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브스의 첫 면을 장식하는 것은 오늘도 어김없이 굴지의 젊은 사업가에 대한 기사였다. 오찬 중으로 보이는 사진 속에선 멀대같은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서양인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동양인 특유의 찢어진 눈매가 취재진이 터트리는 강렬한 플래시에 윤곽을 잃을 법도 하건만 그는 영화 포스터 속 명암이 진 주인공의 얼굴처럼 단연 돋보이는 것이었다. 학창시절 때는 촉망받는 배구선수였다던데 못지않게 훤칠한 키와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어깨는 클래식한 분위기의 정장도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었다. 살짝 드러난 손목에 채워진 파텍 필립의 이지적인 실버 프레임 시계까지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 마냥 잘 어울렸다.

 

요 근래 포브스를 비롯한 경제관련 매체들은 숫제 남자의 매니저를 자청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으로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굳이 내용을 읽어보지 않아도 젊은 사업가의 뛰어난 비즈니스 수완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칭송하는 노숙자가 길거리서 파는 가십지만도 못한 기사일게 불 보듯 빤하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보려고 했던 잡지를 던져버리고 대신에 마켓을 들렸을 때 부록처럼 딸려온 US를 집어 들었다. 차라리 진짜 가십지를 보는 게 속이 덜 메스꺼울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헐리웃 스타들의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기대하며 첫 장을 넘긴 순간 오이카와는 풉 터져 나오는 헛기침과 함께 머금고 있던 커피를 입술 밖으로 흘려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어딜 가도 유망주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선 직성이 풀리지 않는 남자이다. 모델 출신인 금발 미녀와의 스캔들 기사보다 요트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사진에 더욱 시선이 가는 것이었다. 단정한 이마가 드러나게 올리었던 머리카락을 이스트 리버의 바람결에 아무렇게나 내버려둔 채 캐주얼한 폴로 티셔츠의 옷깃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밝은 색도 잘 어울리네. 식어버린 커피에 씁쓸해진 입안과 마찬가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Apple Is A

 

 

 

 

우시지마 와카토시와 처음으로 만난 것은 상담을 위해 서너 번 왕진을 갔었던 부동산업자의 자선파티에서였다. 차마 초대를 거부할 수 없어 오기는 했으나 면식이 있는 사람이라곤 없으니 구석에서 이따금 칵테일을 홀짝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간간히 젊은 여성들이 말을 걸어주어서 웃음을 지어보이던 그때, 건너편에서부터 걸음을 옮겨 먼저 다가온 것이 바로 우시지마였다. 정중히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으나 오이카와가 그에 대해서 알지 못할 리가 없었다. 구글에 당신 이름을 검색하면 오늘 점심에 어느 식당을 가서 어떤 와인을 시켰는지까지 나와요. 베버리 힐스에서 가장 큰 저택에서 살고 있는 남자. 현재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요주의 인물이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동양에서 온 굴지의 젊은 사업가.

 

그의 요청에 따라 시끄러운 파티 장을 벗어나 한적한 발코니에서 이야기랄 것도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우시지마는 칵테일이 아닌 맥주를 건넸다. 마침 혀끝에 남은 달짝지근함에 질려가고 있던 참이라 그의 권유가 마음에 들었고 목을 넘어가는 흑맥주의 거친 느낌마저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통성명뿐인 시간이었지만 다가서기 어렵다는 첫인상과 달리 우시지마 와카토시와의 만남이 싫지 않았고, 적당히 술기운이 올라 약간 빨라진 심장의 박동도 딱히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그렇게 기분 좋게 취한 것은 오래간만이었다. 그 때문일까. 갑자기 겹쳐온 우시지마의 입술을 밀어내지 못한 것은.

 

 

지금 뭐하는 겁니까.”

잠들어도 괜찮다.”

졸린 건 제가 아니라 우시지마씨 같은데요.”

양을 세주지.”

우시와카쨩 혹시 약이라도 했어?”

 

 

자지는 않았다. 침대까지는 가지 않았다. 당시에도 충격적이었고 지금 다시 떠올려보아도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만큼 충격적인 일이지만 오이카와는 그 날의 실수, 혹은 사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파티에서 돌아온 다음엔 업무가 몰아닥친 덕분에 되새길 겨를이 없었고, 우시지마도 별다른 연락을 취해오지 않았으니까. 한 달 가량이 지나고 그 날의 기억은 술에 취해 저지른 한여름 밤의 꿈 정도로 희미해져가던 무렵,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딱딱한 음성은 자신을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비서라 칭하며 오이카와를 우시지마의 개인 상담의사로 고용한다는 내용을 전했다. 사인은커녕 서류조차 읽어본 적이 없건만 자신은 알지 못하는 계약이 이미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말이 보고이지 내용상으론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고객은 받을 생각 말고 짐 싸서 들어오라는 소리이다. 베버리 힐스에서 가장 큰 그의 저택으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생겨서는 심리 상담이라니. 멘탈 케어가 아니라 아랫도리 케어가 맡기고 싶은 거겠지. 차라리 요행 좋게 하룻밤을 보내자고 했다면 의외로 승낙했을지 모르겠다. 그가 카드를 긁은 호텔의 최상층에서 가볍게 뒹굴고 난 뒤에 서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돌아선다면 차라리 그쪽이 마음이 편하다. 열 두 개의 스위트룸과 다섯 채의 게스트하우스, 워터슬라이드까지 딸린 수영장과 하루에도 여러 번 헬리콥터가 이착륙하는 최고급 호텔보다 호화스러운 저택이 오이카와에겐 낯설기만 하다. 무엇보다 부담스러운 것은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반응이었다.

 

대개의 사업가들이 그러하듯 우시지마의 증상은 간단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기위해 어쩔 수 없이 뒤따르는 약간의 수면 부족. 상담 주치의로서 의례상 삼일에 한번 씩 그의 상태를 체크하면서 나른한 오후에 무심결에 내뱉은 하품이 문제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단걸음에 다가와서 손목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침대 위로 오이카와를 밀어 넣는 것이었다. 엎어진 상태에서 위에서 내리 누르는 무게에 드디어 올 것이 왔나싶어 긴장하던 찰나, 덩달아 옆에 누운 우시지마가 팔을 뻗어 오이카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키가 180이 넘는 남자를 갓난아기마냥 품안에 그러안고 커다란 손바닥으로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는 꼴에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넋이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성인 남자 둘의 무게가 실려 푹신한 침대가 마시멜로우를 눌러놓은 것같이 움푹 들어갔고, 매일 같이 새것으로 갈아 끼우는 시트에선 잘 마른 햇빛의 냄새가 났다. 당황스러웠지만 이대로 내버려두었다간 정말로 우시지마가 양을 세어버릴 것 같아서 오이카와는 비스듬히 이를 악물며 일부러 날선 소리를 냈다.

 

 

양 따위 세지 마. 그건 SheepSleep의 철자가 비슷해서 생긴 말장난 같은 거니까.”

다른 자장가는 아는 것이 없는데.”

다른 것도 마찬가지야. 네가 하는 모든 게 장난 같다고.”

네가 동물을 키우라고 조언했지.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될 거라면서.”

