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 피는 새벽
[19세미만 구독불가 / A5 / 56p / 떡제본 / 6,000원]
청황(아오미네X키세)AU소설입니다.
케스 레드존 I-10 '이 부스 모냐'에 있습니다.
술도가의 마지막 후계자 키세의 문하로 들어간 머슴(...)아오미네의 이야기입니다.
표지는 코나님 커미션입니다~
<<sample>>
마른 먼지를 일으키며 커다란 몸이 넘어간다.
그럼에도 몽둥이를 내리치는 손들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장대비처럼 쏟아 붓는 매타작에는 아무리 장정의 사내라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저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묽은 피가 흘러내리는 머리를 끌어안고 불어터진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잃지 않도록 견디어 내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바위처럼 웅크려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는 꿋꿋한 모습이 오히려 그들의 화를 돋우었는지 가래침 섞인 걸쭉한 욕설이 너른 등 위로 뱉어졌다.
“천하의 상놈 같으니라고, 짐승의 사료로도 네 놈은 쓰이지 않을 것이야!”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축축한 가래덩어리에 화가 이는 것이 아니었다. 땅바닥을 기어 사는 미천한 놈이라지만 짐승과 비하는 것은, 더구나 이 몸뚱이를 갈아 돼지에게라도 주겠다는 것인가. 수치심을 넘어 끓어오르는 울화에 사내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갈기갈기 찢겨 옷이라고도 볼 수 없는 거적 사이로 울긋불긋 피멍으로 뒤덮인 등판이 퉁퉁 부어올라서야 팔뚝만한 몽둥이가 쩍하고 갈라져 내린다. 지나가는 똥개에게 생각 없이 내리치는 돌팔매질처럼 뭇매에는 연유가 없었다. 천한 것들이 저보다 천한 것들을 찾아 주인 행세를 하며 호기를 부리는 것이다. 흡사 광기라고 할 만큼 비틀린 눈을 가진 이상자들의 분풀이만이 저잣거리의 뒤편을 채우고 있었다.
살이 터지는 고통과 온몸에서 발화되는 열은 사내의 머릿속까지 뒤흔든다.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기분에 굵은 선의 눈썹이 들썩이고 부릅뜬 푸른색 눈동자가 형형히 빛났다. 부득 이가 갈리던 그때 사내의 손끝에 무언가가 걸려들었다. 갈라져 떨어진 몽둥이의 토막이 그곳에 있었다. 얼룩무늬마냥 핏방울이 튀어있는 날카로운 끝에 두 눈이 질끈 감기고, 그러쥔 주먹 안에 힘이 들어갔다. 반죽음 상태이던 사내의 기세가 불길한 살기를 타는 것도 모르고 농을 주고받으며 히죽거리던 그들이 다시 한 번 몽둥이를 크게 들어 올리던 때였다.
“그만 두십시오.”
울림은 종소리처럼 귓가에 선명하였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사내도, 그를 둘러싼 패거리도 휘두르려던 손을 멈추었다. 맑은 파도에 씻긴 듯 신기하게도 흉흉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흥분이 가라앉는 숨들에 사내가 땀이 엉긴 눈꺼풀을 소 마냥 느리게 껌뻑거렸다. 웅성거리는 구경꾼들의 무리를 헤치고 다가오는 걸음은 가벼우니 거추장스러움이 없다. 타박타박 이내 코앞에서 소리가 멎고 팔락이는 백색의 유카타 자락 아래로 크지 않은 발이 단정한 게다 위를 딛고 있었다.
“제가 그를 거두겠습니다.”
올려보는 고개를 따라 샛노란 호박(琥珀)의 눈동자가 마주쳐 왔다.
* * *
호박을 어찌 아느냐 하면. 떠돌이여정 중 가진 건 풍채뿐이니 가끔 행랑에 묵으며 잔돈을 받고 굳은 일을 할 적이 있는데 저택 안주인의 머리채에 꽂혀 있던 칸자시 비녀가 바로 호박 보석이었다. 한나절의 진한 태양처럼 노란 빛깔을 띤 호박은 여간 귀한 것이 아니라며 간드러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분 냄새나는 몸을 비벼오곤 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나는 냄새는 서양분의 역한 냄새와는 달랐다. 주름 없이 깨끗하게 다려진 옷깃과 소매가 바람에 나부낄 때마다 은은한 연꽃의 향기가 풍겨져 나오는 것이다.
