잣집 도련님이나, 어디 귀족의 아들이라도 납치해온 것일까. 그는 눈앞의 상황이 약간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오는 과정이 조금 거칠긴 했지만 보스가 보낸 빨간색 카드에는 '데리러 간다'고 적혀 있었다. 가지러도, 찾으러도 아니고 데리러 오겠다니. 남자의 가치는 알 수 없으나 경황상 거칠게 다루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트렁크에 다시 쑤셔 넣은 뒤 현관 벽에 기대 놓으려 했는데. 차라리 시체 가방 꾸러미를 떠안는 편이 나았다.

 

표정은 덤덤했지만 오랜 시간 묶여있던 탓에 토르의 손목과 발목이 벌겋게 부어있었다. 그는 좀 더 합리적인 구속과 감금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남자는 꽤 거구였기에 그를 묶어놓을 만한 기둥이 그의 집에는 없었다. 아니면 침대에 묶어? 근육질의 두 남자가 싱글베드에 엉겨붙어 자는 꼴은 사양이었다. 크게 상처 입히지 않으면서 쉽사리 도망칠수는 없는 방법이 필요했다. 손발을 풀어준 뒤 그는 우선 벌거벗고 있는 토르에게 제 옷을 가져다 입혔다. 래빗이라 불린 우스꽝스러운 티셔츠를 입힐까 싶었지만 장난을 칠 기분도 아니어서 관두었다. 푹푹 한숨이 나오는 반면에 토르는 제가 건네준 티셔츠와 청바지가 말끔하니 잘 어울렸다. 나를 도와주는 것인가. 그렇담 먼저 묠니르를 찾고 싶은데. 약간 정신 나가 보이던 것이 여느 잘생긴 젊은이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르의 오른손과 자신의 왼손에 각각 수갑을 한쪽 씩 채웠다. 찰칵 소리를 내며 잠긴 핑크색 수갑은 이틀 전 자고 갔던 하룻밤 상대가 놓고 간 것으로(도중에 집어던진 것을 침대 아래서 발견하였다) 진짜처럼 정교하진 않지만 남자를 자신의 행동반경 안에 두고 감시하기엔 충분했다. 마찬가지로 핑크색 열쇠를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쯧 혀끝을 찼다. 성가신 감시역이지만 일주일만 버티자 싶었다.

 

"저것이 먹고 싶은데." 

 

그리고 그 감시역이 흡사 보모 역으로 바뀐 것은 3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토르가 가리킨 TV 브라운관에선 마침  아이스 바 선전이 나오고 있었다. 색소를 넣은 싸구려 빙과였다. 어릴 때 안 먹어봤어? 어릴 때라니 까마득한 기억이군. 세상 물정 모르는 얼굴을 하고선 어울리지 않게 노친네스러운 말을 한다. 어린 시절에도 아스가르드의 궁전에 저런 것은 없었소. 이제 좀 일반적인 대화가 통하나 싶었는데 또 딴 세상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혹시나 싶어서 스마트폰으로 아스가르드를 검색해보기도 했다. 당연히 존재할리 없는 지명이었고 그는 아직 약기운이 덜 빠진 것으로 판단했다. 웃기네 지가 무슨 진짜 외계인이야 뭐야.

 

수갑을 채우고 그의 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에 어쩐지 토르는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눈치를 살피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인지 이따금 불편해하고, 또 심심해했을 뿐이다. 그럼 일주일 뒤에는 풀어주는 것이지? 원활한 감시를 위해선 상대방의 협조도 필요했기에 그는 대충 그렇다 하였다. 그래 좋게 가자. 토르를 제압하기 위해 아파트 안에서 실랑이를 벌였다간 단출한 살림이 박살 나는 것은 물론 그도 꽤나 무리를 해야 할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이상한 감금 생활이 시작되었다. 진짜 이상했다. 1분 1초도 떨어지지 않다 보니 침대도 같이 쓰고 샤워도 같이 했다. 그러다 보니 말을 섞지 않을 수가 없었고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토르는 제집처럼 리모컨으로 채널을 바꿔가며 TV를 보았고 냉장고에서 먹고 싶은 것을 꺼내 먹었다. 그때마다 그는 토르가 움직이는 대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꼭 밥을 먹여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밥을 먹이지 말라는 지령을 받은 건 또 아니니까. 이걸 아직 패도 된다는 확신이 없으니 손가락 하나 함부로 댈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처한 상황이 이해가 안 가나 본데. 제멋대로 굴지마."

"래빗의 자지를 빨 수 없으니 저거라도 빨아야지."

 

새로 배운 단어에 재미가 들렸는지 토르는 틈만 나면 저렇게 앙큼한 말로 그의 신경을 긁었다. 세상에 저렇게 팔자 좋은 인질이 어디 있나. 이 집에서 고통스러운 건 그뿐이다. 부릅 뜬 눈으로 토르를 노려보던 그는 하지만 결국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장을 볼 시기였으니까 겸사겸사 나가는 것이다. 결코 남자에게 아이스 바를 사다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제 손목에 걸려 있던 수갑 한쪽을 풀어서 의자 팔걸이에 걸고 토르를 앉혔다. 금방 올 테니까 얌전히 TV나 보고 있어. 그러자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얌전히 기다리겠네. 이 새끼는 진짜 뭐지. 얼빠진 얼굴을 보다보면 저까지 얼이 나가는 느낌이라 그는 황급히 지프 키를 챙겨서 문을 나섰다.

  

 

***

 

 

식료품점에서 적당히 장을 보고 마지막으로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에 섰을 때 그의 인상이 팍 찌푸려졌다. 아이스 바가 없었다. 위 칸부터 아래 칸까지 전부 훑어봤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있을 건 다 있는 아담한 식료품점에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는데 그는 짜증을 숨기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할 수 없이 근처에 있는 하겐다즈로 손을 뻗었다. 아무거나 처먹어. 가장 앞에 진열되어 있는 바닐라 맛 하겐다즈를 꺼내자 아뿔싸 그 뒤에 또 다른 맛이 보였다. 그는 결정 장애라곤 없는 쿨한 성격이었지만 잠시 고민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쿨하게 두 통 모두 꺼내들었다.

 

하지만 아이스크림 맛을 두고 고민하는 일 따윈 신이 그에게 던진 가벼운 장난이었다는 듯 진짜 재난은 돌아가는 길에 덮쳐왔다. 어디서 푸쉬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내 차가 비스듬히 기우는 바람에 그는 길 한가운데 지프를 세웠다. 날카로운 돌부리에라도 걸린 건지 타이어가 한 뼘 정도 찢어져 있었다. 변두리의 오프로드에선 드문 일도 아니다. 다행히 스페어 타이어가 있었고 차가 많이 오가는 도로가 아니었지만 괜스레 기분이 초조했다. 그는 솜씨 좋게 타이어를 교체했다. 고치는 데 있어 발군인 그였지만 그럼에도 이십 분 가량이 소요됐다. 다시 지프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을 때 그의 이마에 진땀이 흘렀다.

 

처음 집을 나서며 예상했던 것보다 외출 시간이 길어졌다. 그만큼 집을 비운 시간도 길었단 뜻이다. 자신이 너무 안일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핸들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니 안일했다. 이렇게 안일할 수가 없어. 무슨 생각으로 그놈을 혼자 두고 나왔지? 마른세수를 하는 것처럼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이내 거칠게 엑셀을 밟았다. 어서 아파트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차키도 뽑지 않은 채 지프에서 뛰어내렸다. 곧이어 그가 허겁지겁 계단을 밟아 오르는 소리가 아파트 전체에 울렸다. 계단을 오를수록 초조한 기분이 더 커져갔다. 척봐도 토르는 한 덩치 했다. 그런 놈을 성냥개비로 만든 것 같은 나무의자에 묶어놓고 안심했다니. 심지어 핑크색 수갑은 그냥 분위기나 돋우는 장난감이지 진짜도 아니었다. 완력으로 빼자면 빼지 못할 것도 아니다. 굳게 잠겨 있어야 할 현관문이 단번에 열어젖혀지는 순간 눈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적중하였다. 집안 어디에서도 토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분홍색 수갑만 팔걸이 끝에 덩그러니 걸려있었다.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다시 아파트를 뛰쳐나왔다.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발길이 닿는 대로 눈앞에 뻗어진 길을 내달리다가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우뚝 그의 몸이 멈추었다. 반동으로 상체가 휘청거렸지만 그는 이내 중심을 잡고 바로 섰다. 내가 그 놈을 왜 찾아야 하는데. 어차피 보스고 조직이고 다 좆까고 튈 계획이었다. 그가 애써 토르를 찾아다닐 이유가 없었다. 

 

온 길을 되돌아가면서 벅찼던 호흡이 점차 가라앉았다. 비슷하게 그의 기분도 묘하게 점점 바닥을 치고 있었다. 터덜터덜 아파트로 들어설 무렵 차키를 뽑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두 통이나 샀던 하겐다즈도 떠올랐다. 씨발 그걸 혼자 어떻게 다 먹어. 그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울컥하는 기분으로 거칠게 지프의 문을 열었을 때, 운전석에는 누군가 앉아 있었다. 토르였다.   

