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 피는 새벽

[19세미만 구독불가 / A5 / 56p / 떡제본 / 6,000원]

 

 

 

청황(아오미네X키세)AU소설입니다.

케스 레드존 I-10 '이 부스 모냐'에 있습니다.

술도가의 마지막 후계자 키세의 문하로 들어간 머슴(...)아오미네의 이야기입니다.

표지는 코나님 커미션입니다~

 

 

 

 

 

 

 

 

 

<<sample>>

 

 

 

마른 먼지를 일으키며 커다란 몸이 넘어간다.

 

그럼에도 몽둥이를 내리치는 손들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장대비처럼 쏟아 붓는 매타작에는 아무리 장정의 사내라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저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묽은 피가 흘러내리는 머리를 끌어안고 불어터진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잃지 않도록 견디어 내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바위처럼 웅크려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는 꿋꿋한 모습이 오히려 그들의 화를 돋우었는지 가래침 섞인 걸쭉한 욕설이 너른 등 위로 뱉어졌다.

 

천하의 상놈 같으니라고, 짐승의 사료로도 네 놈은 쓰이지 않을 것이야!”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축축한 가래덩어리에 화가 이는 것이 아니었다. 땅바닥을 기어 사는 미천한 놈이라지만 짐승과 비하는 것은, 더구나 이 몸뚱이를 갈아 돼지에게라도 주겠다는 것인가. 수치심을 넘어 끓어오르는 울화에 사내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갈기갈기 찢겨 옷이라고도 볼 수 없는 거적 사이로 울긋불긋 피멍으로 뒤덮인 등판이 퉁퉁 부어올라서야 팔뚝만한 몽둥이가 쩍하고 갈라져 내린다. 지나가는 똥개에게 생각 없이 내리치는 돌팔매질처럼 뭇매에는 연유가 없었다. 천한 것들이 저보다 천한 것들을 찾아 주인 행세를 하며 호기를 부리는 것이다. 흡사 광기라고 할 만큼 비틀린 눈을 가진 이상자들의 분풀이만이 저잣거리의 뒤편을 채우고 있었다.

 

살이 터지는 고통과 온몸에서 발화되는 열은 사내의 머릿속까지 뒤흔든다.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기분에 굵은 선의 눈썹이 들썩이고 부릅뜬 푸른색 눈동자가 형형히 빛났다. 부득 이가 갈리던 그때 사내의 손끝에 무언가가 걸려들었다. 갈라져 떨어진 몽둥이의 토막이 그곳에 있었다. 얼룩무늬마냥 핏방울이 튀어있는 날카로운 끝에 두 눈이 질끈 감기고, 그러쥔 주먹 안에 힘이 들어갔다. 반죽음 상태이던 사내의 기세가 불길한 살기를 타는 것도 모르고 농을 주고받으며 히죽거리던 그들이 다시 한 번 몽둥이를 크게 들어 올리던 때였다.

 

그만 두십시오.”

 

울림은 종소리처럼 귓가에 선명하였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사내도, 그를 둘러싼 패거리도 휘두르려던 손을 멈추었다. 맑은 파도에 씻긴 듯 신기하게도 흉흉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흥분이 가라앉는 숨들에 사내가 땀이 엉긴 눈꺼풀을 소 마냥 느리게 껌뻑거렸다. 웅성거리는 구경꾼들의 무리를 헤치고 다가오는 걸음은 가벼우니 거추장스러움이 없다. 타박타박 이내 코앞에서 소리가 멎고 팔락이는 백색의 유카타 자락 아래로 크지 않은 발이 단정한 게다 위를 딛고 있었다.

 

제가 그를 거두겠습니다.”

 

올려보는 고개를 따라 샛노란 호박(琥珀)의 눈동자가 마주쳐 왔다.

 

 

 

* * *

 

 

 

호박을 어찌 아느냐 하면. 떠돌이여정 중 가진 건 풍채뿐이니 가끔 행랑에 묵으며 잔돈을 받고 굳은 일을 할 적이 있는데 저택 안주인의 머리채에 꽂혀 있던 칸자시 비녀가 바로 호박 보석이었다. 한나절의 진한 태양처럼 노란 빛깔을 띤 호박은 여간 귀한 것이 아니라며 간드러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분 냄새나는 몸을 비벼오곤 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나는 냄새는 서양분의 역한 냄새와는 달랐다. 주름 없이 깨끗하게 다려진 옷깃과 소매가 바람에 나부낄 때마다 은은한 연꽃의 향기가 풍겨져 나오는 것이다.

 

아오미넷치!”

 

뒤를 따르는 것도 잊은 채 멀뚱히 서 있는 사내를 키세가 돌아보았다.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놀란 머리를 좌우로 털어내며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뿌리도 없는 상놈에게 과분하다며 저마저도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장난스런 애칭까지 덧붙여서 불러지는 호칭이 맞지 않은 옷이라도 걸친 듯 목 언저리가 영 근지럽고 어색하다.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나리.”

아오미넷치야 말로 나리라고 부르는 것 관두세요.”

 

그럼 무어라 부르나. 멋쩍어하는 표정에 싱긋 미소 짓는다. 키세라고 부르면 되지요. 제대로 된 경어도 알지 못하지만 감히 하인 주제 주인댁의 성을 함부로 부르다니 집안의 지체 높은 어르신이 아신다면 불호령이 떨어질 일이었다. 그러나 키세의 유일한 가주는 바로 눈앞의 청년이다.

 

그나저나 어제 내준 숙제는 다 했나요?”

 

요 며칠 익숙하지 않은 붓을 억지로 손에 쥐어주며 한자쓰기를 가르쳤었다. 여태껏 나무를 패고 밭이나 일구던 억센 손이었으니 힘 조절이 될 리가 만무하다. 형체가 잡히지 않아 삐뚤빼뚤한 글자에 수십 장의 종이가 흥건히 젖거나 찢어질 동안에도 키세는 아오미네의 곁에서 몇 번이고 밤바다 같은 먹을 갈았다.

 

글 따위 몰라도 상관없잖아. 써먹을 데도 없구만.”

그러니 무시 받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배우려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책을 읽진 않아도 글을 알아야 현판을 내걸고 장사라도 하지요. 사뭇 단호한 음성을 뒤로 그가 문을 나섰다. 낡은 고택은 백련의 밭에 둘러싸여 있었다. 마을에서도 멀리 떨어져 귀퉁이에 자리 한 오래 된 술도가는 규모는 작지만 막부에 진상을 올릴 정도로 저명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다 옛날 얘기이지요. 명맥만을 겨우 이어가고 있는 형편이지만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주시는 손님을 위해 조금이나마 술을 빚고 있습니다. 곁에서 덤덤히 말을 잇는 이가 바로 술도가의 마지막 계승자인 키세 료타였다. 뜻밖에 나타난 명인은 포악한 패거리의 사이를 비집고 선언하듯 말하였다.

 

-그를 문하로 들이겠습니다.

 

아직 여린 티가 가시지 않은 청년에게서 위압감일랑 느껴질리 없겠지만 그럼에도 곧은 목소리에 다들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가 자신을 거두었다.

 

후사가 없던 아들 며느리 부부가 산적에게 변을 당해 죽고 별다른 위세라곤 없이 그저 술을 빚는 것이 전부인 변변찮은 가문이었다. 그대로 대가 끊기는가 싶었는데 여느 날 웬일로 아흐레씩이나 집을 비운 어르신이 무려 에도까지 나가 사내아이를 데려왔다. 암암리에 도는 얘기로는 과거 프랑스 선교사와 하룻밤 배가 맞은 것이라 하는데 무슨 영문이었건 외곬이던 어르신은 아이에게 키세 료타라는 성과 이름을 주었고 아들이자 하나뿐인 후계자로 삼아 연꽃으로 술 빚는 법을 가르쳤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조차 모호하던 작고 마른 사생자가 노인의 주름진 손을 잡고 고택의 문지방을 넘을 때 하인들이야 못내 하고픈 말을 목구멍 뒤로 삭혔지만 우물가 아낙들의 재잘대는 입까지는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어쩜 그리 하나도 닮지 않았지? 그도 그럴게 치자 물로 염색한 듯 샛노란 금발이나 오리마냥 보드라운 솜털로 감싸진 흰 뺨, 차양처럼 드리워진 기다란 속눈썹 등은 곰보 같은 주인어르신과 어디 하나 닮지 않은 것이다. 극성맞은 아랫것이 손가락, 발가락, 허벅지의 점이나 귓바퀴의 구부러진 모양까지 샅샅이 비교해보았지만 비슷한 구석일랑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볕에 물든 금발은 시골마을 어디에서나 눈에 띄었고 어쩌다가 방물장수가 들여오는 서양 인형처럼 곱게 생긴 모양새에 남세스런 소문이 따라붙기도 하였다. 아오미네도 일찍이 귀동냥을 들어 알고 있다. 명색에 문장이 있는 가문이라고 얼마 되지 않는 전답을 노리고 어린 것이 요망하게 노인네를 꾄 것이 아니냐. 또 다른 이에 따르면 병에 걸린 사창가의 소년을 어르신이 거두어 낫게 해주고 양자로 삼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따금 보이는 파리한 안색이나 좀처럼 살이 붙지 않는 나뭇가지 같은 길쭉한 팔 다리를 보면 병치레를 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저잣거리의 구설수들이 대부분 뜬구름과 같듯 속 시원하게 밝혀진 것은 어느 하나 없다.

 

어르신이 병환으로 명을 달리 한 뒤 우려와는 다르게 키세는 착실히 예를 차려 장례를 지냈다. 가문의 후계자로서 상복을 입고 밤새워 조문객을 맞았고 봉안당에 선향을 피워 올렸다. 신통하게도 별다른 식솔도 부리지 않고 홀로 고택을 돌보며 지내는 모습에 소문은 차차 수그러들었고 전과 다름없이 고택 주위엔 해마다 백련 꽃이 만개하였다.

 

문하라니.

 

그는 자신을 종으로 부리지 않았다. 다시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뜻조차 모르는 단어에 표정을 구기자 키세가 그런 아오미네의 생각을 눈치 챘다는 듯 손을 잡아챘다. 구부러지는 고사리의 끝처럼 감겨드는 손가락의 온도는 서늘하다. 갑작스레 닿아온 낯선 감각에 주춤 뒤로 물러서려는 것을 놓치지 않고 키세가 재빨리 아오미네를 잡아 당겼다.

 

이 손과 시간만 있으면 됩니다.”

 

흉터자국과 굳은살이 박여 고목의 껍질 같은 손은 그보다 살갗이 얇은 섬섬옥수에도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기세 좋게 앞서가는 걸음을 따라 도착한 곳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아득한 연꽃의 밭이었다.

 

꽃이 보이지 않는데.”

만개하는 것은 다음입니다, 오늘은 봉오리가 틔우는 것을 도우러 왔어요.”

 

아오미네는 작은 벌레가 되어 거대한 수풀 속에 빠진 기분이었다. 고개를 둘러보아도 시야에 차는 것은 시릴 만큼 선명한 녹음뿐이다. 간간히 주먹만 하게 맺힌 흰 봉오리가 눈에 띄기도 했지만 너도나도 활짝 펼친 손바닥처럼 우거진 연잎에 작은 밥풀떼기처럼 보일 뿐이다. 이파리만이 무성한 밭은 아무래도 꽃밭이라 하기엔 황량한 감이 있다.

 

기골이 장대한 아오미네지만 우후죽순으로 자라난 연잎덤불은 그의 머리끝까지 닿아 있었다. 앞을 막고 있는 줄기를 치우며 아오미네가 인상을 찌푸릴 동안 키세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길이 있는지 요령 있게 덤불을 비켜서 앞으로 나아갔다. 지느러미를 미끄러뜨리며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노란 머리카락의 끝이 보이지 않을까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졌다. 저를 미아로 만들려 짓궂게 구는 것은 아닐까. 기다리란 말은 차마 할 수 없어 아오미네는 마구잡이로 줄기를 헤치며 키세의 뒤를 쫓았다.