“아오미넷치!”
뒤를 따르는 것도 잊은 채 멀뚱히 서 있는 사내를 키세가 돌아보았다.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놀란 머리를 좌우로 털어내며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뿌리도 없는 상놈에게 과분하다며 저마저도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장난스런 애칭까지 덧붙여서 불러지는 호칭이 맞지 않은 옷이라도 걸친 듯 목 언저리가 영 근지럽고 어색하다.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나리.”
“아오미넷치야 말로 나리라고 부르는 것 관두세요.”
그럼 무어라 부르나. 멋쩍어하는 표정에 싱긋 미소 짓는다. 키세라고 부르면 되지요. 제대로 된 경어도 알지 못하지만 감히 하인 주제 주인댁의 성을 함부로 부르다니 집안의 지체 높은 어르신이 아신다면 불호령이 떨어질 일이었다. 그러나 키세家의 유일한 가주는 바로 눈앞의 청년이다.
“그나저나 어제 내준 숙제는 다 했나요?”
요 며칠 익숙하지 않은 붓을 억지로 손에 쥐어주며 한자쓰기를 가르쳤었다. 여태껏 나무를 패고 밭이나 일구던 억센 손이었으니 힘 조절이 될 리가 만무하다. 형체가 잡히지 않아 삐뚤빼뚤한 글자에 수십 장의 종이가 흥건히 젖거나 찢어질 동안에도 키세는 아오미네의 곁에서 몇 번이고 밤바다 같은 먹을 갈았다.
“글 따위 몰라도 상관없잖아. 써먹을 데도 없구만.”
“그러니 무시 받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배우려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책을 읽진 않아도 글을 알아야 현판을 내걸고 장사라도 하지요. 사뭇 단호한 음성을 뒤로 그가 문을 나섰다. 낡은 고택은 백련의 밭에 둘러싸여 있었다. 마을에서도 멀리 떨어져 귀퉁이에 자리 한 오래 된 술도가는 규모는 작지만 막부에 진상을 올릴 정도로 저명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다 옛날 얘기이지요. 명맥만을 겨우 이어가고 있는 형편이지만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주시는 손님을 위해 조금이나마 술을 빚고 있습니다. 곁에서 덤덤히 말을 잇는 이가 바로 술도가의 마지막 계승자인 키세 료타였다. 뜻밖에 나타난 명인은 포악한 패거리의 사이를 비집고 선언하듯 말하였다.
-그를 문하로 들이겠습니다.
아직 여린 티가 가시지 않은 청년에게서 위압감일랑 느껴질리 없겠지만 그럼에도 곧은 목소리에 다들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가 자신을 거두었다.
후사가 없던 아들 며느리 부부가 산적에게 변을 당해 죽고 별다른 위세라곤 없이 그저 술을 빚는 것이 전부인 변변찮은 가문이었다. 그대로 대가 끊기는가 싶었는데 여느 날 웬일로 아흐레씩이나 집을 비운 어르신이 무려 에도까지 나가 사내아이를 데려왔다. 암암리에 도는 얘기로는 과거 프랑스 선교사와 하룻밤 배가 맞은 것이라 하는데 무슨 영문이었건 외곬이던 어르신은 아이에게 키세 료타라는 성과 이름을 주었고 아들이자 하나뿐인 후계자로 삼아 연꽃으로 술 빚는 법을 가르쳤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조차 모호하던 작고 마른 사생자가 노인의 주름진 손을 잡고 고택의 문지방을 넘을 때 하인들이야 못내 하고픈 말을 목구멍 뒤로 삭혔지만 우물가 아낙들의 재잘대는 입까지는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어쩜 그리 하나도 닮지 않았지? 그도 그럴게 치자 물로 염색한 듯 샛노란 금발이나 오리마냥 보드라운 솜털로 감싸진 흰 뺨, 차양처럼 드리워진 기다란 속눈썹 등은 곰보 같은 주인어르신과 어디 하나 닮지 않은 것이다. 극성맞은 아랫것이 손가락, 발가락, 허벅지의 점이나 귓바퀴의 구부러진 모양까지 샅샅이 비교해보았지만 비슷한 구석일랑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볕에 물든 금발은 시골마을 어디에서나 눈에 띄었고 어쩌다가 방물장수가 들여오는 서양 인형처럼 곱게 생긴 모양새에 남세스런 소문이 따라붙기도 하였다. 아오미네도 일찍이 귀동냥을 들어 알고 있다. 명색에 문장이 있는 가문이라고 얼마 되지 않는 전답을 노리고 어린 것이 요망하게 노인네를 꾄 것이 아니냐. 또 다른 이에 따르면 병에 걸린 사창가의 소년을 어르신이 거두어 낫게 해주고 양자로 삼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따금 보이는 파리한 안색이나 좀처럼 살이 붙지 않는 나뭇가지 같은 길쭉한 팔 다리를 보면 병치레를 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저잣거리의 구설수들이 대부분 뜬구름과 같듯 속 시원하게 밝혀진 것은 어느 하나 없다.