 

"넌 뭐야?"

 

무슨 질문이 그랬다. 제가 생각해도 뜬금없었다. 해명하자면 그는 좀 지쳐있었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이 뛰었고 머리에 너무 많이 열을 올렸다. 태양이 내리쬐는 도로 한가운데 퍼져버린 그의 지프처럼 맥이 빠진 그는 그저 토르를 쳐다봤다. 눈에 힘을 주어 좀 노려보기도 했다. 재촉하는 걸로 보였는지 토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돌아오질 않기에 무슨 일이 생겼나 해서 나와 보았소. 보아하니 별일 아니었나 보군. 

 

말없이 서있는 그를 내버려 두고 토르는 옆좌석에 놓인 하겐다즈 통을 집어 들었다. 내내 차 안에 있었으니 녹지 않고 버틸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반 이상 녹아 걸쭉해진 것을 토르는 검지 손가락 끝으로 푹 떠서 먹었다. 맛있네. 입술에 남아있는 크림을 마저 핥아 안으로 가져갔다. 젖은 혀끝이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된 것이 어쩐지 아쉬웠다.  

 

"땀을 많이 흘렸군."

 

토르가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훑어냈다. 말대로 드러난 이마가 축축했다. 다 식은 줄 알았는데 그만큼 땀을 많이 흘린 모양이었다. 뒤늦게 탈수현상이 오는 것처럼 눈앞이 아찔해졌다. 짧은 현기증을 틈타 입술이 다가왔다. 매끄러운 감촉이 맞닿자 갈증이 더 심해졌다. 아까의 젖은 혀를 쫓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을 그것을 붙잡아 빨아들이고 싶었다. <로켓>이 뒷목을 덮는 금발을 움켜잡았다. 좁은 통로에서 두 개의 혀가 앞다투어 얽혀들었다. 토르가 고른 것은 바닐라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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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인 브쿱로켓X아스가디언 토르(토르1 시점)

* 로켓토르 감금아닌 감금플:D

 

 

 

 

 

 

 

 

 

 

 

 

외계인을 조심해!

 

 

 

 

 

 

 

 

 

 

그의 집은 뉴멕시코에 있었다. 뉴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남서부 변두리에 위치한 단층 아파트는 입주민이 꼴랑 세 가구밖에 없는 낡은 건물이었지만 매물을 확인한 순간 그는 과감하게 이주를 선택했다. 비가 많이 온 다음날 수도꼭지에서 처음 1,2분 정도 흙탕물이 나오는 것을 제외하면 남자 혼자 살기에 괜찮은 집이었다. 식료품점은 차를 타고 나가서 15분 거리에 있었지만 대신 피자 배달이 가능했다. 안 그래도 그는 뉴욕의 고층빌딩숲에 질린 참이었다. 높으면 높을수록 좋은 게 빌딩이었지만 그것도 계속 보니 흥미가 떨어졌다. 창문을 열면 보이는 선인장처럼 미국답지 않은 이국적인 풍경이 최근엔 더 마음에 들었다.

 

촌구석에서 뭐해 먹고 살 거냐는 말엔 대충 둘러댔다. 카센터에라도 취직하지 뭐. 그는 몇 해 전부터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다. 양심의 가책이나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좀 존나 지겨웠다. 조직을 무슨 일수 떼먹고 사는 회사쯤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럴 거였으면 책상 뺄 때 야근수당이랑 퇴직금도 달라고 했을 것이다. (이따금 생명수당도 필요했다) 잠깐 머리 좀 식히고 와, <로켓>. 그것은 조직 내 그의 코드네임이었다. 은퇴를 결심한 뒤로 막 나가는 그에게 보스는 1년 치 휴가를 내주었다. 안식년 같은 거라고 생각해. 퍽 아쉬운 척을 했다. 연락은 계속 할 테니까 전화기 꺼놓지 말고. 좆까라 그래. 3개월 뒤 그는 프랑스 니스로 튈 계획이었다. 이미 해변 근처에 별장도 알아봐두었다.

 

그렇다 해도 뉴멕시코에서의 생활은 꽤 만족스러웠다. 아침 조깅을 하고, 66번 국도를 드라이브 하고, 차가운 맥주를 마시고 또 가끔 섹스를 하고소일거리로 해킹을 하거나 가상화폐를 투기하기도 하고 뭐 그랬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가 이어졌다. 그래서일까. 늘 예민하게 곤두서 동력을 멈추지 않았던 뇌가 퍼질 무렵 떨어진 날벼락은 그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매끄럽게 흘러가던 일상에 찾아온 잡음. 그것은 어느 날 그의 낡은 아파트 앞으로 배달 된 커다란 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혹시 외계인한테 납치당한 건 아니지?]

 

감시 겸해서 자질구레한 심부름(밀수 경로 및 자금줄 추적)을 시키는 게 좆같아서 한동안 휴대전화를 받지 않았더니 보스가 보낸 문자였다. 과거 네바다와 더불어 뉴멕시코 부근에서 붐이었던 UFO 출현과 소를 납치하는 외계인 따위의 구닥다리 농담이었다. 이참에 진짜 납치된 척하고 잠적해버릴까. 외계생명체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FBI의 보고가 진짜일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보단 귀찮아서 며칠 째 답장을 하지 않았더니 오늘 아침 발신인 불명의 트렁크가 배달 된 것이다.

 

시중에서 찾아보기 힘든 크기의 화물용 트렁크는 사람이 들어가 있기에 충분해보였다. 반은 경고로, 반은 엿이나 먹어보란 뜻으로 조직에서 보낸 것이었다. 토막 난 시체나 그보다 더한 것이 튀어나와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그이기에 태연하게 지퍼를 끌어내렸다. 그러자 열린 틈새로 샛노란 머리카락이 빠져나왔다. 여자시체인가. 외도를 하다 꼬리가 밟힌 정부나 재수 없게 걸린 고용인을 생각했다. 하지만 덮개를 열어젖혔을 때 트렁크 안에 들어있던 것은 여자가 아닌 금발머리의 벌거벗은 남자였다.

 

정말 시체라면 웅크린 모양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있었을 테지만 그가 트렁크를 건드리면서 접은 두 다리를 가슴에 붙이고 있던 자세가 흔들렸다. 그래도 의심스러워서 심장의 소리를 듣기 위해 남자의 가슴께로 고개를 숙였을 때 무언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발목과 마찬가지로 두 팔을 앞으로 묶으면서 자연히 모아진 가슴 사이로 깊은 골이 생겼는데(두툼한 승모근이 아니었다면 계속 여자로 착각했을지도) 거기에 손바닥만 한 카드가 끼워져 있었다. 크리스마스도 아니건만 빨간색 카드가 꽤 화려했다. 카드에는 남자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이 일주일 뒤에 데리러 가겠다는 짧은 메시지만이 적혀있었다. 카드를 빼면서 닿은 맨살이 뜨끈했기에 그는 부득 이를 갈았다. 차라리 시체가방을 보낼 것이지.

 

트렁크에서 꺼내고 나니 남자의 덩치는 생각보다 더 컸다. 이걸 어떻게 트렁크 안에 쑤셔 넣어왔는지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키를 비롯해 손과 발 모든 게 컸는데 그중에서도 봉긋하게 부푼 가슴이 정말 컸다. 한 손에 잡히기는 할까그는 저도 모르게 남자의 흰 가슴을 움켜잡을 뻔 했다. 색이 다른 꼭지가 뾰족하게 돋아있는 것이 신경 쓰여 시선을 내렸더니 다리 사이에도 만만치 않게 큰 게 보였다. 씨발. 욕을 하며 고개를 들자 이번엔 성난 근육질과 달리 오똑한 코에 긴 속눈썹 따위가 보였다. 뭐 이딴 게 있어.

 

영화배우나 어디 부잣집 도련님이라도 납치해온 것일까. 다시 트렁크를 닫아버릴까 싶었다. 대충 구석에 처박아두고 신경을 끄는 쪽으로 생각이 정리되던 차에 남자의 어깨근육이 움찔거렸다. 숱이 많은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더니 곧 닫혀있던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그게 꼭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여기가 어디오.”

 

목소리가 아직 잠겨있었지만 남자는 의외로 침착했다. 자신을 붙잡은 놈들과 같은 패거리란 생각은 못하는지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곧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곤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보았다. 이제 알아챘나, 마주친 시선이 꽤 지긋했다. 아름다운 눈동자로군. 뭐라고? 대답해줄 생각일랑 없었는데 플러팅 할 때나 나올법한 대사에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이것을 풀어주겠나, 손목이 저리다네.”

안 돼. 어차피 넌 다시 저 안으로 들어가게 될 거야.”

악당 같은 소리를 하는 군. 얼굴이 아깝게.”

 

오는 동안 트렁크 안에서 머리라도 부딪힌 것일까.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도 내뱉는 소리가 엄청났다. 그리고 난 나쁜 새끼가 맞거든. 그것도 아주 많이. 그가 말하기 전에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오딘의 아들이자 천둥의 신 토르라네. 지금은 잠시 권능을 잃었지만 나를 돕는 다면 훗날 아스가르드에서 보답하리라.”