 

어느 정도 다다랐을까 외딴섬 같은 공터가 나왔고 앞서 도착해있던 키세가 신고 있던 나무게다를 벗어 한쪽에 두었다. 그리곤 말없이 유카타의 밑자락을 끌어 올렸다. 일꾼들이 하는 것처럼 활동에 편하게끔 옷깃을 말아 올려 매듭을 지자 그 아래로 새하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그 순간 걸음을 내딛기 위해 붙잡고 있던 연꽃의 줄기가 으득 부러지고 흔들리는 눈동자를 남겨둔 채 키세가 물속으로 맨발을 담그었다.

 

제법 깊이가 되니 조심하세요.”

 

 

 

(이어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곧이어 사립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오미네는 돌아보지 않았다. 매듭을 풀어낸 뒤 옷감이 맨살 위로 쓸려 내려가는 부스럭거림에 이어서 참방 물보라가 이는 것이 들려왔다. 아오미네는 묵묵히 불씨를 부칠 뿐이다. 은근한 열기만이 남고 타버린 숯불이 잿더미가 되었음에도 그는 실없는 부채질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순간 뒷목에 투둑 물방울이 튀었다. 천장에 맺힌 이슬이 떨어졌나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자 다시 한 번 물줄기가 등 뒤를 적신다. 지난날 그가 손바닥 위에 연잎을 담아 기울였던 것처럼 익숙한 기시감에 고개를 돌려보니 욕탕 안에서 장난스러운 얼굴을 한 키세가 아오미네를 향해 아이처럼 손가락 끝으로 물방울을 튀기고 있었다.

 

뜨겁지는 않아?”

딱 좋아요. 고마워요, 아오미넷치.”

 

오목한 손바닥에 한 움큼 물을 기어 어깨 위로 천천히 붓는다. 덩달아 모락모락 김이 나는 흰 살이 더할 나이 없이 보드라워 보인다. 또르르 흘러내린 물방울은 동그란 어깨 봉우리 너머로 떨어지기도 하고 움푹 파인 쇄골에 샘처럼 고이기도 하였다. 마른 살가죽 위로 도드라진 굴곡이 안쓰러우면서도 괜스레 화하고 열이 오른다.

 

목 아래까지 푹 담가라.”

 

뽀얀 수증기 속에 아롱거리는 살결이 얄미워 아오미네는 차라리 키세를 물속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신경이 쓰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얹어진 두 손은 마음과 달리 그의 어깨 위를 고집스레 머무르는 것이었다.

 

기분 좋네요.”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마냥 굽어진 무릎 사이를 빈 공간이 없게끔 붙인 채 둥글게 말아져 있던 허리가 따뜻한 물속에서 기지개를 켜듯 뒤로 천천히 젖혀졌다. 다완 속에서 새순의 찻잎물이 노랗게 우러나는 것처럼 긴장이 풀려 한결 녹진해진 몸이 편안하게 등을 기댄다. 물의 온도가 익숙해진 무렵 아직 피로가 뭉쳐있는 딱딱한 언저리를 짚으며 키세가 으읏 작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주물러줄까?”

 

아오미네는 키세가 자신의 어떠한 불순한 의도도 눈치 채지 못하기를 바랐다. 태연스럽게 얹어져 있던 손끝에 힘을 주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반점 하나 없이 정결한 피부를 느릿하게 쥐었다 놓았다. 놓는 순간 그 찰나가 터무니없이 아쉬워져 다시금 손아귀를 구부렸다. 할 수 있다면 계속해서 붙잡고 싶었다. 찰거머리마냥 끈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목욕물이 지나치게 뜨거운 것은 아닐까.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끔거리는 열기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아오미네는 알 수 없다.

 

다행히 기분이 좋은 듯 어깨를 주무르는 동안 키세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오미네에게 온전히 몸을 맡긴 채 티끌의 의심도 보이지 않는다. 제 손 안에서 쉬고 있는 그의 모습에 가슴 한편이 벅차다. 동시에 다른 한편에선 스물 스물 피어나는 욕심이 눈을 가리었다.

 

에도로 가는 길에 나도 함께 가.”

집은 누가 지키고요?”

나리만 에도 구경을 하나. 촌놈도 한번 데려가라.”

안됩니다. 어차피 성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릴게.”

 

조금 굳은 얼굴 표정에는 난처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여전히 희미하게 여려있는 미소에 기대를 걸며 아오미네가 손가락 끝을 장난스럽게 굴렸다. 가망도 없이 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도 아오미네는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턱 아래 휑한 목덜미나 어깨와 겨드랑이로 이어지는 사이 등 간지러움을 태우는 손길에 꼼짝없이 붙잡힌 키세가 온몸을 배배 꼬며 웃음을 터트렸다.

 

 

 

 

 

 

 

 

 

 

 

 

 

 

 

 

부스 위치는 레드존 I-10 이 부스 모냐 입니다!!

 

 

 

 

Posted by 모노님 :

 

 

 

세이렌이라고 했다. 꽃으로 뒤덮인 바위섬에서 신비로운 노래를 불러 선원들을 끌어들여선 배를 난파시키거나

스스로 물에 뛰어들어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신화 속 님프.

 

 

[청황] 바닥에서

 

 

하지만 선원들을 유혹하는 아름다운 님프와 다르게 키세 료타는 남자였다. 이 대목에서부터 아오미네는 그녀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모델 일을 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 정도로 그가 치명적인 마력을 지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는 노래 따윈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을 뿐. 키세 료타의 시선을 온전히 독차지할 수 있는 짧은 순간을 위하여 그녀들은 난간 위에 올라선 것일까. 그것은 죽음을 각오할 만큼, 혹은 정말로 허공 속에 몸을 던질 만큼 가치 있는 것일까. 시시하다. 시시해. 아오미네의 미간이 크게 찌푸려지면서 벌어지는 입과 함께 졸음에 겨운 하품이 새어나왔다.

 

지금까지 세 명의 여학생이 죽었다. 네 명의 여학생이 뛰어내렸고 운 좋게 한명이 나뭇가지에 옷이 걸리는 바람에 화단으로 떨어져 목숨을 건졌다.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었기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들었으나 며칠이 지난 후에도 더 이상 교내에서 그녀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학을 가거나 아니면 완전히 학교를 관두었을지도 모르지만 거기까지는 관심외이다. 하나같이 예쁘장한 얼굴들이었기에 아오미네는 그것이 조금 아쉬웠다. 휴일에 번화가를 걷다보면 헌팅이 적어도 세 번 이상은 들어오는, 남학생들이 몰래 매기곤 하는 외모랭킹의 상위권에 줄줄이 자리했던 여학생들이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세 번째로 뛰어내린 아이는 마이쨩을 닮은 데다 가슴도 제법 빵빵했었는데.

 

재학생이 네 명이나 뛰어내렸기에 학교옥상에는 출입금지 표지판과 함께 자물쇠가 걸렸지만 녀석은 어떻게 열쇠를 구했는지 매번 불길한 장소를 찾고 있었다. 오래된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음과 함께 아오미네가 두꺼운 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에도 키세 료타는 옥상 가운데 위치한 물탱크의 얕은 그늘 아래서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누워 있었다.

 

단잠에 든 모양인지 아오미네가 타박타박 발소리를 울리며 다가가는 중에도 녀석은 움직이는 기척이 없었다. 자세히 보면 들이 내쉬는 숨을 따라 살짝 오르내리는 가슴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아오미네는 어쩐지 키세가 죽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늘 아래 바로 누워있는 흰 피부가 꼭 시체처럼 창백했다. 어쩌다 우연히 복도를 지나칠 때마다 그에겐 누렇게 말라 죽은 풀냄새가 났다. 권태로움에 사무친 노란 눈알이 죽어버린 생선의 것을 하고 의미 없는 시선이 몇 번인가 스쳤다. 갑작스런 여학생들의 죽음보다 가장 먼저 옥상 아래로 뛰어내릴 것 같은 것이 그였다. 언제나 한쪽 발을 허공에 걸친 채 언제라도 쓰러져 떨어질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처럼 위태로웠다. 그렇기에 더욱 괘씸했다. 그녀들이 죽은 뒤에 녀석도 뛰어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야. 치졸한 놈.

 

사람을 넷이나 병신 만들어놓고 잠이 오냐.”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숱이 많은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더니 이윽고 그가 고개를 돌아보았다. 놀라는 기색 없이 키세가 천천히 허리를 세워 상체를 일으켰다. 처음부터 아오미네가 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마른 입술을 한번 쓱 훑어낸 혀가 태연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녀들이 멋대로 증명하려 한 거예요.”

증명?”

“...내 사랑이 이렇게나 커, 키세군. 료타 나는 너를 이만큼이나 사랑해.

그러더니 멋대로 뛰어내려 버렸어요. 등을 떠밀거나 재촉한 것도 아닌데.”

 

감흥 없는 목소리가 건조한 공기와 함께 옥상 위에 작은 돌풍을 만들다 사라졌다. 멀찍이 서선 키세를 노려보던 아오미네의 굳은 입매가 간지러운 것 마냥 꿈틀거리더니 이내 바람이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정말 바보들이네. 악문 잇 사이로 들려오는 음성이 싸늘하게 느껴지던 것도 잠시 키세를 지나친 아오미네가 어슬렁어슬렁 느린 걸음으로 사방이 뚫려있는 옥상의 바깥쪽으로 향했다.

 

도약하듯 단번에 난간 위로 올라선 아오미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벌써 몇 번이고 핏자국이 번졌다가 부랴부랴 지운 시멘트의 흰 바닥이 보인다. 아득하게 멀지는 않지만 사람의 머리가 깨져서 죽기에는 충분한 높이이다. 아래로 숙였던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자 찬바람이 볼가를 스친다. 나부끼는 옷자락과 함께 바로 선 몸뚱이가 바로 땅바닥에 곤두박질칠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 그녀들이 보았을 마지막 풍경. 녀석 또한 이 풍경을 보았을까. 아니 계속 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테지. 비겁한 놈. 고갯짓으로 뒤를 돌아보자 슬쩍 상체만을 일으켰던 키세가 완전히 일어서려는 듯 손으로 바닥을 짚고 있었다. 마주친 눈동자가 늪 속에 일어난 물결처럼 철렁거린다.

 

뭐하려는 거예요, 아오미넷치.”

너도 증명해봐.”

“...위험하니까 내려와요.”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증명해봐. 키세.”

 

나를 향한 네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증명해봐. 옥상 밖의 회색빛이 섞인 하늘을 등진 채 아오미네가 여전히 주저앉아있는 키세를 쳐다보았다. 지금 내 시선은 온전히 다 네 꺼다. 난 끝까지 너한테서 눈을 떼지 않을 거야. 기쁘냐. 언제나 목말라 죽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잖아.

 

, 무슨 소리에요. , ...”

아니면 내가 떨어질까?”

아오미넷치!”

이게 네가 바라던 것 아니냐. 키세.”

 

좁은 난간 위에 올라서고도 흔들림 없이 키세를 주목하며 담담히 말하는 아오미네와 달리 어느새 키세의 어깨는 바닥 위에 두 발을 붙이고도 두려움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떨고 있는 눈동자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가득 고여서 뚝뚝 떨어져 내렸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바닥 위에 동그란 얼룩을 만들다 금세 사라지길 반복한다.

 

나한테 왜 이렇게 잔인해요...아오미넷치...!”

 

순식간에 허겁지겁 달려가는 거친 발소리가 쿵쿵쿵 옥상 가득 울려 퍼지고 필사적으로 뻗어진 손이 허공에서 팔락거리던 옷깃을 붙잡았다. 그대로 아오미네의 멱살을 끌어 잡은 채 키세가 울부짖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에 얼굴이 가득 젖어 엉망이다. 숨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키세를 내려 보며 아오미네의 입술이 비틀린다.

 

넌 그 바보들만도 못한 거야. 시시한 새끼.”

