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Night, Holy Night
연인들이 기다렸을 법한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아니었다.
붉은 칵테일 드레스를 차려 입은 이브닝 뉴스의 기상 캐스터는 아쉽다는 첫마디 인사를 뒤로 안개 낀 성탄절을 예고했다.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신정(New Year's Day)까지 열흘가량 이어지는 연말 휴가의 시작이었다. 시가지와 달리 인적이 사라진 주택가는 들뜬 분위기에 흥미를 잃은 노부부처럼 일찍이 잠에 들었다. 어린 소년 홀로 집을 지켜야 했던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가로등 불빛만이 텅 빈 거리를 따라 희미하게 늘어선 고요한 밤이다.
20대 후반의 프리랜서 카메라맨인 야마자키 소스케는 그 한적하기 그지없는 크리스마스가 퍽 싫지 않았다. 같은 잡지사 동료인 마츠오카 린의 초대에 응하지 않은 탓에 좀 전까지만 해도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진 휴대폰은 한동안 진동을 멈추지 않았으나 결국 그의 완고함에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 보낸 문자에는 30분 정도 지나자, 대신 31일 마지막 밤에는 꼭 여동생인 고우와 함께 미트파이를 들고 찾아오겠다며 답장이 왔다. 파티 같은 것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지만 그것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고우가 만든 미트파이를 떠올리며 소스케는 천천히 식어버린 커피 잔을 기울였다. 각설탕과 우유를 타지 않은 커피에 미간을 찌푸릴 나이는 아니다. 그럼에도 유독 입 안이 썼다. 문뜩 떠오른 그녀의 요리 솜씨 때문이 아니다. 포트에 물을 끓일 요량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으로 향하던 걸음이 멈춰 섰다. 그리곤 등 뒤의 패브릭 소파를 향하여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정확히는 소파 너머로 삐쭉 보이는 머리끝에 시선이 꽂혔다. 스포츠채널에서 재방송하는 미식축구 중계를 보다가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잠들려했던 소소한 이브 계획은 유감스럽게도 오래 전에 어긋나버린 것이다.
“<나 홀로 집에> 볼래?”
“…….”
“요즘 애들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몰라. 네가 보고 싶은 걸 말해.”
무뚝뚝한 말투 때문인지 응답하는 목소리가 없다.
[너는 가끔 무서워 보일 때가 있어.]
언젠가 린이 말한 적이 있었다. 때때로 같은 성인마저 다가가기 어렵다 토로하던 인상이었다. 소파에 앉아있는 상대는 하물며 어린애이다.
[눈에서 힘을 빼는 게 좋아.]
린의 가벼운 충고를 되새기며 멈춰 섰던 걸음을 되돌렸다.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튀어나온 머리끝이 움찔하는 것이 보인다. 한 발짝, 한 발짝 거실 바닥에 깔린 부드러운 러그를 밟는 소리에도 바짝 오그라드는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지경이다. 아이에겐 애석하게도 멀지 않은 거리가 단숨에 좁혀지고 곧 눈이 마주쳤다. 한결 누그러져 있을 자신의 표정을 의식하며 소스케가 아이가 기대고 있는 소파의 팔걸이에 한쪽 손을 얹었다.
“…널 무섭게 하려는 게 아니야.”
“…….”
어린애를 상대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맞은편의 기분을 살피고 단어를 고르는 일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앞으로 그가 말하는 한 마디에 당장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처럼 아이는, 소년은 떨고 있었다. 입안에서 몇 번이고 곱씹었다 내뱉는 것처럼 소스케는 가능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따뜻한 거라도 마실래?
“…….”
“코코아정돈 있으니까.”
“아저씨를…본 적이 있어요.”
하마터면 놓치고 지나쳤을지도 모를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우선 긴장을 풀기위해 특별히 더욱 달게 탄 코코아에 선물로 받았지만 찬장 구석에 애물단지로 박혀있는 마시멜로를 하나 띄워줄 셈이었다. 그러던 순간 꾹 닫힌 채 바들바들 떨기만 하던 마른 입술이 달싹여진 것이다.
“나도 너를 본 적이 있어.”
“마코토.”
소년의 이름은 마코토였다.
이렇게 마주한 채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아이의 얼굴과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이웃과 교류가 적은 위네트카 타운이지만, 마당에 놓인 바퀴가 작은 자전거나 파란색 롤러스케이트 따위로 옆집에 어린애가 살고 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한 달 전쯤인가 불우이웃돕기 성금마련을 위한 프리마켓 전단지를 들고 방문한 어떤 부인은 이웃집 부부가 입양했다는, 채 열 살이 되지 않은 동양인 사내아이에 대해 운을 떼더니 그렇게 한참을 수군거리며 현관 앞을 머물다 가기도 했었다. 소문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묘하게 상기된 질문에-소리가 들린다고 하잖아요, 혹시 이상한 점은 없던가요?-자신은 무어라 대답했던가.
평범하게, 순한 아이 같던데요.
드물게 있는 이른 퇴근길에선 수영 교습을 마친 모양인지 노란색 셔틀버스에서 내리는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햇볕에 밝은 갈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은 마르지 않고 끝이 물기에 젖어 있었다. 제 키의 절반만한 가방을 들고 뒤꿈치를 들어 올려 초인종을 누르던 녀석은 동양인치고도 또래보다 한 뼘은 더 작았다. 영화 속 소년과 마찬가지로 아직 작고 어린아이였다.