 

그의 추측이 틀렸다. 그냥 약쟁이 새끼였다. 조직에서 유통하는 약 중엔 이렇게 환각을 보여주는 종류가 더러 있었다. 보아하니 어지간히 빨았나 본데. 밀린 약값을 갚지 못해 침을 질질 흘리면서 끌려오는 머저리 새끼들 역시 종종 보았다. 흡사 연극 대사처럼 떠벌린 말 중에 그나마 알아들은 건 남자의 이름이 토르라는 것 정도이다. 그마저도 헛소리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사실은 도널드라든가 그런 이름일지도.

 

그래 토르, 일주일 뒤엔 풀어줄 테니까 그때 보답해주던가.”

 

이참에 약을 끊어 등신아. 손목이 묶인 채 누워있는 토르를 내버려두고 그는 옷장이 있는 침실로 향하려 했다. 아무래도 이대로 일주일을 보내기엔 저 전라가 자꾸 거슬렸다. 피부에 그대로 닿는 찬 공기에 콩알만 한 꼭지가 더욱 도드라져 있었다. 그가 바닥에서 발을 떼면서 부스럭 소리가 나자 토르는 그제야 당황한 모양인지 요란스럽게 상체를 들썩였다. 기다리게기다리라니까!

 

래빗!”

 

설마 제 티셔츠에 프린팅 된 그림을 보고 소리친 건 아니겠지.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손에 집히는 대로 주워 걸친 것이 낭패였다. 그래도 이게 토끼는 아니지 않나. 인상을 구긴 그가 멈춰 서자 토르가 입가를 끌어올려 헤벌쭉 웃었다. 그새 얼마나 뒤척인 건지 산발이 된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내가 그, 그걸 잘 한다오!”

뭐라고?”

 

다시 한 번 깊은 곳에서부터 어처구니없어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Posted by 모노님 :

 

 

 

 

 

 

 

#로켓토르 AU

 

감독 브쿱로켓X신인배우 토르

 

 

 

 

죄송합니다, 감독님. 비행기가 결항되는 바람에 에이전시나 코디 팀 전부 발이 묶여서요. 그래도 내일 촬영은 예정대로 진행할 거니까 안심해주세요. 다만...매니저 대럴은 잠시 머뭇거렸다. 토르는 먼저 출발을 해서요. 아마 지금쯤 말리부에 도착했을 텐데. 그래, 여기에 있어. 방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네 별장 앞에서 만났어. 역시 거기에 갈 줄 알았어요. 수화기 너머의 대럴이 한숨을 내쉬었다. 토르는 뭘 입고 있나요, 벌써 서핑보드를 꺼내놓은 건 아니겠죠? 사실대로 말해주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이미 한바탕 서핑을 즐기고 난 후라 햇볕에 약한 피부가 발갛게 익어있는 남자를 앞에 두고. 감독님 부탁드릴게요. 물론 그와 함께 있는 건 무지무지 열 받는 일이지만 그래도 감독님이 옆에 있어주셔야 해요. 제가 도착할 때까지만요. 속 터지시면 한 대 치셔도 돼요. 얼굴은 피해서요. 소속사에는 비밀로 할게요. 그것을 끝으로 통화가 끊어졌다.

 

로켓 감독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 제법 난처한 상황이었지만 의외로 토르는 태연했다. 아니 그보단 뻔뻔했다. 로켓 스튜디오의 무어라 자신을 소개하려던 차에 딱 맞춰 대럴의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정정할까 싶었지만 이내 관두었다. 새파란 신인 배우와 저의 인연이 얼마나 갈까 싶었다. 어차피 식중독에 걸린 동료 대신 급하게 받아들인 화보 촬영 일이었다. 설마 관광 가이드 겸 베이비 시터까지 떠맡게 될 줄은 몰랐다만. 갸름한 턱에 난 거뭇한 수염을 문지르며 그가 말했다. 일단 저녁 식사나 하러 갈까?

 

결코 친절하다곤 할 수 없는 그가 먼저 식사를 권한 이유는, 차마 저걸 그냥 두고 가자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였다. 일몰이 떨어지고 하늘이 연보라색으로 물들었지만 토르는 여전히 상의를 벗은 채 허벅지 위로 올라오는 짧은 수영팬츠만 입고 있었다. 해변가를 지나오는 동안 남녀불문하고 걸어오는 캣콜링을 아는지 모르는지 토르는 캘리포니아의 오렌지빛 햇살을 듬뿍 머금은 얼굴로 껄껄 웃었다. 신인 배우의 앞길 따위 알 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건 좀 위험했다. 어렴풋이 말리부 주변에 데이트 강간 마약이 성행한다는 가십지 기사를 본 것 같기도. 무드랍시고 백사장 위에서 섹스를 하는 녀석들은 콘돔을 준비할리 만무했다. 그러다 성병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저걸 그냥 내버려두면 오늘밤 분명 잡아먹힌다. 저보다 큰 거구였지만 누군가 손을 붙잡고 사탕발림을 하면 저 블론디는 졸졸 따라가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뭘 먹고 싶어? 토르의 가슴에 달라 붙어있는 모래알을 툭툭 털어내며 물었다. 말리부가 처음이라는 토르는 두 눈을 끔뻑이며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다. 덩치를 보아하니 엄청 먹을 것 같은데 남자들끼리 인앤아웃 버거세트면 될까 싶다가도 또 여기까지 와서 버거는 아닌가 싶었다. 그럼 티본 스테이크랑 중국식으로 튀긴 꽃게가 먹고 싶네요. 망고맥주도 곁들여서요. 토르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시원스럽게 웃었다. 저 뻔뻔한 새끼...욕지거리가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말했다.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어.

 

밤이 무르익으면서 해안선을 따라 하나둘 조명이 켜지고 찰싹거리는 파도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 틈새로 터벅터벅 경쾌한 슬리퍼 소리가 저를 따라오고 있었다. 망고맥주는 무슨, 단맛을 떠올리기만 해도 속이 메스꺼웠다. 술을 얼마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무조건 바카디다. 저 놈은 백퍼 스트레이트겠지. 그럴싸하게 홀리지만 어쩐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유감스럽게도 자신은 스트레이트 취향이었다.

   

 

 

 

 

 

 

 

 

 

 

 

 

 

 

 

#로키토르 AU

 

짝사랑하는 로키X알못(?) 토르

 

 

 

로키 오딘슨은 우울했다. 워낙 감정을 숨기는 데 능통했기에 여간해선 티가 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그는 한동안 우울한 상태였다. 네 음습한 사랑이 곰팡이처럼 너를 병들게 하는 거야. 뇌 한구석에서 비웃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이미 늦었어. 그는 세속적인 희곡의 제목을 떠올렸다. 나는 이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올라탔어. 이성으로 치장하려 하지만 이토록 음습한 것이 그의 본능이었다. 아무렴 어때. 쉽사리 자신을 비관하지는 않았다. 비록 그의 형인 토르를 사랑한다 할지라도.

 

<형을 사랑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지>라는 제목의, 웹에서 우연히 알게 된 게이 사이트에 올린 글에는 무수한 댓글이 업데이트됐다. <역겨운 놈>, <신종 어그로?>, <내가 형이면 널 죽도록 팼을 거야> 등등. 이 씨발새끼들이. 로키가 답지 않게 상스러운 욕을 했다. 아무래도 빨랫감에 섞여 있는 형의 속옷을 보고 몇 번 뺀 적 있다는 내용은 쓰지 않는 게 좋았던 것 같지만. 토르가 날 죽도록 팬다고? 정말 뭣도 모르는 새끼들이었다. 그것을 보자 도리어 더욱 확실해졌다. 토르를 향한 정념 그대로의 순도 높은 사랑을.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날 오후, 토르는 여자친구와 데이트가 있었다. 로키는 더욱 우울해졌다. 아찔한 두통이 밀려와 아스피린을 두 알을 먹고 소파에 기대 앉아있자 내내 거울 앞을 서성이던 토르가 돌아보았다. 왜 계속 보지, 거울이 뚫어져라 보던데. 멋쩍은 모양인지 흘러내린 금색 머리카락을 연신 귀 뒤로 넘긴다. 빈정거렸지만 사실 거울을 보는 토르를 지켜보는 일은 그의 은밀한 취미 중 하나였다. 거울에 비친 매끈하니 잘생긴 얼굴을 보는 것이나, 자신에게 도취되어 흐뭇해하는 또 약간은 부끄러워하는 형을 보는 게 즐거웠다.