 

 

 

 

 

 

Posted by 모노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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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가 무너지고 물살처럼 밀려온 개화의 봄. 녀석과 자신은 함께 제복을 입었다. 딱 맞게 제단 된 어깨와 가슴 위로 금박의 흉장이 번쩍였지만 빳빳하게 풀을 먹인 셔츠 깃보다 녀석은 전에 입던 하오리가 더 잘 어울려 보였다. 동류의 알파로서 놈은 자신의 친우였다. 주위에서 그렇게 불렀다. 둘 다 여러 장의 배속추천서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그 동안 약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도쿄에서 머무는 마지막 봄이었다.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도시에 숨겨져 있는 홍등가를. 숨어있다 기보단 그것은 틈바구니를 스물스물 기어 다니는 버러지처럼 건물과 건물 사이에, 골목과 골목 사이에 끼어있다. 향락의 극치라고 불리는 요시와라에는 비할 것이 못되고 그의 아류쯤 되는 싸구려천국이라고 봐도 좋겠지. 고르게 정제되지 않은 술이 독하고 양귀비를 흉내 낸 모조품이 판을 치는 곳. 음습한 뒷골목이다보니 당연히 햇빛이 들지 않고 환기와 배수가 되지 않아 곳곳에 물때처럼 피어난 곰팡이를, 누군가 나서 청소하는 일이 없어 먼지와 오물이 쌓인 길바닥을 놈은 이해하지 못한다. 도쿄구경을 시켜달라는 핑계로 일부로 질색할 장소만을 골라 안내를 부탁했으니까.

 

"이게 뭐냐, 아오미네."

"왜 처음 보냐? 완전 쑥맥이구만."

 

풍차라는 거야, 재밌지? 풍차? 돌아가면서 대주잖냐. 사방으로 다리를 벌려 두꺼운 좆을 받아 삼키는 금발머리의 남창을 가리키며 손가락 끝을 빙글빙글 돌리자 갈라진 눈썹이 사납게 치켜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발정난 숨을 토해내며 시뻘건 몸뚱이를 흔들던 사내가 도중에 멈칫하자 기어오르는 뱀마냥 땀이 맺힌 허벅지를 조이며 남창이 꼬리가 긴 눈매를 접었다. 안에, 안에 싸줘요. 어쩐지 뱃속에 열이 고이게 하는 오메가의 목소리. 결국 한참을 박아대던 사내는 졸라대는 남창의 얼굴에 사정하였다. 후두둑 콧대 위에 떨어지는 희묽은 덩어리에 움찔하며 앙탈을 부려대면서도 촉촉하게 젖은 붉은 혀를 뺴내어 묻은 정액을 맛있게 핥아 먹는다. 애액으로 질척거리며 벌름거리는 구멍엔 박는 놈이 바뀌었다.

 

소리내어 헛구역질만 하지 않았을 뿐 소태라도 씹은 듯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이 비틀렸다. 굳이 더 찔러보진 않았지만 물정 모르는 순진한 도련님이 쫄았다는 것 정돈 알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집 마나님한테 잘 말해줘. 양산 아래서 레이스장갑을 끼고 가꾸는 호화로운 정원이 아니라 하나뿐인 아들이나 좀 불러달라고. 슬슬 이곳이 지루해지고 있었다. 도쿄에서 즐길 마지막 볼거리는 이걸로 충분하다. 사츠키 너도 봤어야 했는데. 카가미 타이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 새끼 짓고 있는 표정이 정말 병신같았거든.

 

 

 

 

 

< 기만의 봄 > 

 

 

 

 

 

"키세를 살 거야."

"그게 누군데."

 

내일이면 도쿄를 떠나 본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건 유학이 아니라 유배지. 짐을 챙기는 것은 하인에게 맡기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늘어져 있던 무렵 낯선 이름이 들려왔다. 든든하게 점심식사를 마친 후였다. 나른하기 짝이 없는 심드렁한 목소리에 놈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맛 좋은 술이 있다면서 네녀석이 끌고가서 보여주었잖아? 결국 술은 한모금도 못 마셨지만.

 

그제야 어렴풋 금발의 남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깟 남창 이름 알게 뭐야. 그렇게 한가하면 고양이새끼나 주워와라. 애완동물이라면 차라리 그쪽이 낫지. 그렇게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눈을 감으려는데 우연히 마주친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정말로? 그래. 올곧은 시선이나 단호한 입매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그야말로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데려와서 어쩔 건데?"

"우선 씻긴 다음에 식사라도 제대로..."

"그 남창에게 네 좆을 박을 거야?"

 

오메가 뱃속에 네 정액을 쏟아 넣을 거야? 임신할 때까지? 말아 올라가는 입술이 내뱉는 노골적인 투에 구김없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고고한 샌님처럼 굴때마다 구역질이 난다고. 똑같은 알파 주제에. 팔에 머리를 베고 누운 상태로 눈길만 들어 놈을 올려다 보았다. 이쯤하면 주먹을 휘두르지 않을까 싶었다. 유순한 녀석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참을성은 없었다. 부족한 말주변보다 뻗는 손이, 생각보다 마음이 먼저 향한다는 점만큼은 서로 비슷했다. 그림자를 드리우며 내려다 보는 시선이 제법 섬뜩해졌다고 느끼며 본능적으로 움켜쥔 주먹에 힘줄이 곤두서던 찰나 푹 내쉬는 한숨소리를 뒤로 나지막한 울림이 들려왔다.

 

"키세를 그렇게 말하지 마."

 

간질이듯 부들부들 떨리던 입가를 참지 못하고 기어코 커다란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쉬워 죽겠다, 역시 사츠키 너도 이 병신같은 표정을 봐야하는 건데. 허리를 구부려 배를 잡고 조금은 유난스럽게 웃으면서 한편으론 놈이 데려올 고양이의, 금발 남창의 이름을 낮게 되새겨 보았다. 혀안에 감기는 느낌이 낯설면서도 감칠맛처럼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어쨌든 하인을 다시 불러 짐을 풀어야지. 이제 막 도쿄가 즐거워지는 참이었다.  

 

 

 

* * *

 

 

 

다이쨩이 도쿄에 계속 머문다는 소식에 어머님은 기뻐하셨어. 돌아오면 분명 무신경한 군홧발로 정원의 잔디를 전부 짓이겨 놓을 테고 그 커다란 덩치로 여린 순이나 가지들을 단숨에 꺾어버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셨거든. 대신 도쿄에서 카가미군과 함께 더 많은 것을 배우길 바란다고 말씀하셨어. 어머님은 아직 다이쨩이 어린 아이처럼 보이시나 봐. 정원에는 어제 장미묘목을 심었어. 오키나와에서 특별히 공수해온 것인데 듬뿍 사랑 받은 만큼 분명 예쁜 색으로 피어날 거라고 잔뜩 기대하고 계셔. 다음 편지에는 꽃잎도 함께 동봉할게. 오후의 햇빛을 닮은 노란색 아이야.  

 

모모이가 보낸 편지를 대충 갈무리해 넣으며 그는 걸음을 옮겼다. 하이칼라라고도 불리는 신식의 취향이 그대로 담긴 고향 저택과 달리 카가미家의 정원은 혼마루의 옛 풍경이 그대로 남아있다. 계곡을 닮은 산수경석과 닦아놓은 듯 반짝이는 수석. 연못 사이를 가로질러 아치형의 돌다리가 놓여있고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을 빙 둘러 붉은색 잉어가 한가로이 노닌다. 고즈넉한 풍류에 대해선 이해할 수 없지만, 유년시절 장난에 지친 녀석들은 바람에 울리는 풍경소리를 들으며 그늘진 마루 위에서 잠들곤 했다. 별안간 떠오른 기억에 멈춰서 있던 때였다. 저만치서 부스럭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척은 그의 시야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아른거리는 것을 쫒아 아오미네가 고개를 돌렸다. 오후의 햇빛을 닮은 색. 실처럼 가는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반짝인다. 굳이 보지 않아도 장미 꽃잎의 색깔을 쉬이 떠올릴 수 있었다. 아래는 아무것도 신지 않은 채였다. 새하얗게 헐벗은 발이 연두빛 잔디 대신 양탄자처럼 깔린 보드라운 이끼를 밟으며 얕은 자국을 남기었다.

 

녀석을 사온 날, 카가미는 고운 천의 유카타와 게다 한 켤레를 사왔다. 향초 몇방울을 떨어트린 따뜻한 물에 뒷골목의 지저분한 땟국과 비릿한 냄새를 닦아내고 벌벌 떠는 살결에 손수 유채기름을 발라주었다. 홀쭉한 가죽에 사내들의 정액이나 받아먹던 녀석은 요며칠 사이 뽀얗게 살이 올라서 반질반질한 피부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치장을 어색해하는 고양이처럼 녀석은 옷을 입는 것을 싫어했는데 그럴때마다 카가미는 흘러내린 옷깃을 단단히 추스려주며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맞닿은 온기에 마음이 놓였는지 조금씩 날이 섰던 눈꼬리가 풀어지고 쭈뼛거리던 기색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놈의 등에 두 팔을 감으며 안겨들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펑퍼짐한 소데를 휘적거리며 돌아다니는 꼴에 잠시 후면 팔불출같은 잔소리가 따라 붙을 터였다. 벌써부터 귀안이 울리는 기분이라 아오미네는 새끼손가락을 세워 마른 귓구멍을 후볐다. 그러자 펄럭이는 유카타 자락의 소리가 더욱 선명히 들려왔다. 벌어진 품 사이로 보이는 피부는 잘 반죽 된 밀빛이다. 그 아래 조그맣게 곤두선 젖꼭지가 발갛게 익어있었다.

 

좀 더 밑으로 내려가면 마른 허리와 말랑한 살이 숨어있는 허벅지 안쪽에 아직 아물지 않은 생채기와 누군가 씹어놓은 잇자국을 따라 보라색 멍이 남아 있다. 카가미가 투박한 손가락 끝에 약을 덜어 발라줄 때 옆에서 보았다. 멍하니 시선을 던져두던 무렵. 순간 눈이 마주쳤다. 목덜미를 살짝 덮는 머리카락의 색만큼, 입안에서 가볍게 발음되는 이름을 따라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멈칫하던 모습도 잠시 숱이 많은 속눈썹을 내리깔며 키세가 웃었다.   

 

사흘 전. 손가락 끝에 걸린 나무게다가 아슬아슬했다. 맨발로 아치형의 돌다리 위를 걸으며 휘청거리는 녀석의 뒷모습이 퍽 우스웠지만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쳤다. 부딪쳐왔다. 꼭 지금처럼. 아오미네 시야안에 발광하는 노란빛이 걸려들었다.

 

쩌억 하품을 하며 기둥에 등을 기댄 채 기지개를 펴던 그때 풍덩 물보라를 일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눈길을 돌려보니 잉어가 노는 작은 연못에 게다 두짝이 빠져있었다. 돌다리 위에 걸터앉은 녀석의 뾰족한 발끝이 수면 위를 톡톡 두드리며 작은 파동을 그렸다. 곧이어 그 모습을 발견한 카가미가 연못에 들어가 게다를 건져왔다. 허겁지겁 뛰어든 군화를 비롯해 금세 물기를 빨아들인 제복의 밑단이 무겁게 젖었지만 개의치 않아했다. 하인이 수건을 가져올 때까지 커다란 두 손으로 하얀 발을 감싸쥐고 끌어안듯 어루만졌다.

 

문득 떠오른 풍경에 덤덤하던 눈매가 가늘어졌다. 고루 깔린 이끼를 짓이기며 한걸음 한걸음 묵직한 걸음이 저도 모르게 키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망치는 움직임은 없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싸늘하게 식은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 볼 때까지도 마주친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바위처럼 단단한 주먹이 떨리던 그때였다. 싱긋 미소 짓는 붉은 입술을 따라 감출 생각이 없는 단내가 코끝에 물씬 끼쳐왔다. 머릿속이 절로 아찔해지는 농익은 냄새이다. 