내가 말한 건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울컥한 오이카와가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어깨 감싼 팔은 단단히 옭아맨 밧줄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식하게 힘만 센 근육덩어리 같으니라고. 이내 버둥거리는 것도 질려버려 가만히 그를 노려보자니 우시지마는 어느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이쪽보다 잠이 부족한 것은 확실히 그인지라 옅은 그림자를 드리운 채 닫혀 진 눈꺼풀에 대고 짜증을 내기가 무색해졌다. 오이카와마저 숨을 죽이고 바짝 붙어있어 좁은 틈의 공기가 한층 잠잠해지자 억세게 움켜쥐고 있던 팔이 위로 올라와 오이카와의 뒷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 것이었다. 슬슬 빗질을 하는 손가락 사이로 길지 않은 머리카락이 감기었다 풀어질 때마다 삐쭉 소름이 돋으면서도 어쩐지 간지러웠다.

 

 

이젠 남자와도 스캔들이 나고 싶은가 보지.”

기사를 봤나보군.”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우시지마는 마른 입술만을 달싹였다. 오수에 젖어들듯 살짝 잠겨있는 목소리가 맞닿은 살결 위로 전해져 온다. 위로 올려 빈틈없이 손질되어 있던 것이 부드러운 시트 위를 뒤척이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어 내렸다. 요트 위에서 이스트 리버의 바람을 맞던 그때처럼 한층 부드러워진 표정의 우시지마가 시선 가득 들어찬다. 낮은 숨소리가 하나로 겹쳐져 이제는 누구의 것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모든 것이 장난 같은 시간 속에서 겹쳐지는 입술만이 진짜처럼 느껴졌다.

 

 

 

 

 

 

 

Posted by 모노님 :

 

 

 

 

육 등 성 의 

 

[19세미만 구독불가 / A5 / 44p / 무광코팅 떡제본 / 5,000원]

 

 

 

우시오이(삼합회 조직원 우시지마 X 빈민가 도둑 오이카와) 구룡성채AU 19금 소설입니다.

5월 10일 케이크스퀘어 레드존 I-10 부스 '이 부스 모냐'에서 판매됩니다. 

샘플에 약간의 성적인 묘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부탁드립니다.

 

 

 

 

 

<<sample>>

 

 

 

 

 

 

그의 하늘을 보았던 첫 번째 순간을 떠올린다.

 

사람에겐 제 몫의 하늘이 있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이나 뽑히고 날선 손톱이 할퀴고 간 자리에 붉은 생채기가 쓰라렸지만 악다구니 치던 것을 멈추고 별안간 내뱉은 소리였기에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버려진 정부(情婦)이자 이제는 개미굴의 창부(娼婦)로 연명하는 그녀의 삶을 비관하는 자조 섞인 넋두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오이카와는 어머니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그녀가 하나뿐인 침상 위로 쓰러지는 것을 구석에서 곁눈질로 확인하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내쉰 소년은 틈바구니에 피어난 곰팡이처럼 불법으로 증축된 판잣집을 빠져나와 비좁은 골목을 따라 달렸다. 후다닥 멀어지는 도둑고양이의 귀를 찢는 울음소리. 부서진 포석 틈새로 흘러내리는 장마의 흔적. 무너진 토사와 빗물과 먼지와 온갖 나쁜 것들이 한데 고여 썩어가는 냄새. 풀이 자라지 않는 움푹한 공터에, 가장 낮은 밑바닥에 도착하자 그곳에 제 몫의 하늘이 있었다.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탑처럼 덕지덕지 발라진 시멘트와 볼썽사납게 튀어나온 철근의 벽을 따라서 올라가면 마찬가지로 대충 엎어놓은 것 같은 하늘이 사방을 둘러싼 성채 안에 꼼짝없이 갇혀있었다. 마치 산산조각 난 유리거울의 파편들처럼 당장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 같은 하늘의 모습에 뒷걸음질 치던 것도 잠시 오이카와는 그것이 갈라진 금이 아니라 무수히 엉켜있는 전기배선의 거미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좀 더 뒤로 젖히자 이번엔 전선줄 너머로 흩뿌려진 별 부스러기가 희미하게 보였다. 아편중독으로 이와 손가락 끝이 검게 물든 우산장수는 그것을 육등성이라 하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대나무살을 깎으며 뭇별들을 노인은 대수롭지 않게 불렀다. 빛이라 부르기에도 어색한 마지막 여섯째의 별. 성채의 밤하늘에는 언제나 육등성의 별이 뜬다. 거리를 구성하는 대개가 그러했다. 보이지 않는 별의 수만큼이나 수많은 것들이 이름이 없었고, 볼품없이 초라했으며, 아무렇지 않게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가엾은 소년은 주저앉고 말았을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다른 이가 나타나기 전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 악몽에 시달리는 어머니의 곁에서 작은 등을 구부린 채 잠들었을 뿐. 어떠한 실망과 절망도 없이 어린 시절의 오이카와는 그의 하늘을 받아들인 것이다. 어쩌면 체념을 뒤로 그녀가 남긴 상처를 어루만지던 손길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매달린다 해서 이제와 새삼 소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라 오이카와는 모르는 채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거리의 여느 것들과 다름없이 손바닥으로 전부 가려지는 하늘의 크기도, 흐린 별도 그저 그렇게 두었다.

 

후우, 내쉬는 숨을 따라 새하얀 입김이 피어난다.

 

그날 밤과 마찬가지로 오이카와는 성채의 심연 속을 걸어왔다. 소년이 자라나 굳은살처럼 다져진 청년이 되고 그로부터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주변의 풍경은 예전 그대로였다. 벽의 밖에선 개 두 마리를 태우고 우주로 발사 된 로켓이 하루 만에 무사히 귀환하고 녀석들이 새끼까지 낳았다지만 이곳의 시간은 멈춰버린 모래시계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우후죽순 늘어난 공장의 굴뚝들이 하루 종일 매연을 토해내는 탓에 별은커녕 맑은 날에도 하늘을 보는 것이 어렵다. 녹이 슨 닭장처럼 빽빽하게 들어찬 건물의 숲. 신원이 묘연한 난민들의 피난처. 홍콩에서 가장 유명한 성매매업소, 가장 성황 한다는 도박장, 가장 많은 아편을 거래한다는 개미굴까지 위법되는 모든 최악의 것들이 이 땅에 뿌리박혀 있다. 시멘트로 발라진 성채. 시체를 먹는다며 거리를 떠도는 귀신의 괴담과 그보다 소름끼치는 버러지들이 들끓는 마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신이 버린 구룡성.

 

낮에 가판대 앞을 지나치면서 점퍼 주머니 안에 슬쩍 구겨 넣었던 담배가 생각났지만 오이카와는 이내 부스럭거리던 손을 멈추었다. 홀로 타들어가는 담뱃불을 향해 어디선가 묵직한 둔기나 총알이 날아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처마 아래 홍등조차 깊이 잠든 고요한 거리.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진한 어둠속에 기척을 숨긴 채 무언가가 벌어지고도 남을 시각. 그는 일부러 일이 벌어지고 난 뒤를 골랐다.

 

어떠한 제재와 혁명으로도 이곳이 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진이나 태풍을 감지하는 예민한 촉각처럼 오이카와는 성채가 그의 주인을 바꾸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언제부턴가 바람의 냄새가 달라진 것이다. 잔상과 함께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하는 풍경들. 멈춰있던 거리가 격동하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불안감과 동시에 빠르게 요동치는 심장을 억누르며 오이카와는 마침내 심야의 목적지에 발을 디뎠다.