 

기분이 좋지 않은가 보구나. 뒤에서 다가온 토르가 로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두꺼운 팔이 감겨들면서 토르의 체취가 물씬 끼쳐왔다. 달큰한 살 냄새와 함께 언제 뿌린 것인지 자신의 향수 냄새도 같이 풍겨왔다. 괘씸했지만 한편으로는 만족스러웠다. 그래 그렇게 밖에서도 내 냄새를 풍기고 다녀. 어디가도 알아볼 수 있게끔. 미소가 그려지던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입술을 떨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곧 여기에 다른 여자의 냄새가 섞이겠지. 역겨운 화장품 냄새와 비릿한 땀냄새. 한데 섞이는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구역질이 올라왔다. 머리가 아파. 로키가 약한 소리를 내며 토르의 팔에 머리를 기대었다. 토르는 로키의 엄살에 약했다. 둘 다 그것을 알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토르는 이내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안해, 동생이 아파서 나갈 수 없을 것 같아. 통화를 마치기 전 그들만의 애칭 같은 것이 들리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로키를 괴롭혔던 두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보상이 되었는데 토르는 주방에서 초콜릿을 가져와 두 손으로 뚝 분질러 나누더니 한 조각 씩 로키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리고 TV에 익숙한 영화를 틀었다. 어린 시절 로키가 잠 못 이루는 날이면 틀어주곤 했던 만화영화였다. 세상에 이 나이에 토이스토리라니.

 

당신은 내게 남은 하나의 불빛마저 꺼버리려고 하시는 군요. 당신은 날 사랑하고 있어요. 그것이 죄악이 될지라도 전 그럴 수 없어요. 제가 가엾지도 않으세요? 눈에 들어오지 않는 만화영화 대신 로키는 또 다른 희곡의 대사를 떠올렸다. 형 솔직하게 말해 봐. 지금처럼 나를 조금 더 가엾게 여겨 봐. 잠들기 전 문을 잠근 이유는 내가 너의 방을 찾아갈 것이란 걸 알고 있어서잖아. 차라리 토르를 닮은 금발 거유가 나오는 질펀한 게이 포르노를 보는 게 나을 것 같았으나 로키는 잠자코 소파에 등을 깊게 기대었다. 지독하게 단 초콜릿을 억지로 녹여 삼켰다. 옆에 앉은 토르가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        

       

 

    

    

 

         

 

 

 

 

Posted by 모노님 :

[MCU/로켓토르] The Dirty Apron

2018. 7. 3. 03:39 from MCU

 

 

 

 

* A특공대 섹텐 터지는 브쿱보고 욕망 발싸하는 글  

* 로켓토르AU 배관공 브쿱 로켓X유부녀(?) 인간 토르

* 수위표현 있음. 빻은 소재, 표현 나옵니다... 

 

 

 

 

 

 

 

 

 

 

 

 

The Dirty Apron

 

 

 

 

 

 

 

 

 

 

 

선명한 에메랄드 블루의 눈동자와 날렵한 턱을 가진 남자는 동료들 사이에서 

<로켓>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곤 했다. 물론 별명이다.

 

그러한 별명이 붙게 된 까닭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가 로켓처럼 불같은 그의 성격이었고 두 번째는 그의 아랫도리 사정이었다. 시내의 싸구려 펍에선 마치 핵탄두를 달고 쏘아 올리는 로켓의 그것처럼 강한 가속력과 추진력을 자랑하는 그의 거시기에 대한 평판이 자자했다. 일부는 그와 찐한 정사를 나눈 이들의 자랑이었고, 일부는 그를 시기하는 남자들의 뒷담화, 나머지는 그와 한 번이라도 자 보고 싶은 이들이 퍼트린 소문이였다.   

 

성격이야 어쨌든 그는 상대로 하여금 쉽게 불씨를 당기게 하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한 마디로 섹시했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섹스어필과 별개로 로켓의 취향은 까다로웠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하이틴 스타처럼 어리고 말라빠진 애들은 좀 별로였다. 귀를 찌르는 고주파의 신음 소리도 싫었다. 그는 소아성애를 경멸했다. 차라리 살집이나 주름살이 있는 편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약간 신경질적이거나 피곤이 묻어나는 눈가, 긴 전희를 귀찮아하는 성숙한 타입에게 그는 끌렸다. 풋내 나는 처녀보단 익을 만큼 익어서 원숙한 매력이 좋았다. 저 새끼는 유부녀랑만 붙어먹는 쓰레기야. 또 다른 별명이 그랬다.

 

 

"부엌은 어느 쪽인가요, 오딘슨 부인?"

 

누가 봐도 장정의 사내에게 로켓은 일부러 부인이란 표현을 썼다.

부인이 아니라오.

실례했습니다. 앞치마를 두른 블론디라 그만 착각했네요.

 

로켓의 직업은 배관공이었다. 그는 나름 착실히 일했다. 특히 오래 된 수도관을 교체하거나 막힌 관을 뚫는 일을 잘했다. 그러면서 겸사겸사 부인의 아래도 뚫는 거고. 전화를 받고 방문한 오딘슨 씨 댁의 현관문 앞에 섰을 때만 해도 작업용 점프슈트를 입은 로켓은 노동자로서 의무를 다 할 계획이었다. 결백하건데 그의 주머니 안에는 콘돔도 없었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집주인인 토르 오딘슨 씨와 마주한 순간 그의 계획에 약간의 변동이 생겼다.

 

어깨까지 내려온 금발을 가지런히 모아 묶었으나 올이 가는 머리카락이 빠져나와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혹시 영화배우인가? 척 봐도 핸섬한 사내였다. 오느라 수고 많았소. 로켓을 보고 씩 웃는 얼굴은 또 예쁘장하니 달라 보였다. 이제껏 그를 맞이한 앞치마들은 흰색이나 분홍색의, 나풀거리는 프릴이 달린 그런 것들이었는데 뭔가 작업 중이었는지 심플한 스트라이프 패턴의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아니, 아니 중요한 건 앞치마 너머에 있는 것이다. 저 빵빵한 가슴. 앞으로 떨어진 앞치마 줄이 보정속옷처럼 가슴을 조이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혹시 멜론이라도 감춰두고 있는 거 아니야? 로켓은 앞치마를 들춰내 그 안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채 문턱을 밟았다.

 

토르를 뒤따라 부엌으로 향하면서 로켓은 슬쩍 집안을 둘러보았다. 고풍스런 집이었다. 생소한 어투도 그러하고 외국인인가 싶었다. 가족사진이 들어있는 액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로켓은 집안 어딘가에 있을 토르의 남편을 떠올렸다. 6.3피트의 유부녀를 내버려두고 야구 중계 재방송을 틀어놓은 채 오딘슨 씨가 곯아떨어진 사이, 얼간아 네 부인은 내가 따먹을 거야. 로켓은 섹스 전 분위기를 타는 변태였다. 

 

장신의 성인 남성 둘이 들어서니 부엌의 빈 공간이 금세 줄어들었다. 싱크대와 뒤에 있는 사이드테이블 간의 거리가 가까워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하려면 어깨를 부딪치는 것이 필수일 것 같았다. 싱크대 위에는 껍질을 벗기다만 감자와 당근 따위가 보인다. 스튜? 커리? 정체를 알 수 없는 달짝지근한 소스가 은근한 불에 데워지고 있었다. 오래된 집이라 수도관이 낡았는지 물 나오는 게 여간 시원찮소. 찔끔찔끔하는 것이 답답해서 당신을 불렀지. 낮은 목소리가 코앞에서 울렸다. 오 그런 건 내가 전문이죠.

 

로켓은 입고 있던 점프슈트의 상의를 벗어 허리에 묶었다. 그리곤 공구상자를 꺼내 찬찬히 수도관을 들여다보았다. 배관 나사가 느슨해졌지만 계속 나사를 풀었다. 사실은 지금 당장 토르를 몰아붙이고 싶었다. 그 커다란 젖을 흔들면서 뭐하고 있었어. 밑구멍에 당근이라도 쑤셔 박으면서 혼자 재미보고 있었던 건 아니야? 말해, 박았지? 정말 여기에 아무 것도 박은 것이 없어? 내숭 떨지마. 사실은 이런 걸 좋아하잖아ㅡ 그런 천박한 대사를 하고 싶었다. 음 하지만 그건 강간이잖아. 난 강간은 안 해. 화간이면 몰라도.

 

"혹시 꼬챙이같은 게 있을까요. 막힌 걸 뚫어내야 될것 같아요." 

"선반에 그런 게 있던 것 같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토르가 허리를 일으켜 위에 달린 선반의 문을 열었다. 여기가 아닌가. 로켓은 더이상 주저할 것 없이 토르의 뒤에 바짝 붙어 앞치마 안으로 두 손을 집어넣었다. 빵빵한 가슴이 두 손 가득 잡혔다. 꼬챙이는 거기에 없소만. 앞에는 싱크대, 뒤에는 로켓이 버티고 서 있어 토르는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네 밑을 뚫을 꼬챙이는 여기에 있지. 어느새 단단한 발기한 페니스가 토르의 엉덩이를 쿡쿡 찔러댔다. 버디 우리는 좋은 사이가 될 것 같지 않아? 흥분에 긁어진 목소리를 귀에 불어 넣었다.