 

아오미네는 녀석의 안에 남아있을 카가미의 정액을 떠올렸다. 뱃속을 가득 채운 알파의 진한 정액. 동류의 씨앗. 샛노란 눈동자 속에 어려있는 우월감. 오르가즘 마냥 도취 된 표정. 명백하기 짝이 없는 조소. 천연한 기만. 오메가 주제에. 암컷 주제에.

 

 

 

* * *

 

 

 

다이쨩 어머님이 울고 계셔. 장미군락이 만발한 것까진 좋았는데 어느새 옆 화단까지 가시덤불이 뻗쳐서 다른 꽃들이 죄다 죽어버렸지 뭐야. 아무래도 비료를 너무 많이 준 탓이 아닐까 싶어. 향기가 진한 터라 벌이나 나비가 끊이질 않고 흩날리는 꽃가루 때문에 기침이 멈추질 않아. 전에 말한대로 편지 사이에 꽃잎을 함께 끼워 보냈어. 색이 참 곱지?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야. 어머님이 무척 화를 내셨거든. 날이 선 가위를 꺼내서 노란색 탐스러운 장미송이들을 전부 잘라버리셨어. 아름답지만 그만큼 괘씸하다고 말이야.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어.

 

 

 

 

 

 

 

 

 

 

 

 

 

이게 뭘까...난 여기서 턴을 마치겠다(노양심

Posted by 모노님 :

 

2LDK

2 Living Room, A Dining Room, A Kitchen &

2 Men, Love/Die/Kill

 

 

[R-19 / A5 유광코팅 / 55p / 카피떡제본 / 5,500원 ]

 

7월 서코 양일 C28에 청황소설 소량 챙겨갑니다~

테이코 졸업 후 현대배경AU로 동거하는 아오미네와 키세가 시리어스하게 싸우고 시리어스하게 합니다.

표지디자인은 유유님(@youu_u002)께서 수고해주셨습니다.

재고분을 가져가서 수량조사는 받지 않습니다~

 

 

 

 

 

 

 

 

 

<<SAMPLE>>

 

 

 

 

지나침이 좋다. 그보다 더한 것은 더 좋다유희와 관능을 사랑하는 돌체와 가바나의 명언이다.

예술적인 모티프와는 상관없이 그것은 어쩐지 한도를 정해두지 않은 면죄부처럼 들려져서 전부터 마음에 들어 했다.

 

경박하지 않으면서도 트렌디한 하우스뮤직과 화사한 빛의 굴절 아래 셀렉트 숍 한쪽에 마련 된 거울 앞에서 금발의 청년이 전신을 비춰보았다. 1960년대 리조트웨어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늘씬하니 날렵한 실루엣을 감싼 프리다 지아니니의 블루 수트는 흰 발목을 드러내며 적당히 길이 든 여름용 로퍼와도 그럴싸하게 어울린다. 휴고보스의 묵직함과 에르메스의 고상함도 좋지만 뭇 여성들의 시선을 받을 법한 화려한 외모와 잔 근육이 보기 좋게 잡힌 시크한 스타일에는 역시 디올이나 지방시와 같이 딱 맞게 피트 된 수트가 제격이다. 여기에 시침의 로즈골드와 딥블루가 포인트인 제니스의 오토매틱 시계만 있다면 완벽할 텐데.

 

넓은 공간을 활용하며 진열대와 벽면 전체가 화이트로 칠해진 심플한 디자인의 셀렉트 숍은 편집매장과 달리 여러 브랜드를 갖춰놓아 쇼핑에 편리하다. 톰포드의 사각프레임 선글라스를 한번 썼다가 내려놓곤 위스키를 닮은 아라미스 클래식을 집어 들었다. 썩 마음에 드는 향은 아니지만 협찬사의 간곡한 부탁에 마지못해 뿌렸던 기억이 있다. 맞대어 부빈 손목의 맥박 근처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향은 바짝 태운 몰트위스키 마냥 무거워서 여전히 탐탁지 않았다.

 

알코올을 닮은 알싸함 때문일까. 순간 시야가 흔들리는 듯싶었다. 빛의 각도까지 치밀하게 계산하여 설치된, 문 밖의 햇살보다 눈부신 인공조명은 이따금 현기증을 몰고 오는 냉방병처럼 무리인 감이 있었다. 아찔한 느낌에 휘청거리는 손바닥이 이마를 짚는다.

그 순간 소리의 흐름이 달라졌다.

매장 안을 울리며 가사보다는 비트와 리듬을 중시하던 하우스 팝에 문득 엇나간 스크래치와 같은 잡음 같은 것이 끼어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꽉 막힌 것을 쥐어짜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꽝꽝 터져 나오는 스피커의 진동을 따라 심장의 박동도 불규칙하게 뛴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반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모스부호의 알림처럼 괴기스러운 잡음은 점차 또렷한 음성의 구조를 갖춰가는 것이었다.

 

--키에-----------료타-―――

 

혹시 키세 료타 아니에요?”

 

난데없는 하이톤의 음성에 바닥을 향해 숙이고 있던 고개가 퍼뜩 쳐올려지면서 간질환자의 발작 마냥 떨었다. 그제야 겨우 숨어있던 노란 눈동자가 밖으로 드러난다. 어두운 카키색 섀도를 펴 바른 줄 알았던 눈두덩은 가까이서보니 살짝 부어있는 것이 갓 멍이 든 자국이었다. 오래 된 페인트칠이 버석버석 갈라져 회색가루가 묻어나는 시멘트벽에 치렁치렁한 웨이브머리를 기대고 있다가 갑자기 허리를 숙이며 다가오는 슬립이나 마찬가지인 원피스 너머로 봉긋한 가슴골이 그대로 보인다. 맞죠? 학창시절에 내가 당신 광팬이었다니까. 갇혀있던 정적을 깨며 현실감 없는 발랄한 목소리에 도리어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가까스로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깊은 한숨이 쉬어졌다. 짙은 화장에도 앳된 얼굴이 제법 귀여웠지만 싸구려 향수냄새와 함께 습관처럼 팔을 감아오는 가부키쵸 카바레 아가씨가 반갑지만은 않다. 유감스럽게도 수용인원수를 고려하지 않은 2평 남짓의 비좁은 쪽방은 왕년의 스타와 열성팬의 재회장소로는 적절치 못했다.

 

아닙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 진짜? 금발에 눈매까지 똑같이 생겼는데.”

 

길게 뻗은 속눈썹의 아래까지 빤히 올려보기에 도망치듯 시선을 피한 것을 질문에 대한 부정이라 여겼는지 숙였던 가슴을 뒤로 젖히며 카바레 아가씨가 중얼거렸다. 하긴 분위기가 좀 다르긴 하네. 그 사람은 뭐랄까, 반짝반짝하는 느낌이었잖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금 묵묵히 바닥을 내려 보자 팔짱을 낀 상태 그대로 어깨에 머리를 기대온다. 자기는 어쩌다 들어 온 거야? , 편하게 아야짱이라 불러주면 돼. 그러니까 나는 말이지, 어찌 알았는지 단골손님 와이프가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간통죄니 뭐니 하면서 난리를 치는 거야. 내가 미쳤다고 그런 배불뚝이 아저씨를 진짜로 좋아하겠어? 나도 홧김에 머리가 확 돌아서사실 나 이번이 세 번째야. 저기 앉은 순경아저씨도 이제는 내 얼굴을 알아보지 않을까?

 

아야짱에겐 미안하지만 이야기 중 어느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쇠창살이 드리워진 감옥-정확히는 유치장이지만-안이란 거 화보촬영 이후로는 처음이다. 퇴폐적인 콘셉트로 진행되었던 화보는 당시엔 쑥스러움도 많이 탔고 어색한 듯싶었으나 도리어 미완의 성숙이 자아내는 섹스어필이라는 평을 들으며 신인임에 불구하고 권두에 실렸던 것이다. 당시 광팬이라 했으니 어쩌면 아야짱도 그 화보집을 구매했을지 모른다. 흐음, 아직까지 갖고 있다면 사인 해줄 수도 있는데 말이지. 우스운 생각에 입가를 비틀던 것도 잠시, 영사기를 도는 필름처럼 재생되던 기억이 어느 장면에 다다르자 시야가 뭉개지면서 노이즈가 일었다. 파르르 눈에 띄게 떨리는 입술을 저도 모르게 꽉 깨문다. 다신 떠올리지 않기로 했으면서. 너덜해진 표면에서 비릿한 쇠 맛이 느껴지는 와중에도 아야짱의 칭얼거림 섞인 한탄은 계속 되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굉장히 거슬린다.

 

문득 느껴지는 기척에 아야짱이 슬쩍 곁을 돌아보았다. 표적 없이 멍하니 시선을 던져놓은 채 내내 꾹 입을 다물고 있더니만 어느새 그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것이었다. 어느새 반전된 분위기 속에 단백질인형의 텅 빈 눈알처럼 건조하던 것에 묽어진 기운이 가득 어린다. 꼬리가 긴 눈매로부터 뚝뚝 떨어지는 점성 짙은 유혹에 두근 카바레 아가씨의 가슴마저 뛴다. 수면 위로 올라온 금붕어같이 뻐끔거리는 루즈가 번진 입에선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았다. 좀 전부터 타박타박 차가운 복도를 울리며 걸어오는 구두소리가 이쪽을 향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걸 알았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아졌다. 아무렴 어때. 만지면 사락 가벼운 소리가 날 것 같은, 바싹 말라 올이 가는 금발은 낯설지가 않다. 그윽한 남녀의 분위기 속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지고 촉하고 닿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눈을 감은 아야짱의 부드러운 입술을 막 깨물려던 찰나였다.

 

묵직한 구두소리는 그들의 앞에서 멈추었다. 눈동자만을 슬쩍 흘기자 장신의 그림자가 투박한 철장을 넘어 드리워져 있다. 동시에 역류하던 감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밀착하던 움직임이 우뚝 멈춰 서자 날이 선 발톱을 박아 넣듯 매서운 시선이 꽂혀든다.

 

계속 해봐.”

 

소름끼치도록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아오미네의 것이다.

 

 

* * *

 

 

한잔 두잔 그 다음부턴 흥에 취해 들이킨 술에 미열이 나는 듯싶었다. 현기증처럼 머리가 어지러운 것은 아니고 과거 조르고 조른 1on1 후에 몸이 달은 그때처럼 딱 기분 좋게 가쁜 숨이 쉬어지는 정도. 어떠한 꿈도 꾸지 않은 채 깊이 잠들 수 있고, 다음날 숙취 없이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달큰한 느낌의 나른함.

 

괜찮은 꼬치 집을 알고 있다기에 2차로 향하는 동안 긴장이 풀린 모양인지 어깨를 치대는 것을 아오미네는 밀어내지 않았다. 밤공기를 타고 들려오는 밉지 않은 핀잔과 가끔씩 휘청거리는 몸을 받쳐주던 건성건성 한 부축. 어깨동무를 하려던 손이 미끄러졌지만 그래도 가볍게 느껴지는 걸음에 늦장부린 벚꽃이 피어난 수로를 따라 산책이라도 하는 듯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때로는 나란히 걸었다.

그렇게 골목을 벗어날 무렵 그가 먼저 룸메이트의 얘기를 꺼낸 것이다.

 

에엑 괜찮겠어요?

요새 역세권은 원룸을 구하는 게 더 어려워. 방은 하나씩 쓰면 되고 둘이 살면 생활비도 굳고 나쁘지 않겠지.

 

느닷없는 제안이었지만 그럼에도 즐겁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럼 매일 매일이 합숙이나 수학여행 같을 것 가타. 꼬부라진 혀에 마지막 발음이 샜지만 부끄럽지 않았고 덕분에 다음 화제는 테이코시절 다사다난 했던 농구부 합숙으로 이어졌다.

 

기어코 3차까지 이어진 술자리는 가게 문을 나설 때만 하더라도 걸음이 조금 비틀거릴 뿐 멀쩡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는 안개라도 낀 마냥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숙취에 시달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역시 과음이었던 모양인지 부대끼는 속에 이틀을 꼬박 앓아누웠다. 다음날 번호를 주고받았던 아오미네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계속 눅눅한 냄새가 나는 베개에 얼굴을 박고 있었을 것이다.