 

몇 걸음 만에 낡은 운동화의 앞이 축축하게 젖어든다. 잠시 멈칫했으나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냄새에 자신이 핏물이 고인 웅덩이를 밟고 있음을 알았다. 매립지에 던져놓은 포대자루처럼 창고에 널려있던 것들은 팔과 다리가 달려있는, 혹은 그중에 일부가 베어져 나간 사람들이었다. 바닥에는 군용 잭나이프나 휘어진 쇠파이프 같은 것들도 간간히 눈에 띈다. 쇠붙이와 함께 쓰레기처럼 버려진 사람들. 쾌쾌한 오물의 냄새마저 풍기기 시작하는 살풍경 속에서 살아있는 사람은 그뿐이다. 그것으로 안심이 되었다.

 

이곳이 마굴이라면 마굴에서 태어난 자신은 귀신이 맞았다. 오이카와는 개의치 않고 시체더미를 손으로 하나하나 헤집어 나갔다. 성채의 괴담처럼 시체를 먹는 것은 아니고 그저 흔히 널려있는 좀도둑이다. 망자의 주머니를 뒤진다는 점에서 마땅히 천벌을 받아야겠지만 널려있는 시체를 거두어 묘비를 세워줄 이는 아무도 없다.

 

싸구려 양복을 입고 죽은 놈의 주머니 안에는 싸구려 가스라이터나 꼬깃꼬깃 접힌 지폐가 들어있었고, 비싼 양복을 차려입고 죽은 놈의 주머니 안에는 두둑하게 채워진 지갑이나 때로는 손가락마다 금으로 된 반지가 끼어져 있기도 했다. 조직 내 숙청의 밤이 끝나고 스멀스멀 밀려오는 새벽의 경계까지는 오이카와의 시간이었다. 이렇게 한탕을 치고 나면 적어도 몇 달은 여유 있게 살아가는 것이다 여유라 해봤자 배를 곪지 않고 술이나 담배, 이따금 불량품이 섞인 아편을 조금 살 수 있는 정도이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돈이 될 만한 물건을 부피가 작은 것들로 골라 챙기다 마지막으로 제법 말쑥한 얼굴을 하고 죽은 놈의 곁에 무릎을 숙였다. 복부에 칼을 깊게 찔렸는지 셔츠가 축축할 정도로 젖어있다. 피가 엉겨 붙어 끈적거리는 손가락에 혀끝을 차며 옷자락을 뒤적이자 이내 낯선 것이 손에 잡혔다. 매끄럽게 세공된 사금파리는 여자의 머리카락에 꽂는 비녀모양의 장신구였다. 조직의 녀석에게 제대로 된 부인이 있을 리 만무하니 아마도 즐겨 찾는 개미굴의 창녀에게 선물하려던 것일 게다. 우스운 일이었다. 놈은 제가 살아서 그녀에게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죽고자 했던 이는 아무도 없다. 푸줏간에서 고기를 도륙할 때 쓰는 시퍼런 칼을 들고 싸움에 나서면서도 설마 자신이 죽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때문에 평소와 다름없이 옷 주머니에 그가 쓰는 물건을 간직하고 다음 날의 약속을 잡는 것이다.

 

어느덧 창고의 깨진 유리창 너머에서 성큼 스며든 푸른 여명이 오이카와를 재촉하고 있었다.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얼마나 값을 불러줄지 모르겠다만 점퍼 안에 장신구를 대충 갈무리해 넣고 창고를 빠져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그의 바래 진 운동화 위로 난데없이 툭하고 가벼운 무게가 떨어졌다.

 

흠칫 놀란 고개를 숙이니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던 토막 같은 손가락 하나가 운동화 위에 걸쳐져 있었다. 곧이어 악몽의 한 장면처럼 식어있던 살덩이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기괴한 모습에 삐쭉 소름이 돋는다. 어쩌다 바람에 미끄러져 내린 거라 생각했건만 마치 뭍으로 건져진 아가미가 들썩거리는 것처럼 선혈을 뒤집어쓴 흉부가 미세하게 부풀며 오르내리고 있었다. ()을 갈구하는 놈의 처절하기 짝이 없는 마지막 발악. 부패직전의 고약한 숨이 토해지는 것을 상상하자 갑자기 구역질이 치밀었다.

 

오이카와는 정말로 죽음을 각오한 자를 안다. 정말로 죽어버린 자의 최후를 보았다. 수년 전 어머니는 성채의 담벼락 위에서 뛰어내렸다. 가는 몸이 바닥에 충돌하여 부서지는 소리가 꼭 벼락소리처럼 컸다. 살점과 뼈가 튀고 온몸이 으그러진 그녀의 옷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입 안 가득 올라오는 신맛을 억지로 삼켜내며 운동화 위에 느껴지는 무게를 뿌리치듯 걷어찬 뒤 그는 밖을 향해 달려 나가려했다.

 

거기 서, 오이카와.”

 

그럴 셈이었다. 들려오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이름을 부르지만 않았더라면 그대로 등을 돌린 채 미로와 같은 개미굴 속으로 몸을 감추었을 테다. 경계를 늦추지도 않았건만 여태껏 자신외의 기척일랑 전혀 느끼지 못했다. 혹시 귀신이라도 나타난 것일까.

 

핏기가 사라진 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어느새 멀지 않은 만치까지 다가온 검은 형체가 보였다. 귀신이 아니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바닥을 딛고 있는 모습은 도리어 시체더미 한 가운데 꽂힌 거대한 십자가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쯤에서 그만 의미 없는 탐색전을 끝내야 했다. 하지만 날카로운 갈퀴에 끌려가는 모양새 마냥 바르르 떨고 있는 턱이 저도 모르게 앞을 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납빛의 얼굴과 마주친 순간 머릿속에는 어서 도망쳐야한다는 공포만이 가득해졌다. 엉겁결에 물러선 반보 다음으로 오이카와의 어깨가 오른쪽으로 비틀리던 그때였다.

 

터져 나온 폭음이 귀를 찢는다. 펑하고 불꽃이 격발하는 귀에 익숙한 소리.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번쩍하는 통증을 마주한 뒤에서야 오이카와는 그가 총에 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맨살을 불로 지지는 뜨거운 고통에 단말마와 같은 비명이 터져 나올 무렵에는 이미 피가 솟구치는 허벅지와 함께 무너져 내린 다리가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경련하는 몸이 뻣뻣한 막대기마냥 풀썩 고꾸라지자 쌓여있던 먼지가 눈가루처럼 희게 피어올랐다.

 

여전히 무엇 하나 이해되지 않는다.

 

점차 아득해지는 시야 속에서 오이카와는 남자의 손에 들려있던 시커먼 총을 보았다. 그것을 쏜 납빛의 얼굴을 보았다. 무거운 주머니가 기울어지면서 쏟아져 나온 금붙이들이 바닥 위를 구르는 요란한 소리도 들려왔다. 그의 점퍼 안은 훔친 물건으로 가득했다. 이 곳에서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새삼 죽음이 낯선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뒤를 따라오는 그림자처럼 유년시절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죽음이란 존재는 언제나 오이카와와 함께 머물러왔다. 다만 죽음 뒤의 세상에 대해서는 떠올려 본적이 없었다.