 

그대로 토르의 바지를 내릴 생각이었다. 여태 별다른 저항이 없었던 토르가 갑자기 엄청난 힘으로 자신을 가둔 로켓의 팔을 뿌리치더니 뒤돌아 그의 뺨을 후려쳤다. 짝! 우렁찬 마찰음이 부엌을 울렸다. 다행히 휘청거리진 않았지만 얻어맞은 뺨이 얼얼하니 이가 흔들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울컥하며 마주친 눈동자 속엔 진한 열이 끓는다. 씨발 화끈하네. 욕설과 함께 토르의 뒷머리를 움켜쥔 로켓이 물어뜯듯 입을 맞추었다. 벌어진 빈틈 사이로 혀를 밀어 넣더니 토르의 혀를 뽑아버릴 기세로 끌어당기고 마구 깨물었다.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흘러내리고 뒷걸음치던 토르의 구두 뒷굽이 싱크대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것이 신호인 것처럼 거친 키스가 점차 농밀해지고 토르의 어깨가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손가락 사이로 얽힌 금발을 놓지 않은 채 로켓이 남은 팔을 토르의 허리에 둘렀다. 이제는 그들이 함께 앞치마를 더럽힐 시간이었다.

 

 

 

            

 

 

 

 

 

 

 

 

 

 

 

 

Posted by 모노님 :

 

 

 

 

로켓의 토르 입덕 부정기:D

* 로켓과 토르만 그루트어를 알아 듣는다는 설정

* 2편에서 완결입니다.

 

 

 

 

 

 

 

 

 

폭발의 반동으로 튕겨나간 몸이 럭비공처럼 공중에 던져졌을 때 그때까지만 해도 로켓의 의식은 남아있었다. 이거 다리 한쪽이 날아가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 진짜 큰일은 바닥에 떨어진 다음이었다. 무너진 콘크리트 아래 숨어있던 지뢰로부터 퍼져나간 충격파가 등 뒤에서 폭발의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뜨거운 화마가 순식간에 번져나갔고, 이제 그의 몸은 불구덩이를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터져 나온 굉음에 일시적으로 고막이 나갔는지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젠장. 죽음의 두려움보다도 그냥 쪽이 팔렸다. 지면을 얼마 남기지 않고 의식이 희미해지던 그때였다.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누군가 억센 힘으로 그를 붙잡았다. 토르였다. 그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번쩍하던 것이 천둥이라는 걸 알았다. 화염보다 강한 빛 속에서 토르가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먹은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로켓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버디 너는 신이었지. 마지막으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사랑이 아닐 리가

 

 

 

 

 

 

 

 

"오늘 뉴욕 날씨는 맑음이었는데 말이지."

 

 

날씨가 너무 화창해서 일기예보에서 일광욕을 권할 정도였는데 오늘 휴가 낸 사람들은 전부 환불 신청해야겠네. 경쾌한 빈정거림에 토르가 토니 스타크를 노려보았다. 왜 너도 자장가 필요해? 토니가 이 이상 천둥의 신의 심기를 거스르기 전에 브루스 배너가 그를 데리고 치료실 밖으로 나갔다. 그냥 농담 좀 한 거야. 쟤네 하는 꼴이 귀여워서. 지금 엄청 오버하고 있잖아.

 

불과 반시간 전만 해도 절체절명의 순간이 있었긴 했지만굳이 말하자면 토르 오딘슨은 약간 오버하고 있는 게 맞았다. 커다란 폭발이었으나 쏜살같이 날아간 토르가 로켓을 구했고 그의 전지전능한 벼락으로 화염마저 잠재웠다. 이어서 스타크 구조대가 로켓을 신속히 의료실로 옮겼고 바이탈 싸인과 전신 MRI, 나아가서 부서진 건물의 파편으로 인한 파상풍 감염 여부까지 체크한 결과 전부 정상이었다. 털끝이 불에 살짝 그을린 것을 빼면 로켓은 잠시 기절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굳은 미간에 준 힘을 풀 생각이 없어 보이는 토르에 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래빗의 흉터는 언제 생긴 건가."

 

의료실에 도착하고 검사를 위해 로켓이 진찰대에 올랐을 때, 옷 아래 감춰져 있던 등 쪽의 커다란 흉터를 보고 토르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체내 밖으로 튀어나온 금속부품과 얼기설기 대충 아문 흉터 자국을 처음 보았을 때 퀼 역시 경악했기에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창 밖에서 울리는 불길한 소리에 재빨리 토르의 팔을 붙잡았다. 부르르 떨리는 주먹에서 서슬퍼런 스파크가 튀어오르고 있었다. 진정해, 이건 지금 생긴 상처가 아니야. 하지만 이후로도 뉴욕의 날씨는 계속 낙뢰주의였다.

 

"깨어나면 물어봐. 네가 물으면 전부 말해 줄 거야."

 

일어나게 래빗, 그대는 용맹한 전사잖아. 낮은 목소리가 퍽 간절했다. 로켓이 깨어나서 머리맡을 지키는 토르를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데이빗 핫셀호프도 이런 팬 서비스는 안했다고. 그리고 퀼의 바람대로 곧 로켓이 눈을 떴다. 래빗! 뭐, 뭐야? 불쑥 다가오는 커다란 그림자에 로켓이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반응 보니까 멀쩡한 것 같네. 토르를 피해 눈알을 굴리던 로켓이 상황을 파악했는지 팔짱을 끼고 있는 퀼에게 이죽였다.   

 

"이딴 걸로 멀쩡하지 않을 거면 진작 죽었어."

"무슨 그런 심한 말을!"

 

난 데 없는 토르의 호통에 로켓과 퀼 둘 다 깜짝 놀랐다. 여태 걱정하던 모습과 달리 로켓이 깨어난 뒤로 토르는 화가 난 모양새였다. 사정을 알 리 없는 로켓은 얘 왜 이러냐는 눈치로 퀼을 쳐다봤다. 몰라 너네가 알아서 해. 시선을 피하지 못하도록 좀 더 바짝 거리를 좁혀 다가온 토르에 로켓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색이 옅은 파란색 눈이, 반대편에 제가 주었던 그 눈이 바로 코앞이었다.

 

"스타크 말대로 자네를 말렸어야 했네."

"별 거 아니라니까."  

"하마터면 큰일이 날 수도 있었어."

"잠깐 방심한 것 뿐이야."

"너무 무모했네. 앞으로는…."

"무모? 지금 무모라 했냐? 온몸이 바짝 탈 때까지 니다벨리르의 고리를 열었던 장본인이? 

난 그때 네가 죽는줄 알았어!"

"그때는 그것 밖에 가능한 방법이 없지 않았나!"

"잘난 데미갓에겐 가능한 일이 나한테는 무모했나 보지."   

 

토르에 기세에 눌려있던 로켓이 제 버릇 못 버리고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넌 진짜 왜 그러냐. 대신 이마를 짚은 것은 앞서 빠져나갈 타이밍을 놓친 퀼이다. 아직 상태가 좋지 않은 모양이야 친구. 마찬가지로 부득 이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화를 눌러 참은 토르가 뒤돌아 성큼 성큼 의료실을 빠져나갔다. 미련 없이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퀼이 넌지시 말했다. 지금이라도 따라가지 그래. 로켓이 대답 대신 벌러덩 드러누웠다.

 

 

"분위기 초치는 건 드랙스 다음으로 네가 최고인 것 같다." 

"분위기는 무슨 얼어죽을." 

"그냥 좋아한다고 하지 그래."

"누가 누굴 좋아한다고!"

"잘 보이고 싶으니까 지뢰찾기하면서 오버하고, 죽을 고비 넘겨놓고 쎈 척하는 거잖아. 이쯤 됐으면 인정해라. 너 걔한테 완전 뿅 가있잖아?"

 

뿅 가있다니 그 정돈…. 그러나 방금 전 퀼에 의해 제대로 정곡을 찔렸음을 부인할 순 없었다. 로켓은 멍청하지 않았고 의외로 그렇게 뻔뻔하지도 못했으니까. 전에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알았다. 필요도 없는 배터리를 괜히 훔쳤을 때처럼 그는 여전히 비슷한 짓거리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때 자신은 어떤 조언을 들었던 가.

 

거기까지 떠올리자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로켓이 애써 무시해왔던 그것을. 모르는 척, 없는 척 했던 사실을. 유전자 변형 실험으로 향상 된 고지능의 뇌가 팽팽 돌아가고 서서히 한 가지 전제를 도출해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사랑 받은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이번엔 사랑하는 게 두려워서? 

 

"툭 까놓고 솔직하게 얘기하라니까." 

"그래 좋아한다 좋아해! 존나 좋아한다!"          

  

그건 보석도 빌딩도 아니고 도움될 게 하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버린 이상 진실이었다. 미친 과학자들이 제 머리를 다시 한 번 조립해주었으면, 차라리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 정도로 괴로웠다. 그 빌어먹을 번식기, 상사병.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정말 괴로운 것은 아마도 지금부터였다. 로켓은 토르를 사랑하는 게 맞았다.