 

넉넉한 2LDK에 내부설비도 완벽합니다. 신주쿠 역까진 도보로 10분 원내, 도쿄 역까지도 JR선과 오에도선을 타면 환승이 가능하고 단지 근처에 슈퍼마켓이랑 공원도 있어서 생활하기 쾌적하실 거예요. 차를 타고 조금만 나가도 대형시가지라 주말 쇼핑에도 안성맞춤이죠. 아니 뭐, 남자 두 분이 사실 거니까 가장 좋은 점을 알려드리자면 이만큼 저렴한 방세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거죠!

 

다짜고짜 아오미네가 키세를 끌고 간 곳은 다름 아닌 부동산이었다. 크지 않은 건물외관에 비해 담당자는 제법 수완이 좋았다. 추천받은 아파트는 두 개의 방과 발코니 창문이 트인 거실. 그리고 식당과 부엌이 하나로 연결된 복합구조로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망설임 없이 아오미네는 현장에서 바로 입주신청서를 휘갈겼다. 손을 내저을 새도 없이 명의엔 나란히 두 사람의 이름이 써지고 그야말로 속전속결. 화를 내려 했지만 뻔뻔한 얼굴에는 어떠한 반대의 여지도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평일에는 아오미네가 경찰일로 바쁜 터라 결국 입주 전 주말에 살림살이를 사러갔다. 적당히 천엔마트를 한 바퀴 돌고나니 웬만큼 구색이 갖추어져서 그다음엔 자연스레 언젠가의 하교 길 마냥 패스트푸드 점으로 향했다. 아오미네와 함께 있으면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과거로부터 흐른다. 슬픈 것도 괴로운 것도 없이 마냥 우스웠던 그때로.

 

아오미넷치 벽에 붙일 포스터는 역시 마이짱?

너는 보나마나 네 사진일 테고.

 

데리버거를 크게 한입 베어 물며 그가 심술궂게 웃었다. 곧바로 대답을 하진 않고 대신 들고 있던 컵을 입가로 가져갔다. 곁들여 주문한 아메리카노는 싸구려원두의 탄 맛이 나서 입안이 씁쓸해졌다.

 

설마, 남는 것 있으면 나도 한 장 줄 수 있나하고.

 

 

* * *

 

 

아오미네의 차는 미쓰비시의 오프로더이다. 특유의 큼지막한 디자인은 빽빽한 도심 속에서도 야성의 눈을 가진 그와 파트너 마냥 어울렸지만 오래된 디젤엔진은 슬슬 걸리는 소음과 함께 검은 연기를 호소하고 있었다. 차 좀 바꾸지. 니가 뽑아줄 거 아님 닥쳐. 차 사준다는 여자 없어요? 무슨 개소리야? 비슷한 대화가 이것으로 세 번째였다. 터덜터덜 서를 나오는 걸음이 방향을 잡기도 전에 아오미네가 키세의 뒷목을 억세게 잡아채더니 오프로더의 조수석에 쑤셔 박았다. 경찰주제 안전벨트도 매지 않고 부르르 차체의 진동과 함께 시동이 걸린 바퀴가 예열도 없이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이러지 않아도 딱히 갈 곳도 도망칠 곳도 없는걸.

 

차창 너머로 해질 무렵의 신주쿠가 간판의 불을 밝히며 기나긴 밤을 준비하고 있었다. 밤과 낮의 인구 수차가 상이하다는 일본 최대의 번화가는 비즈니스와 유흥의 중심지답게 우후죽순 세워진 고층빌딩의 숲에서 거리는 개화의 절정기를 맞은 듯 암술과 수술을 둘러싼 수 겹의 꽃잎을 닮은 네온사인으로 만발하였다. 아름답지만 그만큼 부질없는 것이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대량생산처럼 단기간에 부랴부랴 지어낸 조립식 건물들은 철골을 땅에 박지 않아 어째 모두 기울어져 보이는 것이 위태로웠다. 세금을 끌어 써도 보수비용을 메우지 못한 낡은 다리는 철거작업조차 하지 못한 채 도시의 유령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지워졌다. 위장된 눈속임들. 여태 지나쳐온 모든 풍경이 그러했다.

 

거품이 터지던 당시 미쓰비시도 흔들렸다. 3천억 엔 규모의 부동산 재벌이었던 인기가수 센 마사오는 이제는 악단도 없이 가라오케 반주에 맞춰 노래하며 공연 후 복도에서 자신의 테이프를 쌓아놓고 판다고 한다. 세련된 마천루가 즐비한 니시신주쿠를 지나 히가시신주쿠만 들어서도 주위의 풍경이 달라진다. 현란한 불빛을 등지고 숨겨진 어두운 골목과 그보다 더욱 음습한 아귀를 벌리고 있는 불길한 밤의 도시. 가파른 수직선을 그리던 기이하기 짝이 없던 번성과 몽상가의 꿈처럼 한순간에 아스라진 붕괴의 흔적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상흔처럼, 그럼에도 신경 쓰지 않는 반점처럼 곳곳에 남아있었다.

 

하암, 피곤한 모양인지 눈물이 맺히면서 하품이 나왔다.

실은 전부 얼마 전에 방송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내용이다. 채널을 돌리고 싶었지만 옷더미에 깔린 리모컨을 찾을 수 없어 마지못해 보았다. 인공위성을 통해 중계되는 지구 반대편의 이야기처럼 동화되지 못하는 위화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키세 료타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센 마사오는 누군지도 모른다.

 

신호를 기다리는 도로는 그야말로 러시아워. 본네트가 닿을 만큼 앞 차량 꽁무니에 바짝 붙어서는 것을 보며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만으로 발음해보았다. 버블. 귀여운 어감이다. 버블버블. 그때 팟하고 오렌지색 불이 켜졌다.

 

 

 

 

 

 

 

 

 

부스위치는  1관  C28 입니다

부스명 : 핫식스레드불 구금책이니 구매시 신분증을 꼭 챙겨와주세요!!

문의사항은 트위터 @mono9124로 부탁드립니다~

 

 

Posted by 모노님 :

 

 

 

순례

[R-19 / A5 / 90p / 카피떡제본 / 7,000원]

4월 27일 초코바나나 행사에 2월 서코에서 나왔던 쿠로바스 청황AU 구간 소설을 함께 챙겨갑니다.

집시키세, 모브키세 소재. 19금 수위본으로 구매 시에는 신분증 제시를 부탁드립니다.

표지는 토마토(@rusiatiny)님께서 수고해주셨습니다.

 

 

 

 

<<SAMPLE>>

 

 

 

 

바람에서 봄과 여름의 냄새가 난다.

 

오월의 끝자락을 맞아 언덕은 구름 한 점 없는 햇볕을 쬐고 있다. 건반모양의 침목을 따라서 놓여 진 철제의 궤도 너머 우거진 수풀은 가물거리니 알아보기가 어려웠지만 적당히 기억 속의 유실수들을 대입해본다. 크고 흰 것은 올리브나무이고 그에 반절만한 녹색의 덩굴은 야생의 포도나무이다. 솎아주지 않은 가지가 제멋대로 뻗어있으나 여름에는 탐스러운 송이를, 겨울에는 알알이 들어찬 자흑색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처마의 그늘을 벗어나 앞으로 걸음을 내딛다 그만 구두의 굽이 닳아버린 석재모서리에 미끄러졌다. 금세 균형을 잡아 넘어지진 않았지만 간격이 넓지 않은 낡은 철로는 제법 위험하다. 그러나 열차가 다가오는 기색은 없었다. 건너편의 과실나무에 문득 이른 아침 끼니를 때우기 위해 먹었던 볼품없던 스콘이 떠오른다. 본래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열차의 식당 칸에 구비되어 있는 보졸레누보를 개봉하고 있을 터였다.

 

철이 들 무렵 아오미네는 생시르의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중요한 시기에 명문가의 도련님이 병정놀이에서 졸업하지 못했다며 수군대는 이들도 있었지만 장기간의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숙부는 흔쾌히 그것을 허락했다. 힘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 언젠가 도망칠 수 없는 때가 오기 마련이란다, 다이키. 생시르로 향하는 짐은 지극히 간소했다. 도망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모든 것은 그대로 남아 그를 기다릴 것이다.

 

사관학교에서의 생활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고된 훈련이나 야전 행군 같은 것은 도리어 적성이다 싶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서 아오미네는 이미 여러 장의 배속추천서를 받은 상태였다. 새삼 놀라울 것은 없었다. 그동안의 자신을 가둔 온실의 천장이 터무니없이 낮았을 뿐이다. 소년의 앳된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이 단단하니 매끄럽게 태운 전완근 만큼이나 완연하게 자라난 청년은 만인의 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승진가도를 보장받은 젊은 유망주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안타깝게도 시판되지 않는 구형리볼버나 은제총알 같은 부류였다.

 

비운의 화가가 사랑했다는 아를의 구시가를 찾은 것도 그 이유이다. 불과 사흘 전에 사관장교의 훈장을 하사받고 저택으로 돌아와 여독을 풀 새도 없이 프로방스로 향했다. 나무랄 것이 없이 훌륭한 은세공의 산탄총이었지만 그가 찾아 헤매는 물건은 아니었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역시 기운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어 로마시대의 원형경기장도 둘러보지 않고 파리로 돌아가려던 계획이었다. 그들의 빈정거림대로 여전히 병정놀이에서 졸업하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인근 바다의 기분 좋은 습기와 오렌지색 태양의 수혜를 받으며 살아가는 휴양지의 주민들은 대개의 일상이 느긋한 감이 있다. 천해의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그들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바캉스나 요양지로 유명한 남동부와 달리 북부 도심출신인 아오미네의 성미엔 맞지 않는 것이다. 헤죽거리는 얼굴이나 느릿한데다 감탄사가 많은 화법도 소통에 방해가 될 뿐이다. 마차를 세우는 굳은 표정의 그를 조급한 관광객 쯤으로 여겼는지 여유낙락 한 웃음을 짓던 마부는 아오미네를 인적조차 드문 간이역에 내려주고 떠나버렸다. 그리고 수 시간 째 기차는커녕 화물차 한 대도 지나가지 않는 것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아오미네가 다시 붉은색 지붕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왔다. 대합실이랄 것도 없이 늘어선 석회기둥 사이로 칠이 벗겨진 철제 벤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오래된 간이역은 소박한 운치가 있었지만 현재의 그에게는 막막한 장소일 뿐이다. 마르는 입술에 목울대를 조이던 어두운 색의 크라바트를 한 손으로 넉넉히 끌러 내린다. 불쾌한 기색의 인상은 온도가 낮은 눈동자와 썩 잘 어울려 보인다. 스르륵 벤치에 앉으려던 자세를 세워 곧은 선의 고개를 돌린다. 무의식의 하대가 편하게 흘러 나왔다. 그래도 아직은 치기의 티가 남아있다.

 

아무도 없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머뭇거림에 이어서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누구 안 계십니까?”

 

응답을 기다리며 머릿속으론 지나온 길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불가능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만사가 귀찮아진 마음에 이번에야 말로 털썩 엉덩이를 주저앉으려던 찰나, 피식 입술 사이로 공기가 새어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은하게 지나가는 실바람처럼 희미한 미소가 스쳐지나간다. 여태 숨을 죽이고 있었는지 그제야 옷감이 쓸리는 부스럭 소리와 함께 움직이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타박타박 구두 굽에 힘을 주어 아오미네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다가갔다. 멀지않은 기둥의 반대편으로 조금 돌아서자 미처 살펴보지 못한 사각에 바닥을 깔고 앉아있는 인영의 모습이 있었다. 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영아의 손바닥만 한 담쟁이 이파리는 흩날리는 석회가루를 뒤집어써 은빛 월계수처럼 보인다. 성화 속 상아로 만들어진 아치에 의지하듯 몸을 기댄 이가 쓰고 있는 순백의 미사포가 더욱이 그러하다.

