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요 오늘 늦을 듯!]

 

[재리미 꿈꿔용 알랍]

 

 

임재림은 밤 12시가 넘어서야 귀가했다. 평소와 같은 주말이었다면 태경의 집이든, 재림의 집에서든 함께 침대에 누워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아무런 이야기를(정말로 아무런 이야기. 아까 먹은 페페로니 피자의 맛이나 요즘 인스타에서 제일 핫한 영상 등) 하고 있었을 시각이었다. 그러다 까무룩 잠들 뻔한 태경을 재림이 입을 맞춰 조르듯 깨우거나, 재림이 최근 맞팔한 잭인지 핵인지 하는 녀석의 이야기가 지겨워진 태경이 재림의 아랫입술을 깨물어 말을 끊거나 했을 텐데.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재림은 오늘 오후 영국에 도착했다는 아버지를 만나러 다녀왔다.

 

금방 다녀올 거예요. 어차피 아빠가 보려는 건 내가 아니라 형인걸. 잠깐 얼굴만 비추면 돼. 걱정과 달리 재림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아파트로 돌아가도 괜찮다 하는 것을 태경이 기다리겠다 고집을 피웠다. 올 때 맛있는 거 사올게여. 살풋 웃는 모습이 어쩐지 전보다 어른스럽게 느껴져서 그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이렇게 초조할 줄 알았으면 몰래 라도 따라가 볼걸 그랬어. 오늘따라 재림의 방에 걸려있는 시계바늘이 게으르다.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에 이어서 재림의 인기척이 들려왔지만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앉아있었기 때문인지 태경은 말을 꺼낼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바짝 마른 입안에 침을 한번 삼키고 불 꺼진 방안으로 들어서는 재림을 기다렸다. ...자요? 조심스런 의문에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태경이 속삭였다. 아니 안자는데.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불빛이 전부인 어둑한 방안에서도 재림의 어깨가 크게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귀엽네. 그렇게 생각하면서 태경의 손이 한쪽 벽에 있는 스위치로 향하던 때였다. 잠깐, 잠깐만요!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만해도 동글했던 재림의 실루엣이 갑자기 네모나게 각이 졌다. 머리에 뭘 쓴 거야. 당황한 움직임이었던 재림은 그 이상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재림아 왜 그래. 평소라면 쪼르르 달려오고도 남았을 텐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쭈뼛쭈뼛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이리와. 불 안 켤 테니까. 아니면 내가 가? 짐짓 엄하게 말하자 그제야 한걸음 다가온다. 재림의 얼굴이 보고 싶어. 조급해진 마음에 태경이 근처에 있던 스탠드의 스위치를 눌렀다.

 

달칵. 근처가 밝아지면서 어둠 속에 재림의 모습이 보였다. 임재림이 다급히 머리에 뒤집어 쓴 것은 오전에 장을 보면서 받아왔던 유기농마켓 봉투였다. 피터 래빗이 그려진 종이봉투를 거꾸로 뒤집어쓴 모습에 순간 말이 멎었다. 숨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고요한 적막에 태경은 어서 말을 고르려 애썼지만 떨리는 입술에 쉽지가 않았다.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는 두 손을 재림이 먼저 다가와 잡았다.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닌데 그냥 내가 보여주기 싫어서.

 

재림아 도망갈까...? 고르고 고른 말이 겨우 그거였다. 눈물이 나오려하는 것을 꾹 참느라 그이상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입술을 떼는 순간 터져버릴 것 같아서 태경은 재림을 끌어안고 마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해요. 재림이가 놀라게 했나보다. 태경이 등을 다독거리는 손이 어느새 제법 커졌다. 그거 벗어, 숨 막히게. 그러게여 좀 덥다. 빨리...키스하고 싶으니까. 부스럭거리는 봉투의 소리와 함께 입술이 겹쳐지고 삼킨 타액에선 비릿하니 핏맛이 돌았다. 입가에 찢어진 부분을 건드렸는지 재림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고 미안한 마음에 안타까운 혀끝이 상처를 핥아낸다.