 

 

 

 

***

 

 

 

 

다시 사춘기 청소년 그루트의 이야기이다. 그루트의 보호자는 원체 쑥스러움이 많고 솔직하지 못했다. 좋은 건 싫다고 말하고, 싫은 건 더 싫다고 말하는 꼬일 대로 꼬인 성격 탓에 낭패를 본 적도 많았지만 그게 그의 천성이었다. 때문에 로켓이 토르를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로맨티스트가 아닌 로켓은 어떠한 제스츄어도 취하지 않았고 모든 게 전과 같았다. 오히려 상황은 더욱 안 좋아졌다. 그 이후로 토르가 찾아오는 일은 없었고, 어느덧 모레가 오랜 휴식을 마친 밀라노가 지구를 떠나는 날로 정해졌다.

 

그동안 로켓은 신나게 땅을 팠다. 인생에서 가장 한심한 시기가 지금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만큼 구질구질했다. 그건 그냥 니다벨리르의 환영 같은 거였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아무렇지도 않아질걸. 애초에 말이 되냐, 걔는 신이고 나는 가끔 네 발로도 걸어. 뭣 모르고 부정하던 때 보다도 자각한 후에 변명거리를 찾는 걸음이 더욱 무거웠다. 오늘만 해도 로켓은 배너가 준 해열제를 두 개나 씹어 먹었다. 질풍노도의 그루트는 슬슬 이것이 성가시기 시작했다. I am Grootㅡ

 

너는 내 아빠면서 네가 토르를 사랑하는 건 왜 말이 안돼? 그루트가 던진 카운터 펀치에 모니터를 손보던 로켓은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슨 헛소리야? 가서 잠이나 자! 아직 초저녁이건만 빡빡한 노인네같은 잔소리를 했다. I am Groot! f가 들어가는 그것을 외치며 그루트가 주먹 쥔 손으로 무릎을 쾅치고 로켓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너 진짜 말버릇 고쳐라! 소리쳤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미치겠네. 이미 날아가버린 집중력에 애꿎은 스위치를 켰다 껐다 반복하며 로켓은 침울에 빠졌다.

 

그리고 다음 날, 로켓은 다른 크루들 보다 하루 먼저 포드를 타고 지구를 떠났다.

 

 

 

"그 건방진 너구리는 어디 가고 너희 뿐이야?"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가 지구를 떠나는 날. 승선하는 크루들을 배웅하던 중 토니 스타크가 자연스럽게 운을 띄웠다. 로켓은 휴가를 받고 먼저 출발했어. 머리를 좀 식히고 싶다나. 너네 휴가 시스템도 있어? 복지가 좋군ㅡ 너스레를 떨면서 토니와 퀼은 슬쩍 토르의 표정을 살폈다. 

 

토르는 조금 놀란 듯 보였다. 작은 다툼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를 배웅하기 위해 왔는데, 이렇게 얼굴도 보지 못하고 송별식을 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뜻밖의 빈자리에 곧은 눈썹이 허물어지면서 눈에 띄게 서운해하는 티가 났다. 너의 빅팬이 너를 배신하고 가버렸네. 토니는 과장에 과장을 더해 토르를 놀리고 싶은 것을 참느라 입이 간지러워 죽을 것 같았다. 

 

뭐 나중에 연락할 기회가 있지 않겠나. 평소의 토르답게 털털하려 했지만 억지로 끌어올린 입매가 오래가지 못했다. 둘 다 눈치가 없는 부류에 속했고 이런 분야에선 유독 숙맥 같았지만 그래도 이쪽은 등을 밀어주면 전진 할 추진력이 있어 보인다. 우주로 도망 가버린 어느 겁쟁이 보다야 훨씬 나았다. 그루트는 지금쯤 포드 안에서 지지리 궁상을 떨고 있을 보호자를 떠올렸다. 그의 트래쉬함에 넌더리가 난 혹자는 저렇게 살다 죽으라 했지만 그러기엔 로켓이 불쌍했다. 그는 생각보다 꽤 봐줄 만한 남자였다. 적어도 그루트에겐 그랬다. 

 

걸음을 멈춘 그루트가 뒤돌아 손을 흔들었다. 그동안 제법 정이 들었던 터라 지구의 멤버들도 떠나는 길을 정겹게 배웅해주었다. 좌우로 신나게 손을 흔들던 도중 한쪽에 서 있던 토르와 눈이 마주쳤다.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하는 그에게 그루트가 마지막 인사를 보냈다. 토르만이 그 인사를 이해했을 것이다.  

 

"I am Groot."

 

 

로켓이 널 보고싶어 해.

 

 

 

 

***

 

 

 

 

쫒기듯 포드를 타고 나온 것까진 좋았으나 로켓에게는 목적지가 없었다. 좌표에 어떤 것도 입력하지 못한 채 우주를 유영하는 포드 안에서 로켓은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대로 우주를 떠다니는 무기물이 되고 싶었다. 아니면 양자 소행성 지대에 휩쓸려 어느 척박한 별에 불시착하는 것도 좋았다. 그렇담 딴 생각일랑 할 겨를이 없겠지. 하필이면, 몇 번이고 탔었던 작은 포드가 이제는 토르를 너무 많이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무심결에 그의 손이 좌표를 향했다. 니다벨리르. 복잡한 머릿속에 유일한 별의 이름이었다.

 

중성자별에 도착하고 나서야 로켓은 조종석에 쾅쾅 머리를 박았다. 등신. 머저리. 지구를 뛰쳐나온 이유가 뭔데! 이래선 그의 자취를 좇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혼자 추억 여행이라도 하나 보지? 터덜터덜 포드 밖을 걸어 나온 로켓을 드워프 에이트리가 맞아주었다. 오랜만이네! 토르는 어디 가고 혼자 왔나? 걔가 나랑 같이 올 이유가 또 뭐가 있겠어전과 달리 축 늘어진 기운에 에이트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편하게 구경하게. .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에너지로 출렁이는 중성자별과 그것을 둘러싼 지성과 과학, 신화의 산물은 다시 봐도 아름다웠다. 우주에서 가장 강력하고 끔찍한 무기를 만들어 낸다는 니다벨리르는 로켓에겐 전설이었고, 그를 그곳에 데려가 준 것은 토르였다. 그리고 눈앞에서 죽어가던 별에 불을 밝혔다. 여기까지 와서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잔뜩 빈정거렸지만 사실은 그때 반했던 거다. 그를 홀린 것은 전설 속 빛나는 별의 섬광이 아니라 토르였다.

 

버디 너처럼 강한 건 본 적이 없어. 너처럼 끝내주게 멋있는 것도 처음이야. 이것 봐, 난 너 때문에 병까지 걸렸어! 분통이 터졌지만 탓할 상대가 옆에 없었다. 억누르려고 할수록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졌다. 포드를 타고 떠나오길 다행이었다. 토르가 있었다면 떠벌리지 않고 언제까지 견딜 수 있었을까? 마침 저기 뛰어들기 딱 좋은 용광로가 보였다.

 

"이봐."
"에이트리 그냥 내버려 둬. 뇌를 반절 녹이지 않으면 못 견디겠으니까." 

"반이 아닐텐데. 그게 아니라, 널 보러 왔다는데." 

 

한참을 불러도 못 알아 듣더라고. 에이트리의 목소리에 로켓이 뒤늦게 고개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토르가 있었다. 언젠가 그들이 처음 니다벨리르를 찾았을 때와 같이 토르가 거기에 있었다. 말도 안돼.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그는 지금쯤 지구에 있어야 했다.  

 

"같이 스톰브레이커를 만들었잖아, 그새 잊었나?" 

 

도끼날이 달린 커다란 무기를 한손으로 거뜬하게 흔들어보이며 토르가 로켓을 향해 씩 웃었다. 놀랐나 보군. 내가 올 줄은 몰랐지? 개구진 웃음에 로켓은 놀라는 정도가 아니라 기절초풍하기 직전이었다. 쟤는 진짜 신이라, 내가 어디 갔는 줄도 척하면 알고 눈앞에 짠하고 나타나는 건가? 청승이란 청승은 다 떨고 있던 이 타이밍에? 저렇게 폼나게?

 

"래빗. 나를 섭섭하게 하지 말게. 아니면 이제 내 얼굴도 보기 싫어졌어?"

"말도 안돼!"

"그럼 왜 인사도 않고 떠난 건가?"

 

로켓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생겼다. 첫 번째는 지금 당장 니다벨리르의 뜨거운 용광로로 뛰어드는 것. 두 번째는 토르에게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는 것. 둘 다 머리가 터지도록 어려운 일이었지만 둘 중 하나는 해야 했다. 반면에 토르는 로켓이 이것저것 다 고민하고 망설이게 내버려둘 정도로 인내심 있는 성격이 못되었다.   

 

"자네의 동료가 알려주길, 내가 물으면 전부 말해 줄 거라던데."

 

 

래빗 그대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 알려줄 텐가? 어쩌면 도망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마저 빈틈없이 닫혀버렸음을 로켓은 깨달았다. 그 문을 제가 닫았다. 마주선 토르 앞에서 심호흡이 필요했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병을 끝낼 때가 온 것이다. 마침내 고백의 순간이었다.     

