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브스의 첫 면을 장식하는 것은 오늘도 어김없이 굴지의 젊은 사업가에 대한 기사였다. 오찬 중으로 보이는 사진 속에선 멀대같은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서양인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동양인 특유의 찢어진 눈매가 취재진이 터트리는 강렬한 플래시에 윤곽을 잃을 법도 하건만 그는 영화 포스터 속 명암이 진 주인공의 얼굴처럼 단연 돋보이는 것이었다. 학창시절 때는 촉망받는 배구선수였다던데 못지않게 훤칠한 키와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어깨는 클래식한 분위기의 정장도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었다. 살짝 드러난 손목에 채워진 파텍 필립의 이지적인 실버 프레임 시계까지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 마냥 잘 어울렸다.
요 근래 포브스를 비롯한 경제관련 매체들은 숫제 남자의 매니저를 자청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으로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굳이 내용을 읽어보지 않아도 젊은 사업가의 뛰어난 비즈니스 수완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칭송하는 노숙자가 길거리서 파는 가십지만도 못한 기사일게 불 보듯 빤하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보려고 했던 잡지를 던져버리고 대신에 마켓을 들렸을 때 부록처럼 딸려온 US를 집어 들었다. 차라리 진짜 가십지를 보는 게 속이 덜 메스꺼울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헐리웃 스타들의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기대하며 첫 장을 넘긴 순간 오이카와는 풉 터져 나오는 헛기침과 함께 머금고 있던 커피를 입술 밖으로 흘려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어딜 가도 유망주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선 직성이 풀리지 않는 남자이다. 모델 출신인 금발 미녀와의 스캔들 기사보다 요트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사진에 더욱 시선이 가는 것이었다. 단정한 이마가 드러나게 올리었던 머리카락을 이스트 리버의 바람결에 아무렇게나 내버려둔 채 캐주얼한 폴로 티셔츠의 옷깃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밝은 색도 잘 어울리네. 식어버린 커피에 씁쓸해진 입안과 마찬가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Apple Is A
우시지마 와카토시와 처음으로 만난 것은 상담을 위해 서너 번 왕진을 갔었던 부동산업자의 자선파티에서였다. 차마 초대를 거부할 수 없어 오기는 했으나 면식이 있는 사람이라곤 없으니 구석에서 이따금 칵테일을 홀짝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간간히 젊은 여성들이 말을 걸어주어서 웃음을 지어보이던 그때, 건너편에서부터 걸음을 옮겨 먼저 다가온 것이 바로 우시지마였다. 정중히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으나 오이카와가 그에 대해서 알지 못할 리가 없었다. 구글에 당신 이름을 검색하면 오늘 점심에 어느 식당을 가서 어떤 와인을 시켰는지까지 나와요. 베버리 힐스에서 가장 큰 저택에서 살고 있는 남자. 현재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요주의 인물이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동양에서 온 굴지의 젊은 사업가.
그의 요청에 따라 시끄러운 파티 장을 벗어나 한적한 발코니에서 이야기랄 것도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우시지마는 칵테일이 아닌 맥주를 건넸다. 마침 혀끝에 남은 달짝지근함에 질려가고 있던 참이라 그의 권유가 마음에 들었고 목을 넘어가는 흑맥주의 거친 느낌마저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통성명뿐인 시간이었지만 다가서기 어렵다는 첫인상과 달리 우시지마 와카토시와의 만남이 싫지 않았고, 적당히 술기운이 올라 약간 빨라진 심장의 박동도 딱히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그렇게 기분 좋게 취한 것은 오래간만이었다. 그 때문일까. 갑자기 겹쳐온 우시지마의 입술을 밀어내지 못한 것은.
“지금 뭐하는 겁니까.”
“잠들어도 괜찮다.”
“졸린 건 제가 아니라 우시지마씨 같은데요.”
“…양을 세주지.”
“우시와카쨩 혹시 약이라도 했어?”