 

이렇게 야한 키스를 해주는데 내가 어딜 도망가요. 웃는 모습은 문을 나서기 전과 다름없는 임재림이다. 아프지마 재림아. 몇 번이고 나눈 키스에 입안엔 오롯이 서로만 남았다.

 

 

 

 

 

 

Posted by 모노님 :

 

 

 

 

영국은 정말 비가 많이 온다.

 

보통 일주일 중 6일은 날씨가 흐렸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비가 내렸다 개었다 오락가락해서 처음에는 우산 겸 양산을 챙겨갖고 다녔지만 얼마 못가 태경도 귀찮아져 버렸다. 다행히 비는 장대비가 아닌 부슬부슬 내리는 이슬비라서 외출하다 머리가 좀 젖는 정도이다. 버버리에선 트렌치 코트를 만들 때 애초에 방수가 되는 천을 쓴다던데. 내리는 비에도 개의치 않고 길을 건너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허겁지겁 상점의 처마 밑을 찾는 자신이 유난스러운건가 싶다.

 

반면 재림은 완전히 영국의 날씨에 적응한 모양이었다. 길을 걷다가 비가 올 때면 재림은 여전히 말라서 품이 크게 느껴지는 티셔츠의 후드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야말로 완벽한 너드룩의 완성이다. 후드 아래에서 빼곰히 보이는 갸름하니 작은 턱과 앳되 보이는 두 볼이 귀여웠다. 

 

재림아 옷을 너무 얇게 입어. 태경이 걱정했지만 재림은 레인부츠도 신지 않은 반바지로 빗물이 첨벙거리는 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태경의 아파트 현관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면 수건을 가져와 닦아주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왜 우산을 안 쓰는 거야.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재림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입을 맞춰왔다. 습도를 머금어 촉촉해진 입술이 비 냄새와 함께 닿아온다. 

 

영국에 사는 것은 비를 즐기는 것이라는데. 아직까지 태경에게 비는 불청객처럼 느껴진다. 딱히 밖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눅눅한 공기는 어깨를 쳐지게 만들고 어둑한 하늘은 졸음만 불러온다. 오늘만 해도 원래는 재림과 함께 쇼핑을 갈 예정이었는데 난데없이 빗줄기에 일정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소파 위에 널부러져 있다 보니 자꾸만 나른해진다. 배가 좀 고픈 것도 같지만 귀찮았다. 쇼핑이 끝나면 재림과 공원에 파는 젤라또를 먹으려 했는데. 그건 분명 재림이 좋아하는 맛일 거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이 드물 뿐이지 태경은 기분이 안 좋으면 티가 났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재림의 눈에 띄었다. 기분이 가라앉을 때면 지금처럼 재림의 어깨에 기대어 앉았다. 너무 말라서 부딪히는데가 아파. 칭얼거리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이러면 짐승재리미가 깨어나버렷. 너스레를 떨자 퉁퉁 부은 입술로 툭 내뱉는다. 그러든가.

 

드물게 침착한 재림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쇼핑 대신에 오늘은 하루 종일 집안에서 데이트해요. 피자랑 아이스크림 사올 테니까 그거 먹으면서 영화 한 편 보고 그다음에 짐승재리미랑 뒹굴뒹굴. 벌써부터 후드를 뒤집어쓰고 현관으로 향하는 재림에게 태경이 소리쳤다. 우산은! 괜찮아여ㅡ 재림은 이미 문을 열고 뛰쳐나간 후였다. 휴 한숨을 내쉬고 할 수없이 태경은 욕실로 향했다. 재림에게 건네줄 수건이 필요할 테니까. 

 

          

 

Posted by 모노님 :

사보는 엊그제 보았던 심야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 아마도 인류 멸망 그 후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였는데연거푸 들이켰던 카페인이 리포트 정리가 끝난 뒤에도 가시지 않아 억지로 보았던 것이다.