 

 

 

 

 

  

 

 

 

 

           

 

   

 

 

Posted by 모노님 :

 

 

 

 

로켓의 토르 입덕 부정기:D 

 

 

 

 

 

 

 

 

 

 

가장 먼저 변화를 눈치 챈 것은 그루트였다. 어쩌면 당연했다. 전설 속 니다벨리르에 꼭 가보고 싶다며 로켓이 관심을 보인 때나,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회한을 털어놓으며 데미갓이 눈물을 보였을 때도 그루트는 그곳에 있었다. 원래 이런 것은 제3자의 시선에서 보는 게 빨랐다. 미성숙한 플로라 콜로서스지만 그 무렵 그루트는 사춘기였다. 퀼의 잔소리에도 놓지 않았던 게임 미디어의 영향과 더불어 한창 예민할 시기의 청소년은 미묘해진 기류를 쉽게 감지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였을까. 저게 진짜 니다벨리르야! 얼어붙어있던 별에 불을 밝히며 토르가 소리쳤을 때? 중성자별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맨몸으로 견디고 사지의 끝에서 용광로를 가동시켰을 때? 마침내 탄생한 스톰브레이커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공명하고 흩날리던 눈보라 속에서 로켓이 바라보던 것을 그루트 또한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거대한 별의 고리가 움직이며 찬란하게 빛나던 순간 그의 안에서 무언가 달라졌다고.

 

 

 

 

 

 

 

사랑이 아닐 리가

 

 

 

 

 

 

 

 

 

그루트와 사라졌던 모두가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보호자를 향한 타당한 의문이 한 가지 확신으로 바뀐 사건이 일어났다. 다시 만난 소중한 이들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치열했던 전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밀라노는 한동안 더 지구에 정박했다. 파괴되었던 도시를 복구하는 작업에서 지구의 기술팀을 지원하며 로켓은 오랜만에 뇌 사이에 낀 먼지를 닦아낸 기분이었다. 재앙의 주둥아리를 놀리며 묵은 스트레스를 풀 때마다 -아이언맨이라면서 왜 철이 아니라 티타늄이야? 아직도 그런 구닥다리 싸구려 금속을 쓴다고?- 퀼이 대신 사과를 전했다. (썩 진지하진 못했다) 다행히 산전수전 다 겪은 토니 스타크는 전보다 온유했기에 기꺼이 어벤져스 본부에 방을 내주었다.

 

이상의 전조는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났다. 로켓은 이제껏 열이라곤 나본 적이 없었다. 훔치고 싶은 것을 못 훔쳐 배가 아파 드러누운 적은 있어도 열이 나서 비실비실 누운 적은 없었다. 단순히 피로가 쌓인 줄 알았는데 귀를 데우는 뜨끈한 열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자신이 꽤 건강한 축에 속한다 생각했기에 그도 당황스러웠다. 때문에 가모라의 부탁으로 브루스 배너란 자가 왔을 때도 군말 없이 진찰대에 오른 것이다. 의사선생님 이건 뭔가요. 숨이 가쁘고 열이 나요.

 

프라이데이 진찰 내용 전부 기록해.”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토니 스타크는 브루스 배너가 로켓을 진찰하러 간다는 소식에 즐거운 마음으로 동행했다. 우주에서 온 말하는 너구리를 살펴볼 기회는 흔치 않잖아. 나도 같이 해부해 봐도 돼? 자네 언제부터 의료분야에도 관심을 가졌어? 프라이데이로 로켓의 신체를 스캔하는데 만족해야 했지만 토니는 소싯적의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과학자의 순수한 호기심도 있지만 그 역시나 스트레스가 쌓여 있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로 토니 스타크가 밀라노 비행선의 백업자료와 부품의 대부분을 털어갔다)

 

기침은 없는 것 같고. 구역질이 나거나 오한이 들지는 않습니까?”

됐으니까 해열제 같은 거나 내놔. 그거면 되겠지.”

지구에서 먹는 해열제도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군.”

로켓, 제대로 진찰을 받는 게 좋아.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다시 한 번 증상을 말해주겠나?”

“...열이 나면서 입안이 마르고 가슴이 두근, 가슴이 두근두근 거려.”

 

그거 꼭 상사병 같네.”

 

두근거리던 당시의 감각을 떠올리며 가슴에 손을 얹은 로켓을 비롯해 진찰실 안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하자 토니 스타크는 태연히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금 안 어울리는 소리했다고 그러나본데, 내가 천재에 조만장자지만 플레이보이기도 해서 말이야 그 정도 문학적 감성은 있거든. 지구에 있는 동안 토니에 익숙해진 크루들이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젓던 그때 브루스 배너는 무언가 떠오른 듯 황급히 손을 움직였다. 검색 엔진이 켜지고 배너가 하나하나 키워드를 입력했다. 번식기 증상. 관련 자료가 뜨면서 누군가 올린 질문글도 함께 떠올랐다. 저희 집 페럿이 며칠 전부터 열이 나고 밤마다 우는데 번식기인가요?

 

생물에 따라 번식기가 되면 발열을 하거나 외형이 변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진짜 상사병이라고?”

그러고 보니 로켓 너 털이 좀 반지르르 해졌다?!”

 

어느새 흥미진진한 표정을 하고 있는 토니와 퀼에게 화도 내지 못할 만큼 로켓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번식기라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잠 못 이루는 이유가 상사병 때문이라고? 니들 내가 누군지는 아냐? 로켓은 유전자 변형 실험을 통해 태어났다. 정신 나간 과학자들이 그의 몸을 갈기갈기 분해하고 퍼즐 맞추듯 다시 재조립할 때 뇌를 휘저어 지능을 향상시키긴 했지만 번식기나 상사병 같은 원초적이고 감정적인 그런 불필요한 요소는 진즉에 제거했을 터였다. 그런데 내가? 누구를?

 

잘 생각해봐, 네가 반한 족제비 아가씨가 누군지.”

오 어쩌면 우리가 아는 사람일수도 있는 거잖아.”

 

로켓은 지금 이 순간 제 손에 개틀링건이나 화염방사기 같은 게 들려있어서 이새끼들을 전부 쓸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해열제를 먹고 며칠 쉬면 나아질지도 몰라.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눈치를 보는 배너를 무시하고 (다시 생각해보면 이놈이 원흉이었다) 로켓이 진찰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본부에 반려견은 출입금지인데 누가 골든 리트리버라도 데려왔어? 지구를 떠나기 전에 반드시 토니 스타크의 방에 폭탄을 설치하리라 다짐하며 로켓이 진찰실을 나서려던 차였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고개를 내밀었다. 내 소중한 친구가 아프단 소리를 듣고 왔는데. 서서히 본래의 금발을 찾아가고 있는 짧은 머리카락과 눈가에 흉터를 달고도 해사한 얼굴을 하고 있는 토르였다.

 

래빗, 몸은 괜찮은가?”

 

갑작스런 등장에 로켓은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 왜 말문이 막힌 거지? 토르는 한쪽 무릎을 굽혀 멀뚱히 서있는 로켓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브루스 배너를 향해 물었다. 배너, 래빗은 괜찮은 거지? , 괜찮아. 열이 조금 나는 걸 빼곤배너보다 현재 로켓의 상태를 정확히 브리핑해준 것은 다름 아닌 프라이데이였다.

 

-보스가 지정하신 <해부해보고 싶어>의 심박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설마쟤야?”

 

 

 

 

 

***

 

 

 

 

 

혹시 몰라 배너가 건네준 해열제가 영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이튿날이 되자 열이 내렸다. 침대가 지겨워진 로켓은 오랜만에 몸을 좀 움직이고 싶었다. 그는 지시를 내리는 테크니션보단 현장에서 뛰는 오퍼레이터에 가까웠다. 해서 도시의 복구 작업 중 하나인 플라잉 도넛이 뿌린 지뢰 제거 작업에 참여하기로 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 퀼은 짐짓 염려하는 척하면서도 그때의 화제를 꺼내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로켓이 철저히 무시했다. 로켓은 그날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할 셈이었다. 지구의 구닥다리 인공지능이 떠드는 말을 어떻게 믿어. 여전히 잠들기 전이면 몸이 지면에서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가슴이 두근두근 뛸 때가 있지만 그건 그냥, 아직 컨디션이 오락가락하나 보지. 그것이 불쾌하거나 좋지 않은 기분이었는가 하면 결코 아니지만그렇다고 토르를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토르는 강하고, 매력적이었다. 사실 누구나 그를 보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그래서 로켓은 제가 토르를 좋아한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끝내주는 무기를 본 것처럼, 마치 빛나는 니다벨리르를 봤을 때의 환희와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그는 이상했다. 이상한 것을 알고 있지만 로켓은 모른 척하기로 했다.

 

미리 현장에 와있던 토니 스타크는 로켓을 보자 평소처럼 비꼬는 대신 윙크를 날리곤 시선을 돌렸다. 흘깃 시선이 향한 쪽에는 토르가 있었다. 그도 지뢰 제거 작업에 참여하는 모양이었다. 심부전으로 쓰러질 것 같으면 말해. 로켓이 지구에서 배운 손가락 욕을 펼치기도 전에 아이언맨은 아머를 닫고 날아가 버렸다.

 

열이 있다고 하던데 나와도 괜찮은 건가?”

별거 아닌데 다들 호들갑 떤 것뿐이야. 열도 내렸고.”