 

미사를 드리고 오는 길이라 하기엔 오늘은 주일도 아니거니와 교인 치고는 행색이 자유롭다. 밑단에 거품방울처럼 수수한 자수가 새겨져 있는 미사포는 목덜미를 덮고 내려와 어깨부근에 닿는다. 등 뒤로 흘러내리는 탐스러운 머리칼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어 동그란 두상 외에 드러나는 것은 지푸라기의 잔 부풀 같은 머리카락 끝과 드리워진 그림자 너머 조그만 콧망울 뿐이다. 호리하지만 굵은 뼈가 불거진 손목이나 얇은 윗옷 너머 벌어진 가슴이 평평한 것을 보고 아오미네는 그가 남성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그 외에 무엇도 알 수 없는 수상한 인물을 가늠해보듯 주름진 미간이 깊어진다.

 

대답하지 않은 것에 화가 났나요?”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한 성인남성의 것이다. 그는 즐거워하고 있는 것일까. 마치 십대의 소년처럼 가벼운 한마디에도 혀를 구르는 웃음소리가 스며들어있다. 그것이 거슬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적당히 들떠있는 쾌활한 기운은 프로방스를 부유하는 두근거림과 닮았다

 

아오미네의 반응을 기다리는 대신 그는 한쪽에 놓여있던 나무악기를 꺼내들었다. 모과열매를 반으로 쪼개놓은 듯 불룩한 통 위에 놓여있는 여러 개의 현은 만돌린 기타와 유사하다. 코가 닳은 낡은 신발과 어떠한 향토도 묻어나지 않는 어투는 뚜렷한 거처 없이 전국을 유랑하는 집시의 특색과 같았다. 굳은살이 박혀있어 끝이 뭉특했지만 길고 가느다란 마디의 손가락이 팽팽하게 당겨진 현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들려오는 소리는 작은 울림판 치고는 깊고 풍부한 음역을 낸다. 현을 튕기며 이어진 연주 속에 집시가 노래하기 시작했다.

 

나의 간구를 들어 허락하시고 귀를 기울이나니.

오직 사랑으로 가여운 이를 감싸 안으소서.

 

밝은 음색이 불러내는 흥겨운 리듬에 아오미네는 뒤늦게 그것이 성가의 가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장조나 선율 등에 변화를 준 편곡은 가히 파격적이지만 당신의 하해와 같은 자비로움과 같이, 그분께선 낡은 역의 처마 밑을 들여다보시며 보잘것없는 집시를 애써 벌하시진 않을 것이다. 엄숙한 의식에 걸맞은 노래는 한결 가벼워져 즉흥곡의 악보처럼 자유로워졌다. 부드럽게 어루만져진 소리가 속삭이듯 귓가를 간질인다.

 

떠돌이 집시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 때문일까. 나지막한 멜로디는 기억의 고리를 풀고 어쩐지 낯설지 않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떠오를 듯 말 듯 희미한 잔상에 아오미네가 잠시 주의를 돌린 사이 집시는 연주를 마쳤다. 길지 않은 노래였지만 호수표면을 그리는 물결같은 여운은 연주가 끝난 후에도 파동을 겹치며 작은 역 안을 맴돌다 사라졌다. 이후 찾아든 공백의 시간에 그는 잠시 난처한 듯 보였지만 아오미네는 그렇게 인색한 남자는 아니었다.

 

서너번 천천히 부딪쳐지는 손바닥은 나름의 감상을 표하는 것이겠지만 무뚝뚝한 표정으로 두드리는 투박한 박수는 경직된 군인의 모습처럼 어색한 면이 있다. 또다시 들려오는 희미한 웃음소리에 아오미네가 험한 눈초리를 쏘아 보내자 어깨까지 떨어가던 집시가 키득거림을 멈추고 이내 사죄하듯 가볍게 상체를 숙인다. 움직임을 따라 머리에 씌워진 미사포가 얕은 바람에 나풀거려 흰 날개를 부비는 나비 마냥 손을 대면 고운 가루가 묻어날 것 같다.

 

이 근처는 역장이 없는 역이 흔해요. 기차가 서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축제 준비 때문에 오늘은 더 이상 다니지 않을 거예요.”

축제가 있나?”

생트 마리에서 열리는 집시들의 축제지요. 그곳으로 가서 아침에 운행하는 기차를 타는 게 더 빠를 겁니다.

괜찮다면 동행해 드릴 수 있어요.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나리께서 걸으실 수 있다면 말이에요.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또다시 맹랑한 웃음기가 묻어난다.

 

노래를 들어주신 답례예요. 덧붙여지는 목소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잠시 동안 흥미가 동했지만 의뭉스러운 집시의 장단을 맞춰줄 정도로 너그럽지는 못했다. 기차가 서지 않는다는 말에 심드렁한 표정의 아오미네가 방향을 틀어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내내 굽히고 있던 무릎을 펴고 집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멀찍이 내려다 보아야했던 것이 어느새 눈높이를 맞추며 가까워져 온다.

 

누군지 가르쳐줄래요?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서.”

 

굽어있던 상체를 바로 세우자 그림자가 사라지면서 순백의 자수 아래로 본래의 화사한 색을 되찾은 금발이 엿보인다. 반듯한 이마로부터 시작되어 섬세하게 빚어 내린 능선은 깨끗한 미간을 타고 내려와 가까운 거리에서 숨김없는 시선을 보내온다. 겹쳐지는 기억의 잔상이 점점 짙어졌다. 물에 담근 태양처럼 가득히 고여 있는 황금의 눈동자. 기어코 잊고자 했던 이름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떠올랐다.

 

키세이다.

 

 

* * *

 

 

너는 나를 닮았어.

 

젖혀지는 경첩의 소음이 크지 않은 백색의 문으로부터 몇 걸음을 마저 내딛지 않아 침대 곁에 내어진 원형의 나무의자를 두고도 자리를 잡지 못하는 조카를 돌아보며 숙부가 건넨 말이었다. 그는 제법 오랜 시간을 그곳에 서 있었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정적의 시간이 새삼 무겁게 느껴지거나 한 것은 아니다. 침묵은 오히려 보기 좋게 정돈된 소설의 여백처럼 매우 자연스러워서 인쇄된 활자의 떨어진 행간만큼이나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이리 오너라 다이키. 애정이 담겨있는 자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부자연스러운 것이 있다면 별안간 들려온 그것이다.

 

곧장 발을 옮기지는 않았다. 더 이상 친의를 가려내지 못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을 갖지 못했던 그때와는 다르다. 대저택의 지붕을 덮은 색처럼 눈이 시리도록 푸른, 아오미네는 이제 그의 것이다. 자라난 그는 한껏 깊어진 눈매로 침대에 누워있는 숙부를 노려보았다. 경계심은 없었다. 당장에 병실을 박차고 나갈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무덤덤하니 의미 없는 뜸을 들이던 것도 잠시, 그가 움직였다. 오랫동안 쥐고 있어 땀이 고여 있던 손바닥 안쪽의 열이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남자였던가, 자신의 숙부는?

 

양옆에 둘러진 철제 파이프를 붙잡고 시간을 들여 허리를 일으켜 세우는 모습은 거동이 불편한 환자 그 이상에 지나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니 하얗게 세어 푸석한 머리카락에 급격히 살이 빠져 쪼그라든 피부는 얼룩덜룩한 검버섯이 피어있어 볼썽사나웠다. 수년 만에 마주한 숙부는 노쇠했다. 더구나 이름 모를 불치의 질환으로 살날을 얼마 남기지 않은 병든 노인이었다. 의식을 유지한 채 비교적 정확한 발음을 내뱉는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흐려진 시각에 뿌옇게 안개가 끼었을지언정 풀리지 않은 눈초리가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미 백색의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그가 느낀 감정은 실의에 가까웠다.

 

이토록 작고 초라했었나, 자신이 죽이고 싶었던 남자는.

 

본래 옅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던 미간이 눈에 띄게 굴곡지고 밀려오는 허탈감에 새어나오는 한숨을 막으려 텁텁해진 입술을 무는 순간이었다. 가볍게 옷깃이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들어 올려 진 마른 팔이 곧장 뻗어오는 것이었다. 죽어가는 자의 인기척은 망자의 그것처럼 고요하니 음산하다. 눈앞에서 다가오는 노인의 손은 결코 빠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뿌리치기는커녕 피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흠칫 굳은 어깨가 진동하며 주춤하는 사이 뼈대만 남은 듯 말라비틀어진 손가락이 눈두덩이 위에 닿았다. 조금만 힘을 주어 누르면 어렵지 않게 그의 눈을 멀게 할 수 있었다. 병약한 노인에게도 그 정도 여력은 있을 터였다. 호흡 한 번의 찰나 동안 그는 명백한 살의를 느꼈다. 근육에 맞추어 조여진 셔츠 너머로 어느새 맺힌 식은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

 

이 눈은 나의 것과 같다.

 

그러나 놀랍게도, 둥그런 안구 위로 반사적으로 덮어진 얇은 살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거칠 것 하나 없는 움직임은 차라리 애무와 비슷해서 흉흉한 기운은 순식간에 잔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느릿하게 손을 거둔 숙부는 나이 든 노인 특유의 초연함으로 주름 진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뱀의 허물 같은 웃음이었다. 독을 품은 놈은 사라지고 없지만 똬리를 틀고 있던 흔적은 변함없이 흉물스럽다. 곧이어 수상쩍은 웃음이 멎고 색이 죽은 혀가 앞뒤로 움직였다. 그는 직감했다. 놈은 노인의 목구멍 속에 있다.

 

 

* * *

 

 

아오미네 다이키를 이끈 것은 대리석바닥을 울리는 악기의 울림이었다.

 

양 손 가득 벌어졌다 오므라드는 반도네온의 소리를 시작으로 바이올린의 활이 크게 움직였다. 당혹스러운 심장이 갑작스런 충격에 철렁거리듯 거센 박자는 흥겹기보단 긴장의 서막처럼 응접실 안에 울려 퍼졌다. 눈꺼풀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채 핏줄이 선 뻑뻑한 초점은 한 곳에 고정되고, 문고리를 잡고 들어서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아오미네를 비웃으며 불안하던 리듬은 이내 경쾌한 합주로 이어져 도발적인 음색을 쏟아 내었다. 곧이어 카펫이 깔린 계단을 오르는 주인공처럼 넋이 나간 사내들의 무릎을 밟고 어느 젊은 귀부인의 선물임이 틀림없을 푸른 숄을 두른 키세가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붉은색 포도주가 반쯤 담겨있던 크리스털 술잔을 벗은 발로 걷어차곤 원탁 위의 집시가 뒤엉킨 개암나무 가지 같은 양 팔을 들어 올리자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가느다란 끝에는 유채기름에 손질 된 조개모양의 분홍빛 손톱이 반짝인다. 집중되는 이목을 즐기듯 숱 많은 속눈썹 아래 밤 고양이의 샛노란 눈동자가 요사스런 웃음을 짓는다. 얇은 실크의 푸른 숄이 잠자리의 날개처럼 팔랑거리고 정열적인 탱고에 맞춰 춤을 추던 키세가 문득 입고 있던 드레스셔츠의 첫 번째 단추를 풀어내었다. 새하얀 옷깃 사이로 적당히 녹은 치즈처럼 먹음직스런 살결이 드러나자 알코올과 쉰내가 섞인 사내들의 숨이 더욱 거칠어졌다.

 

감정서가 붙은 진품의 명화들이 걸려있는 고풍스런 응접실은 어느새 스트립쇼의 무대로 바뀌어버렸다. 저마다 토해내는 날숨에 공기가 끓어오를수록 그의 피는 더욱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이었다. 지난 날, 천장이 낮고 습기가 묻어나던 해안가마을의 낡은 여관에서 헤진 시트를 끌어 쥐며 힘겹게 울었던 달뜬 신음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단단한 마디의 손가락을 지분거리며 기다란 눈매를 서글피 접었던 애수에 찬 모습은 간데없이 뒤집어쓴 촌극의 가면처럼 쾌락의 신이 된 남자는 명성 높은 부호들을 발치 아래 거느리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느낀 순간, 우연이 아니었는지 부푼 입술이 벌어졌다.