 

아무튼 인류가 멸망한 뒤 남겨진 개와 고양이들은 저마다의 생태계에 회귀, 적응하며 행복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괜찮네, 인류 멸망. 사보는 생각한다. 루피는 개도 고양이도 좋아하니까. 초원으로 변해버린 거리에서 개와 고양이와 함께 마음껏 달리고 있는 루피를, 시시싯 기분이 좋을 때 내는 특유의 웃음소리를 떠올렸다. 금세 사보는 행복을 느낀다.

 

만약에 개와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문득 허무맹랑한 전제가 떠오른다. 그렇다면 너는 나를 좋아해줄까. 개도 고양이도 없는, 아무도 없는 단 둘만의 세상에서라면 루피는 자신을 좋아해줄까. 그렇다면 사보는 인류 멸망을 기원한다. 너만 나를 좋아해준다면 인류 따윈 얼마든지 멸망해도 좋다고.

 

 

: 인류 멸망 하루 전

 

 

혹시나 싶어 들린 대학도서관에서(검색 엔진에 접속하자마자 멍청한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사보는 약간의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몇 번의 큰 전쟁과 전염병을 겪고도 경이로운 생존을 거듭해온 인류의 역사이다. 저출산 시대라곤 하지만 지금도 1분당 4.3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고 있고 운석 충돌의 기회는 이미 2012년에 지나가 버렸다.

 

허무함과 함께 도리어 가슴에 묘한 죄책감을 떠안고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곧은 자세는 장신인 그를 더욱 커보이게 만들었지만 지금은 늘 단정하던 셔츠에 구김이 생긴 것도 모르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터덜터덜 걷고 있는 한심한 남자만 있을 뿐이다. 입학 이래 계속 수석을 차지하고, 남녀를 따지지 않고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는 사보이지만 한 가지 주제에 따라선 어김없이 얼빠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가방에 들어있는 사회이론 서적처럼 냉철한 이성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아니 그보다 오래전부터 그래왔다. 사보의 인생은 저보다 한참 작은, 여전히 마르고 어리게만 보이는 한때는 정말 남동생이라 생각하기도 했던 그 아이를 위주로 돌아가고 있다. 전부가 아니라도 좋다. 조금이라도 괜찮으니까 그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마치 어떠한 개념과 해석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난제에 부딪힌 기분이었다.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루피가 좋아해줄까. 혹시나 루피에게 미움을 산다면 자신은 더 이상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지? 모두가 사랑해마지않을 그이건만 사보는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이토록 형편없다.

 

 

* * *

 

 

이러고 있으니까 꼭 재난영화 같다~”

그러게.”

 

눈앞의 상황이 연출되기까지 어떠한 목적과 의도도 개입하지 않았음을 사보는 맹세한다. 그는 태풍을 부를 수도 없을뿐더러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장대비를 쏟아 부어서 열차운행을 멈추게 할 수도 없고 나아가 이 일대에 정전을 일으켜 고립 상태를 만드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어쩌면 신께서 그의 염원을 들어주신 것일까. 일렁거리는 촛불을 곁에 두고 체온이 떨어지지 않게 맞닿은 어깨위로 담요를 나눠 걸치고 있는 현 상황은 루피가 말한 것처럼 재난영화의 한 순간이었다. 인류 멸망을 앞두고 지구에 남은 마지막 한 쌍이 그와 루피였다.

 

처음 TV에서 태풍 속보가 떴을 때 루피는 흔쾌히 사보의 집에서 자고 갈 것이라 말했다. 거센 비바람을 맞으며 길가의 가로수가 춤을 추듯 흔들리는 모습에 루피가 창문을 열고 싶어 하는 것을 말리느라 조금 애를 먹긴 했지만 금세 사보가 끓여낸 카레에 관심이 돌아갔다. 원래 돼지고기조림을 만들려던 것을 루피를 신경 쓰느라 너무 푹 익혀버렸는데 응급처치로 넣은 카레가루가 발군이었다. 다행히 루피는 평소처럼 요란하게 카레를 몇 그릇이나 비워냈고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사보의 행복이었다. 그의 행복은 이토록 사소했다.