그렇다면 다행이네.”

 

토르와 만나는 것은 실상 오랜만이었다. 그는 복구 작업을 도우면서 동시에 아스가르드인들을 지구로 이주시키는 일까지 하느라 토니 스타크 만큼이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 진찰실에 찾아온 토르를 봤을 때는 제법 놀랐었다.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눈 뒤 금방 본부를 떠났지만 그를 만나서 솔직히 좋았다. 지끈지끈하던 열이 내린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일지 모른다.

 

-매복형 지뢰야. 충격을 주면 파바박 터지는 그거. 위력은 별 거 아니고. 그냥 다리 한쪽이 날아가는 정도?

 

무전기로 토니 스타크 신랄한 설명을 들으며 로켓은 지뢰밭 위에 올라섰다. 인간보다 가벼운 신체이니 로켓이 활약하기엔 제격이었다. 로켓은 탐지기나 지뢰를 찔러볼 장검 대신 기관총을 집어 들었다. 지뢰는 깊게 묻혀있지 않아서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몇 개 있었다. 음악이 있으면 좋으련만. 조금 아쉽다고 생각하면서 로켓이 총을 들고 뛰어내렸다. 상념을 잊는 데엔 몸을 쓰는 게 최고였다.

 

겉으로 드러난 지뢰를 멀리서 저격하자 폭발과 함께 충격파가 퍼지면서 근처에 매몰돼있던 지뢰들이 우르르 함께 터져나갔다. 지뢰를 터트려서 제거하면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피어오르는 불꽃과 연기 사이를 펄쩍펄쩍 뛰어다니면서 로켓이 사방에 총을 쏴댔다. 백발백중 지뢰에 맞았고 어느새 절반 이상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저 싸이코너구리 좀 누가 말려봐

-역시 래빗은 최고군!

 

깊게 내쉬는 한숨에 이어서 껄껄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는 토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나설 필요도 없이 제거 작업이 순식간에 진행되고 있었다. 익숙한 폭음 속에서 슬슬 숨이 벅차오는 것을 느끼며 로켓은 흥분했다. 신이 나면서 행동은 더욱 대범해졌다. 멀리서 쏠 것 없이 근처에 있던 지뢰를 총으로 터트려 피하는 것은 약간의 스릴을 더한 게임 같았다. 지뢰는 거의 제거됐어. 더 깊숙이 묻혀있는 것은 레이더로무전기의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포효를 지르며 펄쩍 뛰어오른 로켓이 무너진 콘크리트를 디딘 바로 그때였다. 바닥이 흔들리더니 갑자기 밑에서 터진 폭발에 로켓의 몸이 공중으로 붕 던져졌다.

 

래빗!!!”

 

 

다급하게 부르짖는 소리와 함께 번쩍이는 천둥이 내리쳤다.

 

 

 

 

 

 

 

 

 

 

Posted by 모노님 :

 

 

 

* 지구에 정착하기 시작한 토르와 로켓의 소소한 뉴욕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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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Y More Than Ever

 

 

 

 

 

 

 

 

"뉴욕 지하철에선 컨테이너에 들어가지 않는 동물의 탑승은 제한하고 있습니다."

"래빗은 물지 않소."

 

 

푸근한 인상의 중년 여성에게 토르는 찡긋 윙크를 보냈다. 미드가르드인들은 그를 좋아했다. 대개가 그러하듯 그녀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뉴욕 교통국의 노련한 역무원을 설득하기엔 부족한 모양이었다. 오, 토르 당신의 윙크는 환상적이지만 그래도 안 돼요. 이게 뉴욕의 규칙이에요. 짐짓 단호한 태도에 토르는 난처한 표정으로 옆에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밖에서도 목줄이나 하네스를 착용해야 할 거예요. 그러자 잘생긴 미간을 찌푸리며 질색을 한다. 입마개 얘기까지 꺼냈으면 화를 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 이건 어때요? 친절한 역무원이 새내기 뉴요커에게 들고 있던 헝겊가방을 건넸다. 이틀 전 공원에서 열린 플리마켓에서 덤으로 받은 것이었다. 

 

 

 

 

"기분이 어떤가?"

"...멀미날 것 같아."

 

 

방금 전 역을 지나치면서 붐비던 지하철 안에 드디어 자리가 생겼다. 평소의 그라면 목적지까지 서서 갔겠지만 오늘은 의자에 앉아 헝겊가방이 흔들리지 않도록 청바지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피터 래빗이 그려진(토르와 로켓 둘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가방 안에는 로켓이 들어 있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하는 sns에선 펫과 이렇게 지하철을 타는 게 유행이래요. 역무원의 너스레에 로켓은 똥이라도 씹은 표정이었지만 그들의 첫 뉴욕 외출을 초장부터 망칠 수는 없었다. 본래는 업스테이트라는 곳에 있는 어벤져스 본부에 용건이 있었다. 하지만 볼일을 해결하고 나자 시간이 남았고 그때 토르가 권해온 것이다. 날씨도 좋은데, 함께 거리를 구경하러 가지 않겠나? 푹푹 한숨을 내쉬면서도 스스로 한발 한발 헝겊가방에 몸에 집어넣는 로켓에 토르는 껄껄 호탕하게 웃었다.  

 

 

이봐. 지금 손으로 받치고 있는 거기, 내 엉덩이야. 그의 무릎 위에 웅크리고 있는 자세가 영 탐탁치 않았지만 토르는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굼벵이를 타고 말지, 좁기는 존나 좁아 터졌구만. 토르는 다운타운까지 순식간에 날아갈 수 있었음에도 로켓과 지하철을 타고 싶어했다. 미드가르드인들은 다들 이걸 타고 이동한다고 하네. 나도 전에 한 번 타 본적이 있는데...비슷한 창 밖 풍경에는 금방 질려버렸지만 아스가디언이 느닷없이 지구에 막 떨어졌을 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지루하지 않았다. 

 

 

동료의 영향인지 로켓은 음악을 좋아했다. 밀라노에 있는 로켓의 작업실에선 늘 지구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토르는 스티브 로저스에게 미드가르드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장소를 물었고 맨해튼의 레코드샵을 추천받은 것이다. 낡은 건물 입구를 들어서면서부터 토르는 이곳이 스타크가 말하던 '구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노친네가 말하는 클래식은 중세시대같은 거잖아. 뉴욕 최고의 플레이보이를 내버려두고 캡시클에게 데이트 스팟을 묻다니ㅡ라며 후에 스타크가 혀를 차며 말했다) 하지만 로켓은 LP판과 카세트 테이프가 일색인 레코드샵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최근 퀼이 보여줬던 영화와 드라마에선 주인공이 엿 먹는 순간에는 꼭 같은 노래가 나왔다며 걸걸한 목소리로 통통 튀는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fuck you very very much. 토르도 금새 입에 익은 가요를 따라 불렀다.

 

 

해먹처럼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헝겊가방에도 익숙해졌는지 토르의 어깨에 매달려 가는 동안 로켓은 별다른 불평이 없었다. 스타벅스에서 그가 커피를 주문하는 동안(로마노프가 주문하는 방법을 미리 알려주었다) 가방 밖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로켓을 보고 점원이 손을 뻗었다가 물릴 뻔 했을 때를 빼곤 평화로웠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점원이 커피와 함께 강아지용 퍼푸치노를 내밀었을때, 한 입 맛본 로켓이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점원의 얼굴을 향해 휘핑크림을 집어 던졌을 때는 토르도 진땀을 빼야 했다. 그는 단 것을 싫어한다오. 콜드브루 커피 한 잔이 나왔을 때 겨우 로켓의 분노가 풀렸다.

 

 

시끄러운 인파가 질릴 무렵에는 강변에 있는 리버 사이드 파크로 향했다. 휴대폰이 없으니 네비게이션이나 검색따위 할 수 있을리 없었지만 이럴 때는 로켓의 예민한 후각이 도움이 되었다. 물냄새를 따라가자 곧 커다란 강이 나왔다. 강바람에 제법 기른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그들은 해질 무렵 지나가는 요트를 구경했다. 토르는 앞으로 이 풍경에 점점 익숙해질 터였다. 로켓도 헝겊가방에서 나와 그와 마찬가지로 벤치에 털썩 걸터앉았다. 뉴욕 구경 한 번 하기 더럽게 번거롭네. 내 가이드가 서툴렀나? 뭐...이동수단 만큼은 나쁘지 않았어. 이제는 이 곳이 나의 터전이 될 거라네.

 

 

"내가 이 곳과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발 붙이고 살면 다 똑같지." 

"다음 지구를 떠나는 때는 언제지?" 

"보름 후."

"이번에도 긴 여행이 되겠군."

"그러니까 완벽하게 적응하고 있으라고. 다음에 왔을 때는 아주 눌러앉고 싶어질 만큼."

 

 

우주에서 온 낯선 신이 이 별을 사랑하는 만큼 그를 사랑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가 이 별을 더욱 사랑할 수 있기를 로켓은 바라게 됐다.  

 

 

 

  

 

     

 

       

           

 

    

     

        

 

 

Posted by 모노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