 

성채의 안에도 믿음은 있다. 언젠가 열십자의 십자가 아래서 모서리가 너덜해진 성경책을 돌려 읽으며 한숨과 같은 기도를 읊는 자들을 본 적이 있다. 수확만을 바라보면서 밭을 일구는 건 바라지 않는다. 누군가 휘갈겨놓은 담벼락의 낙서처럼 그들이 올리는 기도에 거창한 것은 없었다. 성경에 적혀있는 이상적인 천국은 바라지 않는다. 그저 잠깐의 버팀목이 필요했을 뿐이다. 죽음 뒤의 세상은 아무래도 좋을 것들이어서 구제나 구원이란 단어는 오이카와에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했다. 지옥은 이미 곁에 있었고 천국은 그에게서 너무나 멀다.

 

그래서 눈을 뜰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죽음 다음의 세상이 있다는 사실에 첫 번째로 놀랐고, 깊은 수면 아래서 건져 올리듯 차차 돌아오는 감각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곳은 과연 천국일까 지옥일까. 끼익 거리는 소음이 날것만 같은 눈꺼풀을 위 아래로 천천히 움직이면서 초점을 맞춘다. 희미하던 시야가 점차 선명해지고 마지막으로 속눈썹을 깜빡거리는 그 순간 명치를 가격당한 듯 컥하고 숨이 막혀왔다.

 

이제 깨어났나 보군.”

 

성에가 낀 쇠붙이에 맨살이 닿은 것처럼 오싹한 소름이 전신에 끼쳐온다.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움찔거리며 상체를 일으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탁한 조명 아래 오이카와를 내려다보는 얼굴은 어슴푸레한 새벽 속에서 총을 겨누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싸늘한 납빛이다. 피를 얼게 만들던 공포의 현신이자 혈관을 들뜨게 만들던 분노의 대상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반사적으로 부릅뜬 눈매가 사나워졌지만 아직 물기가 빠지지 않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때문에 뻗어오는 손길을 피하는 것 또한 무리였다.

 

아흑!”

상처가 벌어지면 출혈이 심해집니다, 우시지마씨.”

 

곁에 있는 것은 한사람만이 아니다. 들이마신 호흡과 함께 알싸한 소독약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송곳이 파고들 듯 고통으로 변해버린 끔찍한 감각에 오이카와의 안색이 경악으로 물들자 뒤쪽에서 시큰둥한 염려가 건네졌지만 우시지마라 불린 남자는 허벅지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는 것이었다.

 

버둥거리지 마라.”

 

엄한 목소리가 살벌한 경고처럼 내린다. 처음부터 허벅지를 노린 채 당겼던 방아쇠처럼 커다란 손은 정확히 총상이 난 부위를 움켜잡았다. 얼룩져있는 바지 위로 다시금 짙은 핏자국이 번져간다. 결박하듯 위에서 내리누르는 탓에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빈힝은 마주친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마저도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무자비하게 버텨선 남자의 뒤로 묵묵히 젖은 수건과 수술용 집게 등을 준비하는 중년의 꼽추는 아마도 의사인 모양으로, 구지 누추한 행색이 아니더라도 무면허의 돌팔이의사임이 뻔했다.

 

낯선 공간 속에서 분위기를 살피는 동안 손아귀의 악력도 전보다 느슨해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방심할 새도 없이 이번엔 우시지마가 발버둥을 멈춘 오이카와의 바지를 밑으로 끌어내렸다. 어린아이를 다루는 마냥 거적이 된 바지가 속옷 채 쑥 벗겨져 나가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 다리에 금세 차가운 공기가 달라붙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처가 벌어져 흰 살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총탄을.”

 

하체가 발가벗겨진 충격에 오이카와는 뒤늦게 우시지마가 가리키는 것이 허벅지에 박혀 들어간 총탄이라는 것을 알았다. 익숙한 상황이라는 듯 다가온 돌팔이꼽추가 소독약이 든 통에 한번 휘저었다 꺼낸 손가락 길이만 한 칼을 맨살 위에 들이대는 것이었다. 도마 위에 올려 진 고깃덩이를 가늠하듯 드리워지는 그림자가 섬뜩하기 짝이 없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살갗을 저미는 칼끝에 수척한 얼굴이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본능적으로 물기가 고이는 부어오른 눈가와 고통의 크기만큼 벌어진 입이 벙어리마냥 뻐금거린다. 어깨를 움츠리는 탓에 차마 삼키지 못한 타액이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이 정도도 버티지 못한다면 곤란하다.”

, 젠장...!”

저 밖에는 널 죽이려 벼르고 있는 놈들이 가득하니까.”

 

상처를 절개하고 서슬 퍼런 수술용 집게가 살을 파고드는 것과 비슷하게 움츠려 수그러드는 어깨를 끌어당긴 우시지마가 대뜸 오이카와 입안으로 두꺼운 혀를 집어넣었다. 도무지 치료 중인 상황이라고 볼 수 없는 우시지마의 돌발행동에도 돌팔이꼽추는 잠자코 제게 주어진 일만을 할 뿐이었다. 입술이 부딪히고 집게 끝처럼 날카롭게 파고든 혀가 막무가내로 치열을 긁어내린다. 호흡과 타액이 뒤섞이는 선정적인 풍경과 달리 입안 여기저기를 마구 쑤시고 헤집어대는 혀에 상체까지 흔들리는 터라 바닥을 짚고 버티는 팔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남자에게 굴욕을 당하고, 누군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수치스럽기에 충분했지만 생살을 찢는 통증과 몰아치는 기묘한 느낌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고 있었다.

 

으흣. , 그만. 흐읍!”

 

넋이 나간 오이카와를 비롯해 말리는 이가 없자 우시지마는 아예 노골적으로 티셔츠 위로 손을 얹어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엇갈리던 입술이 포개어지더니 붙었다 떨어졌다하기를 반복하면서 야릇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랫입술이 퉁퉁 부어오를 때까지 빨더니 그것도 모자라 이를 세워 무는 터라 자국이 그대로 남는 것이었다. 전의를 상실한 듯 무방비하게 늘어진 오이카와의 혀를 감싸고 우시자마가 부드럽게 뿌리를 잡아당겼다. 여린 안쪽을 스치듯 핥을 때면 위태롭게 버티고 있던 허리가 움찔거리기까지 했다. 폭력에 그치지 않던 행위에 농도가 짙어지기 시작하면서 잠들어있던 전율마저 일깨우고 있었다. 그러자 점점 무엇이 고통인지 구별이 가지 않게 되었다. 온몸의 살이 눅진하게 녹아내리고 뜨거운 열이 한곳에 고인다. 그 무렵 집도를 마친 돌팔이꼽추가 오이카와에게서 떨어져나갔다.

 

총탄이 접시위로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게슴츠레한 시야를 흘기자 어느새 허벅지 위에 새하얀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한눈파는 것을 꾸짖듯 우시지마가 그의 혀를 깨물었다. 발가벗겨진 다리 사이에서 끝이 젖은 성기가 발기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달아오르는 흥분 속에서 오이카와는 차라리 정신을 잃는 것을 택했다.