 

그래도 비 때문에 게임도 못하고, 나가 놀지도 못하고. 재미없어!”

이제 곧 잘 시간이야, 루피.”

 

바람은 아까보다 잠잠해졌지만 루피는 지루하게 내리는 장맛비에 질려가는 모양이었다. 슬슬 졸음에 잠겨오는 눈꺼풀을 하고도 심심하다며 발가락을 꼼질거리는 루피와 달리 사보는 불어나는 생각들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이곳은 노아의 방주 안일까. 그렇다면 방주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그는 작은 상자 하나를 가슴에 품고 있는 기분이었다. 사보는 어리석은 여자처럼 상자를 열고 싶진 않았다. 불행이 예견되어있는 그 상자를 끝까지 열지 않고 들키지 않게 숨겨두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기댄 작고 동그란 머리가, 맞닿은 팔을 통해 전해지는 아이처럼 뜨거운 체온이 덩달아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 상자 안에 든 것이 어쩌면 혹시나 모를 희망이라는 것을 알아서 사보는 계속 입가가 간지러웠다.

 

만약에 말이야 루피.”

하아암, 왜 사보.”

누가 널 좋아한다고 하면.”

누가? ?”

그러니까 내, 내가.”

? 무슨 소리야?”

, 만약에 인류가 멸망한다면 어떨 것 같아?”

 

나는 희망이 싫어사보는 절망한다. 지금 이 순간 희망이란, 만약이란 가능성의 말은 그에게 고문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한심스러울 정도로 작아진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내가 너를 너무 많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좋아해도 괜찮은 걸까 싶을 만큼. 온 세상의 중심이 너이고,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내버리고 달려갈 수 있을 만큼. 왜 자신은 이렇게 지나친 사랑을 하게 된 걸까.

 

그건 좀 싫은데.”
?”

난 사보도, 에이스도 학교친구들도 다 같이 있는 게 즐거운걸.”

 

맞아, 그렇지. 네 말이 맞아.”

 

상자를 열고난 뒤 그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사보는 어리석은 여자에게 동감한다.

 

 

* * *

 

 

빗소리가 계속 귀에 거슬렸기 때문인지 루피가 잠든 뒤에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던 사보가 겨우 눈을 감은 것은 평소라면 해가 떠오를 시각이었다.

 

그 이후로 몇 시간이나 잠들었을까. 먹구름에 가려진 어스름한 빛 때문에 아침이 된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사보를 깨운 것은 몸 위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였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뻑뻑한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자 익숙한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다. 배 위에 걸터앉은 루피가 그를 흔들고 있었다.

 

사보 일어나! 비가 그쳤어!”

 

비가 그쳤다는 말처럼 고개를 돌려보니 강한 햇빛이 눈을 찔러왔다. 어느새 날이 개었는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희었다. 묵은 때를 벗긴 듯 한껏 씻어낸 찬 공기가 가슴 속으로 들어온다. 늦잠을 자기 일쑤였던 루피가 먼저 일어나 소란을 벌일 법했다. 태풍이 지나갔구나.

 

나가자. 비 때문에 웅덩이가 생겼어. 완전 수영장 같아."

그럼 운동화 말고 장화를 신어, 루피.”

사보 얼른 일어나아~에이스도 불러야지.”