어르신이 병환으로 명을 달리 한 뒤 우려와는 다르게 키세는 착실히 예를 차려 장례를 지냈다. 가문의 후계자로서 상복을 입고 밤새워 조문객을 맞았고 봉안당에 선향을 피워 올렸다. 신통하게도 별다른 식솔도 부리지 않고 홀로 고택을 돌보며 지내는 모습에 소문은 차차 수그러들었고 전과 다름없이 고택 주위엔 해마다 백련 꽃이 만개하였다.
문하라니.
그는 자신을 종으로 부리지 않았다. 다시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뜻조차 모르는 단어에 표정을 구기자 키세가 그런 아오미네의 생각을 눈치 챘다는 듯 손을 잡아챘다. 구부러지는 고사리의 끝처럼 감겨드는 손가락의 온도는 서늘하다. 갑작스레 닿아온 낯선 감각에 주춤 뒤로 물러서려는 것을 놓치지 않고 키세가 재빨리 아오미네를 잡아 당겼다.
“이 손과 시간만 있으면 됩니다.”
흉터자국과 굳은살이 박여 고목의 껍질 같은 손은 그보다 살갗이 얇은 섬섬옥수에도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기세 좋게 앞서가는 걸음을 따라 도착한 곳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아득한 연꽃의 밭이었다.
“꽃이 보이지 않는데.”
“만개하는 것은 다음입니다, 오늘은 봉오리가 틔우는 것을 도우러 왔어요.”
아오미네는 작은 벌레가 되어 거대한 수풀 속에 빠진 기분이었다. 고개를 둘러보아도 시야에 차는 것은 시릴 만큼 선명한 녹음뿐이다. 간간히 주먹만 하게 맺힌 흰 봉오리가 눈에 띄기도 했지만 너도나도 활짝 펼친 손바닥처럼 우거진 연잎에 작은 밥풀떼기처럼 보일 뿐이다. 이파리만이 무성한 밭은 아무래도 꽃밭이라 하기엔 황량한 감이 있다.
기골이 장대한 아오미네지만 우후죽순으로 자라난 연잎덤불은 그의 머리끝까지 닿아 있었다. 앞을 막고 있는 줄기를 치우며 아오미네가 인상을 찌푸릴 동안 키세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길이 있는지 요령 있게 덤불을 비켜서 앞으로 나아갔다. 지느러미를 미끄러뜨리며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노란 머리카락의 끝이 보이지 않을까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졌다. 저를 미아로 만들려 짓궂게 구는 것은 아닐까. 기다리란 말은 차마 할 수 없어 아오미네는 마구잡이로 줄기를 헤치며 키세의 뒤를 쫓았다.
어느 정도 다다랐을까 외딴섬 같은 공터가 나왔고 앞서 도착해있던 키세가 신고 있던 나무게다를 벗어 한쪽에 두었다. 그리곤 말없이 유카타의 밑자락을 끌어 올렸다. 일꾼들이 하는 것처럼 활동에 편하게끔 옷깃을 말아 올려 매듭을 지자 그 아래로 새하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그 순간 걸음을 내딛기 위해 붙잡고 있던 연꽃의 줄기가 으득 부러지고 흔들리는 눈동자를 남겨둔 채 키세가 물속으로 맨발을 담그었다.