 

 

 

 

 

 

 

 

 

부스 위치는 레드존 I-10 이 부스 모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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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위 조금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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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적으로 눈이 떠진 그 무렵 창 밖은 아직 어슴푸레한 새벽이었다. 자꾸만 감기려 드는 눈꺼풀에 머리를 박고 있던 베개에서 돌아누워 천장의 무늬를 세면서 졸음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데 그제야 오늘이 메이데이 노동절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쿠오로씨 노동자였지. 그럼 오늘은 회사 안 가도 되는 거지요? 일상의 습관대로 새벽 6시에 칼같이 눈이 떠졌는데 이거야 원 손해 본 기분이다. 늙으면 아침 잠이 사라진다던데 알람도 없이 일어나다니 쿠로오씨 아저씨 다 됐구나. 쯧쯧 혀를 차면서 다시 수면에 빠져들 셈으로 몸을 뒤집는데 곁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맞다, 어제 왔었지. 별안간 집으로 오겠다는 메일을 보고 회식 도중에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던 것이 기억났다.       

 

 

 

 

: 쿠로켄

May-day

 

 

 

 

총무과 하네다씨의 새로 생긴 여자친구 때문에 어젯밤 회식자리는 먹잇감을 발견한 아저씨들의 오지랖으로 시작되었다. 스무 살 여대생 여자친구와의 스티커 사진을 들켜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머리에는 미키마우스 머리띠까지 쓰고. 하네다씨 청춘이구나, 서른 살에 청춘. 아마도 어리고 귀여운 여자친구의 부탁에 마지못해 붙여놓았던 것을 부주의하게 떨어트린 모양이지만 업무에 지친 회사원들에겐 좋은 술안주가 되었다. 절반이 부러움이 섞인 장난이었지만 간간히 도둑놈이라는 둥, 어디까지 진도가 나갔느냐며 어린 여자애를 만족시켜주려면 약이라도 먹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둥 짓궂고 질 낮은 농담이 오가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저 손을 내저으며 식은땀만 뻘뻘 흘리던 하네다씨는 벌주마냥 사람들이 건네는 술을 족족들이 받아 마셔야 했고 결국엔 가장 먼저 낙오되었다. 이야기 거리가 떨어지자 더 이상의 화제도 되지 못한 채 하네다씨는 말린 생선 안주처럼 갈기갈기 찢겨져 택시에 실렸고 무관심 속에 사라졌다. 또 다른 스캔들을 찾아 흘러가던 너절한 술자리 가운데 휴대폰의 진동이 울린 것이다. 지금 쿠로네 집 갈 거야.      

 

하나 둘 감각이 돌아오는 탓에 코끝에는 달달한 냄새가 풍겨져 왔다. 자신은 그다지 즐기지 않은 것으로 평소라면 제 집에선 날리가 없는 냄새였다. 흘깃 시선을 돌리니 야금야금 먹다 남긴 파이 조각이 눈에 띈다. 메일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는 수제파이가게에 들렸다. 반쯤 술에 취해 몽롱한 정신과 문이 열리자 마자 느껴지는 진득하리만큼 달달한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언젠가 드물게 좋아하는 기색을 보였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하나하나 낱개로 포장되는 고급 애플파이가 가지런히 상자에 담기고 쿠로오씨는 그게 또 부서질까봐 지하철을 타고 들어오는 내내 품에 끌어 안고 왔더랜다. 그리고 오피스텔의 문이 열렸을 때 주인 없는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근처 네코마 교고의 교복을 입고 있는 작은 아이-고등학생으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앳된 얼굴의 켄마였다.

 

고개를 돌아보니 켄마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헐벗은 어깨나 사라지지 않은 열과 채취는 누가봐도 눈치챌 법한 정사 이후의 현장이었다. 이렇게 작은 아이를 안았다. 섹스파트너? 원조교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무시무시한 단어들 뿐이라 쿠로오는 생각하는 것을 관두었다. 확실한 것은 애인은 아니다. 여대생 여자친구가 욕을 먹는 판에 고등학생이라니, 그것만 중학교를 졸업한 햇병아리 신입생 남자아이. 네네, 쓰레기입죠. 도둑놈보다도 나쁜 쓰레기입니다. 쿠로오씨도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남들이 안다면 손가락질 하겠지만 못내 억울한 마음도 드는 것이다. 어느 순간 이렇게 되어버렸는 걸. 언제부터 몸을 섞기 시작한 것인지는 기억나지도 않는다.

 

운동을 한다고 들었는데 그런데도 손이 작았다. 차차 단단한 살이 박혀 간다지만 여전히 어린애처럼 부드럽다. 그리고 그 희고 작은 손으로 꼿꼿하게 일어선 제 것을 붙잡고켄마는 점점 솜씨가 좋아지고 있었다. 기둥을 제대로 힘주어 쓸어 올리는 법도 배우게 되었고 이젠 제법 능숙하게 둥그런 윗부분을 핥아내기도 한다. 물론 입으로 하는 건 아직 서투르지만. 다 입이 작아서 그렇다. 아무리 턱을 벌려도 새부리마냥 조그만 해서 제 것의 반도 입에 담지 못한다. 매번 잊어버리는 모양인지 예민한 살갗에 이가 닿곤 해서 통증에 움찔거리면 그제야 제가 더 불안한 눈초리로 새초롬하게 숨겨두었던 혀를 빼는 것이다. 과거 켄마와 비슷하던, 그보다 체구가 작았던 여자들도 뿌리까지 삼켜내었건만 아직은 어려운 모양으로-억지로 강요할 생각은 없다-어설픈 애무이지만 지금의 상태도 충분히 만족스럽기 때문에 괜찮다. 꼬물거리는 작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것을 감싸 쥐고 붉어진 끝을 사탕을 빨아 먹는 마냥 핥짝거리는 모습을 내려다보는데 흥분이 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아아, 쿠로오씨 정말 최악이네요. 고등학생을 상대로 그런 몰염치한 짓을, 낯부끄러운 상상을 떠올리고 새벽부터 발기하다니. 생리현상이라 부인하기엔 잠들어 있는 소년의 새하얀 목 언저리가 온통 물고 빨고 씹어놓은 흔적 투성이라 쿠로오는 밀려오는 양심의 가책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으음, 쿠로…."

"미안 깼어? 좀 더 자도 돼."

"어디가…."

"잠깐 화장실 좀."

"섰어?"       

 

요즘 젊은 애들은 원래 이렇게 말하는 게 거침없는 건가. 쿠로오씨 정말 아저씨가 되버리기 라도 한 거냐.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정리할 생각도 없이 헐벗은 상체 그대로 켄마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어깨가 참 작다. 여자애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작다. 저에게 비교하자면 터무니없을 만큼 여리다. 침대 아래엔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교복셔츠가 술 냄새가 배어있는 정장 자켓과 함께 섞여 있다. 서른 살 남자 혼자 사는 집안에는 달달한 애플파이냄새가, 켄마의 냄새가 진동을 한다. 새끼고양이처럼 아몬드모양 가로 벌어져 덤덤한 눈이 마주친다.

 

"이따가 학교 가야지. 난 노동절이라 회사 쉬니까…."

"나도 학교 쉴래."

"웃기지 마라. 꼬맹이주제."

"그럼 가지마."

"뭐?"

"쿠로, 섰잖아."