 

어깨를 잡고 흔들어 봐도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는 그에 루피는 기운이 빠진 모양인지 장화를 찾으러 가버렸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반대로 사보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비가 그쳐버렸다.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하늘 아래 단 둘 뿐이던 밤이 지나가 버렸다. 결국 인류는 멸망하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개와 고양이는커녕 세상에 그와 루피 단 둘만이 오롯이 남는 일 따위 가능할 리가 없었다. 마치 약에 취했다 깨어난 것처럼 허무맹랑한 망상을 꿈꿨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이제 루피는 문 밖으로 나갈 것이다. 빛나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한데 뒤섞여 즐겁게 웃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여전하겠지.

 

사보 지금 울어?”

, 아니야.”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가가 축축했다. 비운의 주인공처럼 아니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눈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지만 의아한 얼굴로 다가오는 루피를 보자마자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네가 내 곁을 떠난다는 생각만으로 이렇게 죽고 싶어져.

 

"왜 우는 거야 사보? 어디 아파?”

, 울긴 누가 운다고 그래.”
지금 엉엉 울고 있잖아.”
너 때문이잖아!”


지금까지 한 번도 루피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는데 사보는 울컥해버렸다. 제법 손이 매운 편이라 에이스처럼 뒤통수를 치거나 하진 않았지만 아무튼.

 

난 정말 너만 있으면 괜찮은데, 넌 그게 아니니까.”
? , 내가 잘못 한 거야?”

난 인류가 멸망해도 괜찮아.”

에에?”
"인류가 멸망하고 아무도 없으면 그땐 네가 날 좋아해줄 거 아냐!”

그런 거 안 해도 난 사보가 좋다고!”

?”

 

막바지에 가선 거의 둘 다 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루피의 마지막 말에 사보의 사고가 멈췄다. 말도 안 돼. 뒤늦게 그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차마 벌어진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진 않았다.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는 사보의 옆으로 루피가 털썩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리곤 아무렇게나 걷어차 두었던 담요를 가슴께까지 올려 덮고 누웠다.

 

루피?”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다시 자자.”

?”

 

껌뻑껌뻑 당황한 눈동자를 감추지 못하는 사보의 손을 끌어당겨 억지로 제 옆에 눕히곤 루피가 정말로 잠들 모양인지 눈을 감았다. 아이를 재우듯 사보의 손등을 토닥이기까지 한다.

 

자고 일어나면 인류는 멸망해있을 거야."

, 루피 지금 무슨!”

난 잔다! 쿨쿨~”

 

말을 마치자마자 정말로 잠들었는지 고롱고롱 숨소리가 들려온다. 갑작스레 닥쳐온 상황이 조금도 이해가지 않았지만 일단 루피의 말대로 사보도 눈을 감았다. 햇빛이 눈가를 간질이긴 했지만 금세 개의치 않아졌다. 맞닿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체온과 기분 좋은 피로감에 따뜻한 물에 잠기듯 서서히 온몸이 나른해진다.

 

이렇게 잠들었다 눈을 뜨면 우거진 초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인류도, 개도 고양이도 없는 세상에는 너와나 단 둘만이 남게 된다. 단 둘만의 사랑을 하게 된다.

 

 

 

 

 

Posted by 모노님 :

 

 

재림이와 싸웠다.

 

몇 번 투닥거린 적은 있었지만 반나절 이상 연락을 안 한 것은 처음이니까 이건 아무래도 싸운 게 맞겠지. 나랑 임재림이 싸울 수도 있었구나. 태경은 새삼 놀랐다. 기념비적인 첫 번째 싸움의 원인이란 게 너무 하찮아서 그게 좀 쪽팔릴 뿐이다.

 

시초는 주말에 있는 자선파티에 뭘 입고 가냐 였다. 영국으로 워킹홀리데이를 온 뒤로 태경은 대부분의 생활을 재림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 상가들은 한국보다 문을 일찍 닫아요. 빵은 왼쪽에 있는 게 내꺼, 물은 오른쪽에 있는 걸 마시면 돼요. 가이드가 따로 없으니 태경의 입장에선 편리했다. 하지만 자선파티에 가자는 말을 먼저 꺼낼 줄이야. 막 유학을 왔을 때 신세를 진 부부라 했지만 여전히 사람 많은 곳을 달갑잖아 하는 임재림 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교류란 게 필요한 거잖아요.