자지는 않았다. 침대까지는 가지 않았다. 당시에도 충격적이었고 지금 다시 떠올려보아도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만큼 충격적인 일이지만 오이카와는 그 날의 실수, 혹은 사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파티에서 돌아온 다음엔 업무가 몰아닥친 덕분에 되새길 겨를이 없었고, 우시지마도 별다른 연락을 취해오지 않았으니까. 한 달 가량이 지나고 그 날의 기억은 술에 취해 저지른 한여름 밤의 꿈 정도로 희미해져가던 무렵,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딱딱한 음성은 자신을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비서라 칭하며 오이카와를 우시지마의 개인 상담의사로 고용한다는 내용을 전했다. 사인은커녕 서류조차 읽어본 적이 없건만 자신은 알지 못하는 계약이 이미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말이 보고이지 내용상으론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고객은 받을 생각 말고 짐 싸서 들어오라는 소리이다. 베버리 힐스에서 가장 큰 그의 저택으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생겨서는 심리 상담이라니. 멘탈 케어가 아니라 아랫도리 케어가 맡기고 싶은 거겠지. 차라리 요행 좋게 하룻밤을 보내자고 했다면 의외로 승낙했을지 모르겠다. 그가 카드를 긁은 호텔의 최상층에서 가볍게 뒹굴고 난 뒤에 서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돌아선다면 차라리 그쪽이 마음이 편하다. 열 두 개의 스위트룸과 다섯 채의 게스트하우스, 워터슬라이드까지 딸린 수영장과 하루에도 여러 번 헬리콥터가 이‧착륙하는 최고급 호텔보다 호화스러운 저택이 오이카와에겐 낯설기만 하다. 무엇보다 부담스러운 것은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반응이었다. 대개의 사업가들이 그러하듯 우시지마의 증상은 간단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기위해 어쩔 수 없이 뒤따르는 약간의 수면 부족. 상담 주치의로서 의례상 삼일에 한번 씩 그의 상태를 체크하면서 나른한 오후에 무심결에 내뱉은 하품이 문제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단걸음에 다가와서 손목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침대 위로 오이카와를 밀어 넣는 것이었다. 엎어진 상태에서 위에서 내리 누르는 무게에 드디어 올 것이 왔나싶어 긴장하던 찰나, 덩달아 옆에 누운 우시지마가 팔을 뻗어 오이카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키가 180이 넘는 남자를 갓난아기마냥 품안에 그러안고 커다란 손바닥으로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는 꼴에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넋이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성인 남자 둘의 무게가 실려 푹신한 침대가 마시멜로우를 눌러놓은 것같이 움푹 들어갔고, 매일 같이 새것으로 갈아 끼우는 시트에선 잘 마른 햇빛의 냄새가 났다. 당황스러웠지만 이대로 내버려두었다간 정말로 우시지마가 양을 세어버릴 것 같아서 오이카와는 비스듬히 이를 악물며 일부러 날선 소리를 냈다. “양 따위 세지 마. 그건 Sheep과 Sleep의 철자가 비슷해서 생긴 말장난 같은 거니까.” “다른 자장가는 아는 것이 없는데.” “다른 것도 마찬가지야. 네가 하는 모든 게 장난 같다고.” “…네가 동물을 키우라고 조언했지.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될 거라면서.” “내가 말한 건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울컥한 오이카와가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어깨 감싼 팔은 단단히 옭아맨 밧줄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식하게 힘만 센 근육덩어리 같으니라고. 이내 버둥거리는 것도 질려버려 가만히 그를 노려보자니 우시지마는 어느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이쪽보다 잠이 부족한 것은 확실히 그인지라 옅은 그림자를 드리운 채 닫혀 진 눈꺼풀에 대고 짜증을 내기가 무색해졌다. 오이카와마저 숨을 죽이고 바짝 붙어있어 좁은 틈의 공기가 한층 잠잠해지자 억세게 움켜쥐고 있던 팔이 위로 올라와 오이카와의 뒷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 것이었다. 슬슬 빗질을 하는 손가락 사이로 길지 않은 머리카락이 감기었다 풀어질 때마다 삐쭉 소름이 돋으면서도 어쩐지 간지러웠다. “이젠 남자와도 스캔들이 나고 싶은가 보지.” “…기사를 봤나보군.”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우시지마는 마른 입술만을 달싹였다. 오수에 젖어들듯 살짝 잠겨있는 목소리가 맞닿은 살결 위로 전해져 온다. 위로 올려 빈틈없이 손질되어 있던 것이 부드러운 시트 위를 뒤척이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어 내렸다. 요트 위에서 이스트 리버의 바람을 맞던 그때처럼 한층 부드러워진 표정의 우시지마가 시선 가득 들어찬다. 낮은 숨소리가 하나로 겹쳐져 이제는 누구의 것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모든 것이 장난 같은 시간 속에서 겹쳐지는 입술만이 진짜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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