 

어리다는 건 역시 무섭다. 자신은 서른 살인데. 너는 왜 열일곱 살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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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게임이랑 비슷해서

 

[ 만두가 정말 맛있는 가게가 있어! ]

 

선택지에 따라서 퀘스트를 달성하는가 하면 실패하기도 하는 것이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세이브버튼을 누르겠지만 휴대폰 너머의 상대는 버튼을 누를 시간조차 기다려주지 않았다. 켄마도 분명 좋아할 거라 생각해. 세이브. 세이브. 습관적으로 세이브 버튼을 찾다가 하마터면 메일의 삭제버튼을 누르려 했단 것을 깨닫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을 줘.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도 되는지, 솔직하게 털어놔도 괜찮은 건지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을. 꼴사납지 않은 말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내게 줘. 그러나 바램과 달리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잠에 든다는 히나타의 메일이 휴대폰 화면을 비추었다. 완전한 타임오버. 이건 게임이랑 비슷하지만, 게임이랑은 완전히 달라서 도중에 멈추는 것도 되돌리는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쩔쩔매는 것밖에 하지못한 자신에 한숨을 내쉴 기분도 나지 않아서 손가락 끝을 몇번 두드린 뒤 화면에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잘 자. 손 안에 쥐고 있는 휴대폰의 달아오른 열이 차게 식어내릴 때까지 다른 말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가끔은

쇼요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

 

 

 

: 켄히나

두근두근 메모리얼

 

           

 

예상대로 합숙훈련이라고 해서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더 늘어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공간에서 가장 오랜 시간 머무르는 때는 학교 대 학교로 시합 중인 코트 안쪽뿐이라-이상하게 카라스노와의 시합 중에는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아서-단 둘이 마주치게 된 것은 합숙에 들어간 지 삼일 째가 된 지금이 처음이다. 수돗가에 들렸다 오는 길에 나무 그늘 아래에서 그만 잠들어 버렸는지 히나타는 머리카락 끝과 티셔츠가 물에 젖어있는 상태였다. 일렁거리는 포플러 가지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셨는지 들어 올린 한쪽 팔로 얼굴을 가린 채 누워있다. 때문에 히나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풀벌레 울음 사이로 귀를 기울이자 새액새액 고른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게 나쁜 꿈을 꾸는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지만 여름 날 밖에서 잠드는 건 위험하니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다만 히나타를 무슨 말로 깨워야 하는지가 고민되던 찰나였다. 자연스럽게 벌어져 숨을 내쉬던 작은 입이 먼저 달싹여졌다.

 

"켄마지?"

"…."

"켄마야. 확실해."

 

 

언제 깨어난 것인지 아직 팔을 내리지도 않았건만 켄마의 얼굴을 본 것 마냥 히나타는 입매를 올려 웃는 것이었다. 솔솔 바람이 불면서 포플러 잎사귀의 그림자가 흰 티셔츠 위에 나부낀다. 불소를 섞은 물 냄새와 말라가는 땀 냄새 그리고 풀과 바람이 섞인 싱그러운 냄새가 났다. 원래 여름은 질색이었는데.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버려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지금 이순간만 그런 것이다. 어째서 그런 것인지 이유는 아픈 이가 저릿하듯 잘 알고 있다. 역시 쇼요를 만나는 것은 괴로워서. 뙤약볕 아래 시야가 휘청거리는 것처럼 어지러워져서, 숨이 턱턱 막히는 것처럼 가슴이 아프다.    

 

"어떻게 알았어…."

"켄마는 고양이같아서 발자국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데."

"…."

"옆으로 오면 냄새가 나. 켄마 냄새가.

그럼 딱 알 수 있어."

 

그제야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히나타가 고개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부드럽게 마른 머리카락이 동그랗게 드러난 이마 위에서 살랑거린다. 눈동자가 가늘어지게끔 싱긋 휘어진 눈매가 아이처럼 천연하다. 그러자 또다시 익숙한 고통에 가슴이 뻐근해져오는 것이다. 전부 다 네 탓이라고 돌려버리고 싶을 만큼, 원망하고 무심코 떼를 쓰고 싶어질 만큼 쇼요의 앞에 서면 늘 그래왔던 것처럼 호흡이, 심장의 박동이 빨라진다. 혹시나 소리가 새어나갈까 두려워질 정도로 두근거려서 견딜 수 없게 되어버린다. 참을 수 없는 마음이 흘러넘친다.

 

쇼요

난 네가 언제나 보고 싶어ㅡ

     

 

 

 

 

 

 

 

Posted by 모노님 :

 

 

운전하는 우시지마가 보고시펏습니다...오늘도 선명히 우시지마를 핥았ㄸ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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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오이] highway 15

 



운전습관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고 한다. 운전대를 잡으면 상냥하던 얼굴은 간데없이 욕설을 퍼부으며 본색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방이 막힌 비좁은 공간에서 곡예에 가까운 후진주차를 성공하고 쾌감을 느끼는 경우는 이기적이고 변태적인 섹스를 즐길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 시간 전 휴게소를 지난 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도로가에 홀로 덩그러니 떨어져 있던 웬디스버거 가게에서 소스를 지나게 뿌린 탓에 양상추가 눅눅해진 버거를 억지로 씹어 먹으며 건성건성 넘겨보았던 가십잡지의 페이지였기에 그다지 신빙성은 없다. 하지만 정말 Elly의 칼럼이 사실이라면ㅡ여성이 느끼는 오르가즘과 페니스 크기의 상관관계에 대해 열분을 토해내는 기자치곤 유치한 필명이라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ㅡ지금 그의 옆에서 양 손으로 우직하게 핸들을 붙잡고 있는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하품이 쏟아질 정도로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네바다주의 라스베이거스에서 북동쪽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로 향하는 인적이 드문 15번 고속도로. 독일의 아우토반까진 아니라도 지평선을 향해 끝없이 이어진 붉은 산맥과 갈대숲이 펼쳐진 초원을 따라 달리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놓여진 것 같은 직선 고속도로에서 피가 끓지 않는 남자가 있던가. 사막을 닮은 오렌지색 뜨거운 직사광선에 소매를 두 번 정도 접어 올린 하늘색 셔츠 아래 드러난 단단한 팔뚝은 우시와카쨩치곤 백진주색 메탈 스포츠카와도 제법 어울리는가 싶었는데. 457마력의 C63 벤츠 옆면에 새겨진 '괴물엔진'의 상징마크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140km를 달려도 아쉬울 마당에 아메리카 대륙까지 와서 안전속도 100km를 유지하는 꼴을 보자니 답답함에 몸이 근질거리는 것이다. 눈치와 함께 융통성도 없는 주제 고집도 더럽게 센 그에게 어울린다면 어울리는 드라이빙이었다. 하필이면 녀석과의 조우라는 것이 불만이지만 활짝 열린 창문 밖으로 스테레오를 끝까지 높이고 Deep Purple이나 Radiohead의 락앤롤과 함께 도로를 달리고 싶은 로망쯤은 저에게도 있었기에 오이카와는 퉁퉁 부은 입술을 삐쭉거렸다. 슈퍼카를 갖다 줘도 똥차로 굴려 먹는구만. 내내 불만스럽게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손잡이 근처 버튼을 누르자 완전히 돌려있는 고개를 따라 열린 창문에서 몰아치는 바람이 머리카락과 함께 이마를 때렸다. 멀미라도 하나. 그래, 지루해서 오이카와상 멀미가 날 정도야. 라디오라도 들을 텐가? 기껏 나온다는 대답이 그거다. 틀어봤자 온통 해적방송같은 꼬부랑 영어 뿐일 텐데 뭘 들으란 거야.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와 바퀴가 구르는 소리 사이로 한숨 섞인 비웃음이 흘렀다. 우시와카쨩이랑 하는 섹스도 엄청 지루하겠네. 평소처럼 반쯤의 악의가 담긴 짓궂은 장난에 불과했다. 그러나 무언가의 주문처럼 혹은 경고등의 신호처럼 우시지마의 표정이 짐짓 굳어지더니 도로 위를 달리던 벤츠가 갓길이랍시고 초원의 풀이 죽은 자리 위로 멈추어서는 것이었다. 뭐야 여기서 싸우자고? 당황한 마음을 애써 감추려 먼저 사납게 눈을 흘기자 핸들에서 두 손을 내려놓은 우시지마가 조수석에 앉아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의심된다면 시험해 봐도 좋다. 뭐가? 나와의 섹스가 정말로 지루한지 말이야. 그거야 당연히 농담이잖아. 내가 미쳤다고 우시와카쨩이랑 섹스를 해? 그러나 셔츠 아래 보기 좋게 핏줄이 선 그의 팔은 어느새 오이카와의 어깨를 가로지르던 안전벨트를 풀어 내리고 있었다. 여, 여기 고속도로 위야. 괜찮다, 아무도 안 지나가. 핑계를 찾으려 조잘거리는 모양이 귀찮은 듯 드리워지는 그림자와 함께 우시지마의 태연한 혀가 긴장에 마른 입술을 가르고 파고들었다. 과속은 안 되면서 고속도로 한가운데에서의 카섹스는 괜찮다니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운전습관도 그의 성격도 오이카와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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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네