 

나는 음악과 자유를 사랑하는 집시일 뿐이에요, 아오미넷치.

 

소리 없이 불리어지는 낯익은 이름에 그는 철창을 벗어나 새가 날아간 방향을 떠올렸다. 생의 끝에서 절실히 후회하던 숙부의 유언도 이명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무덤의 흙더미를 비집고 나와 찢어진 뱀의 눈이 그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인이 마지막 말과 함께 뚝뚝 흘려내었던 맹독의 저주는 유효한 것이었다. 순백의 베일을 벗음과 동시에 신앙은 담뱃불 속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  *  *

 

 

거리는 뿌연 안개와 함께 하루의 피곤함을 토해내며 잠에 든다. 인파의 북적거림은 사라져 없고 무거운 눈꺼풀을 따라 창문의 걸쇠를 내려 잠근 뒤 도시는 뒤척임 하나 없이 깊은 수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검은 때가 낀 할로겐 등만이 전시된 오브제처럼 스산한 풍경 속을 머무른다.

 

강을 끼고 번창한 도시는 이기로 가득한 신문명의 발상지이지만 음습한 새벽의 기운에 점령당한 고도의 건축물은 뼈대만 남은 폐허의 참상과 비슷했다. 불타버린 바빌론의 종말처럼 희뿌연 굴뚝의 매연과 먼지는 산성의 화산재처럼 도시를 부식시킨다. 어느 고명한 철학자는 작금의 시기를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비유했지만 변혁의 시대를 살면서 그는 세기말의 불안을 예감했다. 피상적인 자율과 실리주의, 천박한 낙천주의 등 종잡을 수 없는 사상의 물살은 넘치는 파도보다 굴곡져 있었고, 뜬구름보다 빠르게 모였다 흩어졌다. 거친 템포의 회색도시에서 스트립쇼가 일색인 벌레스크 극장이나 술잔을 기울이는 홍등가만이 색의 꽃을 피운다.

 

그것이 내가 노래하는 이유입니다. 화려한 사교장에서 우둔한 그들과 한통속이 되기보다는

꽃술이 달린 모자를 덮어쓰고 어릿광대를 연기함으로써 비웃을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는 거예요.

 

수호성녀 사라의 고귀한 영혼을 본받듯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진 않았지만 순백의 미사포 아래 기도의 음성처럼 속삭이던 모습을 보았었다. 전부를 믿었느냐 묻는다면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 대답하겠지만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는 이유는 유치한 자기방어에 지나지 않는다. 온몸을 감싸는 불쾌한 누기 속에서 일사병처럼 순간 시야가 노래졌다. 피부를 짓누르는 마른세수에 정신이 깨인다.

 

매번 조간신문의 흑백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것은 운동세력의 고루한 폭동, 도미노처럼 연이어 무너지는 부도와 유령회사의 범람을 알리는-본문을 읽지 않아도 어림짐작이 가능한-절로 하품이 새어나오는 기사들뿐이다. 그나마 볼만한 것이 맨 뒷장에 위치한 싸구려 가십란이었다. 무기력한 일상 가운데 사람들은 유별난 스캔들을 기대했고 수치를 모르는 금발의 집시는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기에 맞춤이었다. 오페라 극장의 숨겨진 계단을 내려가면 옛 지하성터를 개조한 암시장이 있다. 파리의 음지에서 그의 이름은 이미 유명한 것으로 집시야말로 도덕과 배덕의 산물이었다. 광명의 무대에선 흰옷을 갖춰 입고 프리모로서 낭만주의 음유시인의 가곡을 노래했지만 지하성터의 은밀한 침실에선 어둠을 틈타 쇄골이 파인 어깨를 끌어내렸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 했지만 권위적인 체계가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막대한 부를 누리며 혁명의 주체였던 부르주아는 신흥귀족이 되었고 그들만을 위한 상류층의 에티켓이 완성되었다. 허례의식에 가려진 모자와 부채 뒤로 사람을 사고파는 일이 묵인 하에 계속해서 용납되었고 소년 소녀의 생피를 받기 위해 구시대의 마녀가 만들어낸 철의 새장처럼 폭행과 배설의 지극히 악취미적인 간음의 현장을 고상한 유희 마냥 즐겼다. 광신도의 신앙처럼 쾌락에 굶주린 이들이 집시를 품에 안고, 혹은 집시의 품에서 하룻밤의 천국을 밟는 것이었다.

 

원탁에 올라선 집시를 마주하며 아오미네는 떠올린 것은 뭉크의 석판화였다. 황홀경에 빠진 검은 마돈나는 잉태하는 성녀임과 동시에 낙태하는 매춘부이다. 잘 익은 과일처럼 농밀한 입술은 쾌락의 고통 때문인지 살짝 벌어져 시체처럼 미소 지었다. 관능의 절정을 그리면서 사랑의 죽음을 표현한 화가의 해석을 절절히 통감하면서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관망의 시간은 고문과 같았다. 문의 밖에서 주먹을 떨던 소년은 오래 전에 청년이 되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한없이 어리석게도, 잊고 있었던 무력감이 되살아나 뼛속 깊이 사무쳤다.

 

시계를 보진 않았지만 그에게는 영겁만큼의 시간이 흐른 직후 새벽의 공기를 울리며 쇠문이 밀리는 소리와 함께 극장의 후문으로 누군가 빠져 나왔다. 손을 내저어 휘감기는 안개를 털어내며 고급연미복으로 갈아입은 키세가 아오미네의 앞을 지나간다. 숨 가쁘던 열락을 거두고 샤워를 마친 말끔한 얼굴은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 예상했었다는 듯 버티고 선 모습에도 놀란 기색 하나 없다. 그에 합류하는 일행처럼 자연스레 뒤를 따라붙어 발을 맞추었다. 곁으로 다가서자 간편함을 추구하는 유행에 맞춰 커프스 없이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불긋한 자국이 언뜻 눈에 띈다. 자신에게 향해진 집요한 시선을 눈치 챘는지 입술을 달싹인다. 이제는 가물거리는 유년시절과도 일 년 전의 그때와도 다른 목소리이다.

 

표정이 좋지 않네요, 아오미넷치. 순결이라도 빼앗긴 처녀처럼.”

 

마돈나인가 마리아인가.

본래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조차 그는 어려워졌다.

 

 

 

 

 

 

 

 

신분증 확인 문제로 1인당 1권씩 구매가 가능합니다.

재고를 챙겨가는 것이라 수량조사는 받지 않습니다.

 

 

부스위치는 K5 <청황역세권>입니다.

팔고 싶다 구간...많이 찾아와주세요S2

 

 

 

+ 문의는 아래 덧글이나 @mono9124로 보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Posted by 모노님 :

 

 

2LDK

2 Living Room, A Dining Room, A Kitchen &

2 Men, Love/Die/Kill

 

 

[R-19 / A5 유광코팅 / 55p / 카피떡제본 / 5,500원 ]

 

4월 27일 청황성인배포전 초코바나나에 나오는 아오키세 소설입니다.

테이코 졸업 후 현대배경AU로 동거하는 아오미네와 키세가 시리어스하게 싸우고 시리어스하게 합니다.

표지디자인은 유유님(@youu_u002)께서 수고해주셨습니다.

 

 

 

 

 

 

 

<<SAMPLE>>

 

 

 

 

지나침이 좋다. 그보다 더한 것은 더 좋다유희와 관능을 사랑하는 돌체와 가바나의 명언이다.

예술적인 모티프와는 상관없이 그것은 어쩐지 한도를 정해두지 않은 면죄부처럼 들려져서 전부터 마음에 들어 했다.

 

경박하지 않으면서도 트렌디한 하우스뮤직과 화사한 빛의 굴절 아래 셀렉트 숍 한쪽에 마련 된 거울 앞에서 금발의 청년이 전신을 비춰보았다. 1960년대 리조트웨어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늘씬하니 날렵한 실루엣을 감싼 프리다 지아니니의 블루 수트는 흰 발목을 드러내며 적당히 길이 든 여름용 로퍼와도 그럴싸하게 어울린다. 휴고보스의 묵직함과 에르메스의 고상함도 좋지만 뭇 여성들의 시선을 받을 법한 화려한 외모와 잔 근육이 보기 좋게 잡힌 시크한 스타일에는 역시 디올이나 지방시와 같이 딱 맞게 피트 된 수트가 제격이다. 여기에 시침의 로즈골드와 딥블루가 포인트인 제니스의 오토매틱 시계만 있다면 완벽할 텐데.

 

넓은 공간을 활용하며 진열대와 벽면 전체가 화이트로 칠해진 심플한 디자인의 셀렉트 숍은 편집매장과 달리 여러 브랜드를 갖춰놓아 쇼핑에 편리하다. 톰포드의 사각프레임 선글라스를 한번 썼다가 내려놓곤 위스키를 닮은 아라미스 클래식을 집어 들었다. 썩 마음에 드는 향은 아니지만 협찬사의 간곡한 부탁에 마지못해 뿌렸던 기억이 있다. 맞대어 부빈 손목의 맥박 근처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향은 바짝 태운 몰트위스키 마냥 무거워서 여전히 탐탁지 않았다.

 

알코올을 닮은 알싸함 때문일까. 순간 시야가 흔들리는 듯싶었다. 빛의 각도까지 치밀하게 계산하여 설치된, 문 밖의 햇살보다 눈부신 인공조명은 이따금 현기증을 몰고 오는 냉방병처럼 무리인 감이 있었다. 아찔한 느낌에 휘청거리는 손바닥이 이마를 짚는다.

그 순간 소리의 흐름이 달라졌다.

매장 안을 울리며 가사보다는 비트와 리듬을 중시하던 하우스 팝에 문득 엇나간 스크래치와 같은 잡음 같은 것이 끼어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꽉 막힌 것을 쥐어짜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꽝꽝 터져 나오는 스피커의 진동을 따라 심장의 박동도 불규칙하게 뛴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반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모스부호의 알림처럼 괴기스러운 잡음은 점차 또렷한 음성의 구조를 갖춰가는 것이었다.

 

--키에-----------료타-―――

 

혹시 키세 료타 아니에요?”

 

난데없는 하이톤의 음성에 바닥을 향해 숙이고 있던 고개가 퍼뜩 쳐올려지면서 간질환자의 발작 마냥 떨었다. 그제야 겨우 숨어있던 노란 눈동자가 밖으로 드러난다. 어두운 카키색 섀도를 펴 바른 줄 알았던 눈두덩은 가까이서보니 살짝 부어있는 것이 갓 멍이 든 자국이었다. 오래 된 페인트칠이 버석버석 갈라져 회색가루가 묻어나는 시멘트벽에 치렁치렁한 웨이브머리를 기대고 있다가 갑자기 허리를 숙이며 다가오는 슬립이나 마찬가지인 원피스 너머로 봉긋한 가슴골이 그대로 보인다. 맞죠? 학창시절에 내가 당신 광팬이었다니까. 갇혀있던 정적을 깨며 현실감 없는 발랄한 목소리에 도리어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가까스로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깊은 한숨이 쉬어졌다. 짙은 화장에도 앳된 얼굴이 제법 귀여웠지만 싸구려 향수냄새와 함께 습관처럼 팔을 감아오는 가부키쵸 카바레 아가씨가 반갑지만은 않다. 유감스럽게도 수용인원수를 고려하지 않은 2평 남짓의 비좁은 쪽방은 왕년의 스타와 열성팬의 재회장소로는 적절치 못했다.

 

아닙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 진짜? 금발에 눈매까지 똑같이 생겼는데.”