설마 태경쓰 재리미를 독점하고 싶은 거? 재림이 심장 터져 버려!

 

이제는 익숙해진 호들갑을 무표정으로 넘어가긴 했지만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재림의 인스타를 확인할 때 이따금 느꼈던 씁쓸한 기분처럼, 모르던 사이에 점점 더 넓어진 임재림의 세계를 마주할 때면 태경은 제가 속 좁은 인간임을 알게 된다. 아무튼 그러니까 싸움의 원인은 금요일 저녁, 파티에 입고 가라며 임재림이 들고 온 옷 때문이었다.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셔츠가 그것도 세벌. 형한테 뭐가 어울릴지 몰라서 다 사왔어요. 어때요 재리미 센스 오졌다. 본인을 플래티넘이니 다이아 수저니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우태경 한정 임재림은 씀씀이가 지나쳤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에 휴대폰을 선물한 것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뭐가 그렇게 주고 싶은 게 많은지 재림은 태경에게 아무거나 열심히 선물했다. 길가다 본 구제인형이 뚱한 게 형을 닮았다고 사오고, 잡지에 나온 재킷이 그 모델이 입는 것보다 형이 입는 게 더 어울릴 것 같다고 사오고. 내가 이런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예전처럼 환불이라도 시킬라치면 형아~이거 텍 떼서 환불 못해요. 재림이 무서워서 혼자 환불하러 못가. 가서 지리면 어떠케요? 순전히 꾀만 늘었다. 이번엔 나도 그냥 안 넘어가. 선물로 환심 사는 일 그만두라고 했지. 욱한 나머지 목소리가 크게 나갔는데...

 

사실 재림이가 어떤 표정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제가 지른 고함에 제가 놀라선 허겁지겁 임재림을 아파트 밖으로 내쫒았으니까. 재림이 앞에선 화내지 않겠다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번엔 임재림도 잘못했으니까. 파티에는 알아서 갈게. 메시지를 보낸 뒤로 휴대폰을 보지 않았다. 재림이와 사귀고 처음으로 싸운 날 밤 심장이 쿵쾅거려 잠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선파티 당일. 이럴 줄 알았으면 재림이 차타고 같이 올걸. 아는 사람이 없는 장소는 태경에게도 곤혹이었다. 내내 쭈뼛거리며 벽에 달라붙듯이 기대서있던 태경이 목을 축이기 위한 샴페인 잔을 들어 올렸을 때 맞은 편에는 임재림이 있었다. 저와 같은 연보라색 셔츠를 입고서. , 너 그게 뭐야. 보아하니 임재림도 저 못지않게 놀란 모양이었다. 집에 CCTV라도 달아놨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재림이 먼저 달려들었다. 소오오름. 소름 돋는 거 인정하는 각? 역시 나랑 태경쓰는 운명의 데스티니!

 

진땀을 흘리며 태경이 방방 뛰는 재림의 어깨를 겨우 붙잡았다. 그래도 아직까진 저보다 조금 작다. 우리 아직 싸우는 중이거든. 위협이 되지 못했는지 재림이 볼을 붉혔다. 헐 갓태경 셔츠빨 지리구요. 이게 지금껏 임재림이 난처한 상황을 넘어가는 방법이다. 재림아. 낮은 목소리로 말하니 그제야 진지한 상황이란 걸 눈치 챈 모양이다. 너도 잘 어울려. 어디서 이렇게 예쁜 셔츠를 골라왔어. 원래하고 싶은 말과 다른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파티 끝날 때까지 나한테 말 걸지 마. 아마도 아까 마신 샴페인이 무알콜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지금 우태경은 후회하고 있다. 사실은 파티에서 재림을 보면 바로 화해하고 싶었다. 더 이상 연락을 안 하는 것도 싫다. 임재림이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게 제일 싫은데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샴페인을 몇 잔 들이키자 이것도 알콜이라고 취기가 밀려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재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재림아 내가 잘못했어. 어디 간 거야.