 

가장 처음 든 생각은 휴대폰의 녹음버튼을 누르지 못한 일이었다. 그가 안다면 유난이라고 한 마디 할 테지만 쿠로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가능하다면 집을 나서서 역으로 달려가는 길까지, 미야기현의 작은 시골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그에게 통화를 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너무하다 싶은 애인군은 다른 사람들에게는-실제론 카라스노 고교 한정이지만-싱긋싱긋 웃기도 잘 웃고 희고 순한 외모에 어울리게 상냥한 주제 자신한테만 둥근 눈을 삐쭉 흘기면서 까탈스러우니까. 수화기를 통해서가 아니면 보고 싶다던가 하는 대사들 도통 듣기가 어려운 것이다. 집에서 편히 입고 있던 트레이닝복을 벗고 머리에 끼워 넣은 티셔츠의 밑단을 내리면서 쿠로오는 벽에 걸려있는 달력을 보았다. 너무하다는 말은 전부 거짓말. 애인군은 그저 남들보다 조금 부끄러움이 많고 남을 너무 생각하느라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는 것뿐이니까. 괜찮아, 괜찮아. 자신이 친절한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까 조금 까탈스러운 것 정도야 전부 괜찮아. 무엇보다 지금은 수화기 너머 들떠있던 목소리가 찬 손처럼 식기 전에 그의 곁으로 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 애인에게 보고 싶다 전화가 왔습니다  

 

 

거짓말이란 말 취소. 역 앞까지 친히 마중을 나와 주신 애인군은 아까의 모습은 간데없이-물론 눈으로 본 것도 아니니 확신할 순 없으나-평소와 다름없는 말끔한 모습으로 산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따뜻하게 데워져 있는 캔 커피를 건네는 것이었다. 불쑥 앞으로 내미는 흰 팔에 엉겁결에 받아 들기는 했지만 쿠로오는 여전히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가 봐도 그냥 해본 소리잖아. 지금이 몇신데 어쩌려고, 너희 학교는 내일 연습 없어? 퉁명스러운 척 볼멘소리를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수순이다. 스가와라군은 그냥 말하지 않잖아ㅡ앞서 나가는 등을 따라 자연스럽게 걸음을 맞추며 넌지시 말하자 오밀조밀한 눈썹을 찡긋거리며 미간을 구긴다. 내일 늦어도 난 모른다. 밤바람에 숨이 죽은 그의 머리카락처럼 끝이 내려가는 목소리에 네네, 변죽 좋게 대답하자 조금 더 걷자며 스가와라가 가로등이 늘어선 한산한 길로 향했다. 네 커피는? 난 아까 마셨어.

 

스가와라는 아마도 기분대로 걸음을 내딛는 모양으로, 쿠로오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지 묻지 않았다. 도쿄와 달리 드문드문 서있는 가로등은 전구가 오래 되었는지 당장이라도 퓨즈가 나갈 것처럼 빛이 깜빡깜빡 거리는 것도 있었지만 그만큼 별이 밝으니까 발밑이 보이지 않을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스가와라는 그마저도 보이지 않는 마냥 멍한 시선을 저만치에 두고 걷고 있었다. 이러다 넘어지면 놀려야 될까, 무릎을 보듬고 그의 얼굴을 마주봐야 하는 걸까 고민하던 찰나 콕 박혀 있는 눈물점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얀 피부에서 도드라져 보이는 눈물점이야 이제는 눈을 감고 만져도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진 것이지만 문제는 눈물점 위로 발갛게 부어오른 눈가였다. 깜빡거리는 희미한 등을 지나 밝은 빛 아래로 오니 어깨 근처의 얼굴이 더욱 자세히 보였다. 도톰한 눈꺼풀이 평소보다 두 배는 되어서 꼭 물을 먹고 부풀어 오른 밀가루 반죽같았다. 만지면 쓰라리려나. 살살 쓰다듬어주면 붓기가 좀 가라앉지 않으려나. 걱정이 되다가도 울컥 화가 나는 것이었다. 자신의 애인군은 비겁하다. 부끄러움이 많은 건 상관없지만 솔직하지 못한 건 안 돼. 아무리 까탈스러워도 쿠로오씨는 다 이해하지만 말이야 숨기는 건 나빠.            

 

"스-가와라군 왜 먼저 울고 그래."

"울긴 누가 울었다고."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렸어야지. 혼자 다 하고나면 내가 할 게 없잖아."

"왜 내가 울었다는게 전제가 되는지 모르겠거든요?"

 

발끈하는가 싶더니 스가와라는 이내 느려지던 걸음을 멈춰 섰다. 금세 차가워진 밤바람에 머리가 식어가는 모양인지 묵묵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내내 둥근 운동화의 앞코가 맨 흙바닥을 툭툭 쳐댔다. 그동안 쿠로오는 가로등 아래 날아다니는 벌레들의 꽁무니를 바라보았다. 여름이 가면서 날이 점점 선선해져선지 윙윙대던 벌레의 수도 줄었다. 두 손을 꽂아 넣은 윗옷 주머니 안에 그가 주었던 캔 커피도 어느덧 식어서 손끝이 조금 차가웠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스가와라가 무거운 입을 떼었다. 입술을 떼며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에 이어서 공기를 들이마시는 숨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오늘 아오바죠사이와 경기가 있었어. 교체지만 잠깐 세터로 코트에 나갔고, 그리고...졌다."      

"슬펐겠네."

"그래."

"분하기도 하고."

"...응. 그래서 전화가 하고 싶었는데 상대가 너 밖에 없었어."

"와 그거 무지 기뻐. 나 기뻐해도 될까?" 

 

어처구니가 없는지 일그러지던 얼굴이 이윽고 풍선의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이 피시시 실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래서 코트에 나가보니까 기분이 어땠어? 글쎄 지금껏 몇 번이나 해봤던 공식전인데 꼭 처음인 것처럼 떨리더라. 토스를 올릴 때 기분은 좋았어? 아주 좋았어. 내내 주머니 안에 있던 손이 밖으로 나와 가까이 닿는 손을 잡았다. 처음 건네받았던 캔 커피의 그만큼 따뜻해서 부드러운 살갗 너머로 온도가 섞이기 딱 좋았다.     