 

길게 뻗은 속눈썹의 아래까지 빤히 올려보기에 도망치듯 시선을 피한 것을 질문에 대한 부정이라 여겼는지 숙였던 가슴을 뒤로 젖히며 카바레 아가씨가 중얼거렸다. 하긴 분위기가 좀 다르긴 하네. 그 사람은 뭐랄까, 반짝반짝하는 느낌이었잖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금 묵묵히 바닥을 내려 보자 팔짱을 낀 상태 그대로 어깨에 머리를 기대온다. 자기는 어쩌다 들어 온 거야? , 편하게 아야짱이라 불러주면 돼. 그러니까 나는 말이지, 어찌 알았는지 단골손님 와이프가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간통죄니 뭐니 하면서 난리를 치는 거야. 내가 미쳤다고 그런 배불뚝이 아저씨를 진짜로 좋아하겠어? 나도 홧김에 머리가 확 돌아서사실 나 이번이 세 번째야. 저기 앉은 순경아저씨도 이제는 내 얼굴을 알아보지 않을까?

 

아야짱에겐 미안하지만 이야기 중 어느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쇠창살이 드리워진 감옥-정확히는 유치장이지만-안이란 거 화보촬영 이후로는 처음이다. 퇴폐적인 콘셉트로 진행되었던 화보는 당시엔 쑥스러움도 많이 탔고 어색한 듯싶었으나 도리어 미완의 성숙이 자아내는 섹스어필이라는 평을 들으며 신인임에 불구하고 권두에 실렸던 것이다. 당시 광팬이라 했으니 어쩌면 아야짱도 그 화보집을 구매했을지 모른다. 흐음, 아직까지 갖고 있다면 사인 해줄 수도 있는데 말이지. 우스운 생각에 입가를 비틀던 것도 잠시, 영사기를 도는 필름처럼 재생되던 기억이 어느 장면에 다다르자 시야가 뭉개지면서 노이즈가 일었다. 파르르 눈에 띄게 떨리는 입술을 저도 모르게 꽉 깨문다. 다신 떠올리지 않기로 했으면서. 너덜해진 표면에서 비릿한 쇠 맛이 느껴지는 와중에도 아야짱의 칭얼거림 섞인 한탄은 계속 되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굉장히 거슬린다.

 

문득 느껴지는 기척에 아야짱이 슬쩍 곁을 돌아보았다. 표적 없이 멍하니 시선을 던져놓은 채 내내 꾹 입을 다물고 있더니만 어느새 그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것이었다. 어느새 반전된 분위기 속에 단백질인형의 텅 빈 눈알처럼 건조하던 것에 묽어진 기운이 가득 어린다. 꼬리가 긴 눈매로부터 뚝뚝 떨어지는 점성 짙은 유혹에 두근 카바레 아가씨의 가슴마저 뛴다. 수면 위로 올라온 금붕어같이 뻐끔거리는 루즈가 번진 입에선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았다. 좀 전부터 타박타박 차가운 복도를 울리며 걸어오는 구두소리가 이쪽을 향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걸 알았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아졌다. 아무렴 어때. 만지면 사락 가벼운 소리가 날 것 같은, 바싹 말라 올이 가는 금발은 낯설지가 않다. 그윽한 남녀의 분위기 속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지고 촉하고 닿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눈을 감은 아야짱의 부드러운 입술을 막 깨물려던 찰나였다.

 

묵직한 구두소리는 그들의 앞에서 멈추었다. 눈동자만을 슬쩍 흘기자 장신의 그림자가 투박한 철장을 넘어 드리워져 있다. 동시에 역류하던 감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밀착하던 움직임이 우뚝 멈춰 서자 날이 선 발톱을 박아 넣듯 매서운 시선이 꽂혀든다.

 

계속 해봐.”

 

소름끼치도록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아오미네의 것이다.

 

 

* * *

 

 

한잔 두잔 그 다음부턴 흥에 취해 들이킨 술에 미열이 나는 듯싶었다. 현기증처럼 머리가 어지러운 것은 아니고 과거 조르고 조른 1on1 후에 몸이 달은 그때처럼 딱 기분 좋게 가쁜 숨이 쉬어지는 정도. 어떠한 꿈도 꾸지 않은 채 깊이 잠들 수 있고, 다음날 숙취 없이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달큰한 느낌의 나른함.

 

괜찮은 꼬치 집을 알고 있다기에 2차로 향하는 동안 긴장이 풀린 모양인지 어깨를 치대는 것을 아오미네는 밀어내지 않았다. 밤공기를 타고 들려오는 밉지 않은 핀잔과 가끔씩 휘청거리는 몸을 받쳐주던 건성건성 한 부축. 어깨동무를 하려던 손이 미끄러졌지만 그래도 가볍게 느껴지는 걸음에 늦장부린 벚꽃이 피어난 수로를 따라 산책이라도 하는 듯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때로는 나란히 걸었다.

그렇게 골목을 벗어날 무렵 그가 먼저 룸메이트의 얘기를 꺼낸 것이다.

 

에엑 괜찮겠어요?

요새 역세권은 원룸을 구하는 게 더 어려워. 방은 하나씩 쓰면 되고 둘이 살면 생활비도 굳고 나쁘지 않겠지.

 

느닷없는 제안이었지만 그럼에도 즐겁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럼 매일 매일이 합숙이나 수학여행 같을 것 가타. 꼬부라진 혀에 마지막 발음이 샜지만 부끄럽지 않았고 덕분에 다음 화제는 테이코시절 다사다난 했던 농구부 합숙으로 이어졌다.

 

기어코 3차까지 이어진 술자리는 가게 문을 나설 때만 하더라도 걸음이 조금 비틀거릴 뿐 멀쩡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는 안개라도 낀 마냥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숙취에 시달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역시 과음이었던 모양인지 부대끼는 속에 이틀을 꼬박 앓아누웠다. 다음날 번호를 주고받았던 아오미네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계속 눅눅한 냄새가 나는 베개에 얼굴을 박고 있었을 것이다.

 

넉넉한 2LDK에 내부설비도 완벽합니다. 신주쿠 역까진 도보로 10분 원내, 도쿄 역까지도 JR선과 오에도선을 타면 환승이 가능하고 단지 근처에 슈퍼마켓이랑 공원도 있어서 생활하기 쾌적하실 거예요. 차를 타고 조금만 나가도 대형시가지라 주말 쇼핑에도 안성맞춤이죠. 아니 뭐, 남자 두 분이 사실 거니까 가장 좋은 점을 알려드리자면 이만큼 저렴한 방세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거죠!

 

다짜고짜 아오미네가 키세를 끌고 간 곳은 다름 아닌 부동산이었다. 크지 않은 건물외관에 비해 담당자는 제법 수완이 좋았다. 추천받은 아파트는 두 개의 방과 발코니 창문이 트인 거실. 그리고 식당과 부엌이 하나로 연결된 복합구조로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망설임 없이 아오미네는 현장에서 바로 입주신청서를 휘갈겼다. 손을 내저을 새도 없이 명의엔 나란히 두 사람의 이름이 써지고 그야말로 속전속결. 화를 내려 했지만 뻔뻔한 얼굴에는 어떠한 반대의 여지도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평일에는 아오미네가 경찰일로 바쁜 터라 결국 입주 전 주말에 살림살이를 사러갔다. 적당히 천엔마트를 한 바퀴 돌고나니 웬만큼 구색이 갖추어져서 그다음엔 자연스레 언젠가의 하교 길 마냥 패스트푸드 점으로 향했다. 아오미네와 함께 있으면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과거로부터 흐른다. 슬픈 것도 괴로운 것도 없이 마냥 우스웠던 그때로.

 

아오미넷치 벽에 붙일 포스터는 역시 마이짱?

너는 보나마나 네 사진일 테고.

 

데리버거를 크게 한입 베어 물며 그가 심술궂게 웃었다. 곧바로 대답을 하진 않고 대신 들고 있던 컵을 입가로 가져갔다. 곁들여 주문한 아메리카노는 싸구려원두의 탄 맛이 나서 입안이 씁쓸해졌다.

 

설마, 남는 것 있으면 나도 한 장 줄 수 있나하고.

 

 

* * *

 

 

아오미네의 차는 미쓰비시의 오프로더이다. 특유의 큼지막한 디자인은 빽빽한 도심 속에서도 야성의 눈을 가진 그와 파트너 마냥 어울렸지만 오래된 디젤엔진은 슬슬 걸리는 소음과 함께 검은 연기를 호소하고 있었다. 차 좀 바꾸지. 니가 뽑아줄 거 아님 닥쳐. 차 사준다는 여자 없어요? 무슨 개소리야? 비슷한 대화가 이것으로 세 번째였다. 터덜터덜 서를 나오는 걸음이 방향을 잡기도 전에 아오미네가 키세의 뒷목을 억세게 잡아채더니 오프로더의 조수석에 쑤셔 박았다. 경찰주제 안전벨트도 매지 않고 부르르 차체의 진동과 함께 시동이 걸린 바퀴가 예열도 없이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이러지 않아도 딱히 갈 곳도 도망칠 곳도 없는걸.

 

차창 너머로 해질 무렵의 신주쿠가 간판의 불을 밝히며 기나긴 밤을 준비하고 있었다. 밤과 낮의 인구 수차가 상이하다는 일본 최대의 번화가는 비즈니스와 유흥의 중심지답게 우후죽순 세워진 고층빌딩의 숲에서 거리는 개화의 절정기를 맞은 듯 암술과 수술을 둘러싼 수 겹의 꽃잎을 닮은 네온사인으로 만발하였다. 아름답지만 그만큼 부질없는 것이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대량생산처럼 단기간에 부랴부랴 지어낸 조립식 건물들은 철골을 땅에 박지 않아 어째 모두 기울어져 보이는 것이 위태로웠다. 세금을 끌어 써도 보수비용을 메우지 못한 낡은 다리는 철거작업조차 하지 못한 채 도시의 유령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지워졌다. 위장된 눈속임들. 여태 지나쳐온 모든 풍경이 그러했다.

 

거품이 터지던 당시 미쓰비시도 흔들렸다. 3천억 엔 규모의 부동산 재벌이었던 인기가수 센 마사오는 이제는 악단도 없이 가라오케 반주에 맞춰 노래하며 공연 후 복도에서 자신의 테이프를 쌓아놓고 판다고 한다. 세련된 마천루가 즐비한 니시신주쿠를 지나 히가시신주쿠만 들어서도 주위의 풍경이 달라진다. 현란한 불빛을 등지고 숨겨진 어두운 골목과 그보다 더욱 음습한 아귀를 벌리고 있는 불길한 밤의 도시. 가파른 수직선을 그리던 기이하기 짝이 없던 번성과 몽상가의 꿈처럼 한순간에 아스라진 붕괴의 흔적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상흔처럼, 그럼에도 신경 쓰지 않는 반점처럼 곳곳에 남아있었다.

 

하암, 피곤한 모양인지 눈물이 맺히면서 하품이 나왔다.

실은 전부 얼마 전에 방송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내용이다. 채널을 돌리고 싶었지만 옷더미에 깔린 리모컨을 찾을 수 없어 마지못해 보았다. 인공위성을 통해 중계되는 지구 반대편의 이야기처럼 동화되지 못하는 위화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키세 료타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센 마사오는 누군지도 모른다.

 

신호를 기다리는 도로는 그야말로 러시아워. 본네트가 닿을 만큼 앞 차량 꽁무니에 바짝 붙어서는 것을 보며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만으로 발음해보았다. 버블. 귀여운 어감이다. 버블버블. 그때 팟하고 오렌지색 불이 켜졌다.

 

 

 

 

 

 

 

신분증 확인 문제로 1인당 1권씩 구매가 가능합니다.

 

 

수량조사 마감합니다. 덧글 남겨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사랑해요!!

책은  40권 뽑아갑니다~

행사장에서 뵈어요ㅠㅠ(넙쭉넙쭉

 

 

부스위치는 K5 <청황역세권>입니다.

반딧님(@midoban_D)의 청황소설 배포본도 위탁받고 있으니 많이 찾아와주세요!!

 

 

 

 

+ 문의는 아래 덧글이나 @mono9124로 보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 신간 외에 청황소설  구간 <순례>를 함께 들고 갑니다. 구간홍보는 후에 따로 돌릴 예정이니 관심부탁드려요~ 

 

 

Posted by 모노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