“제법 깊이가 되니 조심하세요.”
(이어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곧이어 사립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오미네는 돌아보지 않았다. 매듭을 풀어낸 뒤 옷감이 맨살 위로 쓸려 내려가는 부스럭거림에 이어서 참방 물보라가 이는 것이 들려왔다. 아오미네는 묵묵히 불씨를 부칠 뿐이다. 은근한 열기만이 남고 타버린 숯불이 잿더미가 되었음에도 그는 실없는 부채질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순간 뒷목에 투둑 물방울이 튀었다. 천장에 맺힌 이슬이 떨어졌나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자 다시 한 번 물줄기가 등 뒤를 적신다. 지난날 그가 손바닥 위에 연잎을 담아 기울였던 것처럼 익숙한 기시감에 고개를 돌려보니 욕탕 안에서 장난스러운 얼굴을 한 키세가 아오미네를 향해 아이처럼 손가락 끝으로 물방울을 튀기고 있었다.
“뜨겁지는 않아?”
“딱 좋아요. 고마워요, 아오미넷치.”
오목한 손바닥에 한 움큼 물을 기어 어깨 위로 천천히 붓는다. 덩달아 모락모락 김이 나는 흰 살이 더할 나이 없이 보드라워 보인다. 또르르 흘러내린 물방울은 동그란 어깨 봉우리 너머로 떨어지기도 하고 움푹 파인 쇄골에 샘처럼 고이기도 하였다. 마른 살가죽 위로 도드라진 굴곡이 안쓰러우면서도 괜스레 화하고 열이 오른다.
“목 아래까지 푹 담가라.”
뽀얀 수증기 속에 아롱거리는 살결이 얄미워 아오미네는 차라리 키세를 물속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신경이 쓰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얹어진 두 손은 마음과 달리 그의 어깨 위를 고집스레 머무르는 것이었다.
“기분 좋네요.”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마냥 굽어진 무릎 사이를 빈 공간이 없게끔 붙인 채 둥글게 말아져 있던 허리가 따뜻한 물속에서 기지개를 켜듯 뒤로 천천히 젖혀졌다. 다완 속에서 새순의 찻잎물이 노랗게 우러나는 것처럼 긴장이 풀려 한결 녹진해진 몸이 편안하게 등을 기댄다. 물의 온도가 익숙해진 무렵 아직 피로가 뭉쳐있는 딱딱한 언저리를 짚으며 키세가 으읏 작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주물러줄까?”
아오미네는 키세가 자신의 어떠한 불순한 의도도 눈치 채지 못하기를 바랐다. 태연스럽게 얹어져 있던 손끝에 힘을 주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반점 하나 없이 정결한 피부를 느릿하게 쥐었다 놓았다. 놓는 순간 그 찰나가 터무니없이 아쉬워져 다시금 손아귀를 구부렸다. 할 수 있다면 계속해서 붙잡고 싶었다. 찰거머리마냥 끈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목욕물이 지나치게 뜨거운 것은 아닐까.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끔거리는 열기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아오미네는 알 수 없다.
다행히 기분이 좋은 듯 어깨를 주무르는 동안 키세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오미네에게 온전히 몸을 맡긴 채 티끌의 의심도 보이지 않는다. 제 손 안에서 쉬고 있는 그의 모습에 가슴 한편이 벅차다. 동시에 다른 한편에선 스물 스물 피어나는 욕심이 눈을 가리었다.
“에도로 가는 길에 나도 함께 가.”
“집은 누가 지키고요?”
“나리만 에도 구경을 하나. 촌놈도 한번 데려가라.”
“안됩니다. 어차피 성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릴게.”
조금 굳은 얼굴 표정에는 난처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여전히 희미하게 여려있는 미소에 기대를 걸며 아오미네가 손가락 끝을 장난스럽게 굴렸다. 가망도 없이 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도 아오미네는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턱 아래 휑한 목덜미나 어깨와 겨드랑이로 이어지는 사이 등 간지러움을 태우는 손길에 꼼짝없이 붙잡힌 키세가 온몸을 배배 꼬며 웃음을 터트렸다.
부스 위치는 레드존 I-10 이 부스 모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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