 

"와줘서 고마워."

"나도 불러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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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코믹스같은 제목...캐붕 있을지도 몰읍니다

글애서 쿠로스가 언제 살림 차릴건지 누나한테 살짝 알려주면 안되겟니^q^

 

Posted by 모노님 :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생각한다.

저것은 분명 신 포도이다.

 

알알이 영글어 있는 포도는 더할 나이 없이 싱그러워 보였지만 얄팍한 겉껍질에 이제 막 붉은 기운이 맴돌기 시작하는 모습은 유리잔 속에서 퍼져가는 독물처럼 불안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시고 떫을 것이 마땅한 포도의 맛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혀가 저려왔다. 이대로 지나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을 따라서 매끈한 표면 위를 흘러내리는 진한 향기가 자꾸만 코끝을 간질이는 것이었다. 시선을 피할수록 향기는 더욱 진해져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 우화 속의 여우가 등을 돌렸던 포도송이 앞에서 결국 우시지마의 투박한 손끝이 줄기 끝에 걸려있던 포도알을 집어 들었다. 마디가 길고 단단한 손가락 사이에서 엄지손톱만한 포도가 더욱 작아보였지만 한 입에 삼키기엔 충분한 크기이다. 물씬한 풋내를 느끼며 우시지마는 껍질 사이로 터져 나올 달달한 과즙과 부드럽게 씹힐 식감을 기대하며 잇 사이로 연약한 과실을 굴려 넣었다. 처음 짐작했던 그대로 신 포도의 설익은 과즙이 입 안 가득 넘친다.

 

 

 

: 애욕과 신 포도 

 

 

 

따가운 마찰음과 함께 우시지마의 고개가 돌아갔다. 정확히는 집요하게 아래를 주시하던 고개가 왼쪽으로 조금 움직인 것뿐이지만 마른 뺨을 스치던 통증만은 분명했다. 희지만 선이 곧은 팔을 그리 힘껏 내리친 것이다. 우시지마를 밀어내기 위해서. 하지만 얼얼한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태연하게 움직이는 시선이 금세 처음의 자리를 찾았다.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거친 바닥에 끌리는 금속성의 그것처럼 저온까지 내려간 눈동자의 색에 바닥에 닿은 등줄기로부터 삐쭉 소름이 돋는다. 그렇기에 오이카와는 더욱 이를 드러내며 악을 썼다. 거대한 앞발로 오르내리는 윗배를 짓누른 채 도사리고 있는 맹수의 목전 마냥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끈이 단 1초라도 느슨해지는 그 때가 제 목덜미를 물어뜯기는 순간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우시와카쨩 혹시 미쳤어?"

 

문득 입 안 어딘가에서 신 맛이 느껴졌다. 아마 뺨을 맞은 순간 안쪽의 여린 살이 찢어진 모양으로 배어 나오는 핏물에 입 안 전체가 시고 떫었다. 그러나 우시지마는 개의치 않고 혀끝에 고이는 묽은 피를 타액과 함께 전부 목 뒤로 삼키었다. 스칠 때마다 쓰라린 상처나 비린 냄새 따위는 지금 이 순간 조금도 문제되지 않는 것이다. 그보다는 바닥을 짚고 있는 제 팔 안에 가두어진 오이카와의 경우가 더욱 중요했다. 우수한 선수답게 단단한 체격을 갖고 있었지만 뿌리치는 팔목을 비틀어 제 아래 두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왜 나를 싫어하지?"

"그거라면 이미 몇번이고 말했을 텐데. 그냥 다 싫어."

 

갈라진 입술 사이로 슬쩍 내밀다 사라지는 붉은 세치 혀와 함께 시선이 어긋났다. 얼굴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진저리가 쳐진다는 뜻의 노골적인 거부의사일수도 있으나 미세하게 떨리는 눈꺼풀이나 악물은 잇사이로 새어나오는 애를 쓰는 소리는 회피의 기색이 역력한 것이다. 약간의 틈새도 놓치지 않고 우시지마의 커다란 손이 오이카와의 목을 감싸 쥐었다. 감겨드는 두꺼운 손가락이 목 위로 도드라진 울대를 살짝 짓누르자 휘둥그레지는 눈동자와 함께 벌어진 입술에서 억눌린 숨이 터져 나왔다.       

 

"다시 묻겠다. 모든 게 나의 책임이라 말하고 싶은 건가? 그건 나를 증오할 만큼의 과오인건가?"

"허억, 컥!."

 

애초에 잘못된 전제의 질문이라는 것을 우시지마 역시 알았다. 목이 졸린 채 배를 내밀고 떠있는 금붕어의 마지막 마냥 숨을 뻐끔거리는 오이카와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저 제게서 도망치려 드는 오이카와를 지켜보면서 잠시 어렴풋한 우화가 떠오른 것뿐이었다. 그는 여우와 신 포도의 짧은 옛 이야기와 그 저열한 합리화에 대해서 기억해냈다. 결국 포도의 맛을 모르고 자리를 떠나버린 여우의 비겁한 뒷모습을. 그리고 생각한다, 그와 자신이 뒤집어쓸 허울에 대해서. 곧이어 우시지마가 영원히 풀지 않을 것처럼 움켜쥐고 있던 손아귀에서 힘을 빼었다.

 

"네가 틀린 거다. 오이카와."

 

가까스로 트인 숨통에 퍼렇게 질린 얼굴로 호흡을 헐떡이기에 바빠 오이카와는 부드럽게 나무라는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욱신거리는 목울대는 보지 않아도 분명 벌겋게 손자국이 남았을 터였다. 다행히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축축하게 고여 일렁거리는 눈시울이 아려왔다. 기침을 뱉는 것만으로도 목구멍이 쓰라려서 오이카와는 쉽사리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끔찍한 고통 다음에 찾아온 것은 진한 공포로 한번 겁에 질린 몸이 본능적으로 떨고 있었다. 한껏 누그러진 우시지마의 시선과 귓가에 들려오는 나지막한 음성에도 어떠한 위안도 느낄 수 없었다. 최후의 반항으로 힘겹게 도리질치는 오이카와를 무시하며 우시지마가 어느새 울긋불긋 멍이 든 목 언저리에 얼굴을 묻었다. 뒤집어쓸 자기합리화의 허울이라면 증오할 이유를 주는 것 또한 자신이어야 했다.    

 

 

 

포도는 시었다. 전류에 닿은 듯 혀가 저리고 가지런하던 미간이 여차 없이 찌푸려졌다. 얼얼한 혀끝은 그 떫은맛을 기억해야 했다. 두 번 다시 신 포도를 먹지 않기 위해서는.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도 설익은 과실의 향기는 여전히 그의 곁을 맴도는 것이다. 그제야 우시지마는 입 안 뿐만이 아니라 그의 두 손 역시 포도에서 흘러나온 과즙으로 흠뻑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기하게도 마비처럼 떫었던 맛이 서서히 감칠맛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향기는 짓궂게 굴려지는 그의 혀끝에서 성숙되고 있었다. 굵은 혀에서 배어나온 농밀한 기운이 그것을 사정없이 농락한다. 퍼져가는 독물에 중독된 것처럼 입 안 가득 고여 흐르는 군침이 그것을 하염없이 갈구하고 탐한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생각한다.

자신은 신 포도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Posted by 모노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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