“마코토.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말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혹스런 머릿속을 재정비하며 어떻게든 대화의 끈을 놓지 않으려 부족한 말주변을 짜내려던 그때, 거실 한쪽의 텔레비전에선 어느 틈에 12시가 지났는지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화려한 영상과 함께 익숙한 멜로디의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빛을 내며 번쩍이는 브라운관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소스케가 중얼거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쓰.”
엉겁결에 내뱉은 소리에도 아이는 눈치를 보며 착실히 대답해주는 것이었다. 아직 자라지 않은 조그만 입이 우물거리는 영어발음이 어색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한가로운 생각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확실히 자신의 집 소파에 앉아있는 소년의 모습이 어색하기는 했다. 자정을 넘긴 늦은 시각. 어린 아이는 일찍이 잠들었어야 했고. 크리스마스 날 밤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이 세간에선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신고는, 안 하나요?”
짧은 정적을 깨운 것은 다시금 마코토의 목소리이다.
“아저씨는 봤잖아요, 내가 우리 아빠를….”
그 말을 잇는 내내 마코토가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지 평소 둔감하다 일컬어지던 소스케마저 가슴 한구석이 저릿한 것이었다. 마치 어린 시절 키웠던 자그마한 아기동물을 보는 것처럼. 경계심을 놓지 못하고 새하얀 털을 삐쭉삐쭉 세우며, 그럼에도 축 쳐진 눈매 끝에 눈물방울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나 때문에 아빠가….”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돼, 마코토.”
“하, 하지만 아빠가 죽었는걸요. 경찰에 신고해야죠.”
또르르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이 금세 작은 볼을 적셔버린다. 흐느끼는 아이는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보였다. 그 시절 안쓰럽게 울고 있는 아기동물을 어떻게 달랬는지 떠올리며 소스케는 혹여나 눈썹을 찌푸리지 않도록 애썼다.
“…모든 사람이 경찰에 신고하는 건 아니지.”
팔을 뻗어 동그란 어깨가 아프지 않도록 살짝 움켜쥔다. 놀란 모양인지 딸꾹질처럼 터져 나오는 짧은 호흡과 함께 기울어지는 상체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옛 기억 속에 그랬던 것처럼, 뒤로 둘러진 손으로는 터무니없을 만큼 작게 느껴지는 등을 천천히 쓸어내린다. 괜찮아, 괜찮아. 조금 더 등을 토닥여주자 소스케의 품속에 코를 박고 있는 동안 오르락내리락 힘겹게 들썩이던 어깨가 차차 수그러드는 것이 보였다. 맞닿은 가슴에 느껴지는 어린아이 특유의 뜨거운 체온에 이번엔 조금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괜찮아, 마코토.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어.”
연인들이 기다렸을 법한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아니었다.
붉은 칵테일 드레스를 차려 입은 이브닝 뉴스의 기상 캐스터는 아쉽다는 첫마디 인사를 뒤로 안개 낀 성탄절을 예고했다. 그런 밤이었다. 몇 겹에 걸쳐 자욱하게 깔린 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소리마저 앗아갔다. 밤의 어둠마저 빼앗겠다는 듯 물살처럼 퍼져나간 희뿌연 안개는 이윽고 마을 전체를 감싸 안았다. 파도 위를 떠다니는 부표처럼 아른거리는 주황색 불빛만이 그곳에 할로겐 등이 서있음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그야말로 고요한 밤,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겠다고 소스케는 생각했다.
아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고에 숨어들기 위해 맨발로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아이의 뒤에는 얼큰하게 취한 남자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따라붙고 있었는데, 목덜미를 낚아채기 위해 우악스럽게 뻗은 팔은 실상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는 꼴밖에 되지 못했기에 그 모습이 퍽 우스웠으리라.
지독하게 풍기는 싸구려 보드카 냄새와 제 몸도 스스로 가누지 못하는 남자에 불구하고 아이의 등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땀에 젖어 달라붙는 티셔츠가 움직이는 것을 방해했다. 당장이라도 갈고리처럼 파고든 손아귀가 어깨를 낚아채거나, 그대로 목을 졸라 올 것만 같아 맞부딪히는 이빨마저 딱딱 소리를 내며 떨었다. 멍이 든 허벅지를 타고 실금이 흘러내릴 때쯤 아이는 도망치는 것을 포기하고 안개를 헤치고 나올 남자를 향해 빌기 시작했다.
“잘못…했어요, 잘못 했어요. 잘못…!”
그 순간이었다. 억하고 불길하게 끊어진 거친 숨소리가 안개 너머에서 들려온 것이다. 이어서 무언가 둔탁한 것이 넘어지는 진동이 시멘트 바닥을 울렸다. 쌓아놓은 선반이나 쇠기둥 같은 것이 쓰러진 것일까? 휘감아오는 안개가 감각을 부식시키는 동안 공포마저 잊은 채 그 자리에 눈만 끔벅거리며 서 있는데 어디선가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냄새는 점점 더 진해지고 있었다. 아이는 아직 어렸지만 그것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선명한 색깔도, 끈적거리는 감촉까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기특하게도 아이는 그것이 ‘죽음’임을 알았다.
맥주를 사들고 돌아오던 소스케가 마코토를 그의 집으로 데려온 것은 잠시 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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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의 번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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