 

태경, 파티는 재미있나요?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파티의 호스트인 재림이가 신세졌다는 부부였다. 부부의 품에는 4살 남짓의 여자아이가 안겨 있었다. 인사를 하며 태경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아이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리곤 태경에게 손에 꼭 쥐고 있던 헝겊인형을 내민다. 에밀리 그건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이잖아, 그걸 태경에게 주려고? 태경이 멋쩍게 웃었지만 에밀리라 불린 아이는 태경이 인형을 받을 때까지 손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인다. 받는 척이라도 해주세요. 찡긋 보내온 부인의 사인에 태경이 에밀리의 인형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에밀리. 주위에서 본 것처럼 에밀리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자 쑥스러운 모양인지 엄마의 겨드랑이 안쪽으로 파고든다.

 

에밀리는 태경이 마음에 드나 봐요, 가장 좋아하는 인형을 선물로 줬네요. 인상이 좋은 부부였다. 이런 부부가 재림의 유학생활을 도와주었다니 감사한 일이었다. 정말 제가 마음에 든 걸까요. 아이들은 단순하니까요.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바로 표현하죠. 전에는 아빠가 미니토마토가 좋다하니까 하루 종일 미니토마토만 입에 넣어주지 뭐예요. 곤란한 듯 말하지만 표정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짧은 대화 사이 에밀리는 졸린 모양인지 눈꺼풀이 반쯤 감겨있었다. 에밀리를 재워야겠네요. 헝겊인형은 지금 돌려줄래요. 자고 일어났을 때 이게 없으면 난리가 날 거예요. 행복해 보이는 부부가 졸음에 겨운 에밀리를 끌어안고 돌아설 때 태경이 물었다. 혹시 재림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아마 집 뒤에 호숫가에 있을 거예요. 재림은 그 호수를 좋아하거든요. 데려오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랑 꼭 호수를 보고 싶다고 했어요.

 

부인의 말대로 임재림은 호숫가에 있었다. 사람 많은 곳을 꺼리는 재림이 좋아할 만한 장소였다. 그리고 한적한 호수는 태경의 마음에도 들었다. 드물게 화창한 날씨이고 바람도 적당해서 한없이 호수를 바라보며 앉아있기에 알맞았다. 부스럭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등장한 태경에 재림은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금세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언제나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는 미소에 부재의 외로움도 슬픔도 순식간에 잊게 된다. 형이 먼저 말거는 건 괜찮은 거죠? 태경은 대답대신 재림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형 여기는 그때 호수랑 닮았어요. 그때? 민속촌에서 봤던 호수요. 다시 보니 얼핏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여기에 피어있는 나무도 꽃도 다르지만 그래도 그 호수랑 비슷해요. 그래서 여기 있으면 형이랑 있었던 게 생각나요. 내려쬐는 정오의 햇볕 아래서 언젠가와 같이 바람에 살랑이는 임재림의 머리카락을 본다. 또다시 수줍지만 맑은 눈동자가 마주쳐온다. 재림이는 몇 번이나 이 호숫가에서 자신을 생각했을까.

 

태경아 너한테도 보여주고 싶었어.

 

태경은 생각한다. 자신으로부터 피어나는 임재림의 찬란한 세계를. 공기는 지금처럼 포근하고 빛은 따스하다.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있고 같은 풍경을 바라본다.

 

 

 

 

 

 

 

Posted by 모노님 :

[리퀘/제키벨져] 실낙원

2015. 3. 14. 04:05 from 기타

 

 

엘님과 연성 주고받기해서 드리는 사이퍼즈 제키벨져...잘 모릅니다...나를 욕하는 자 엘이라는 자의 목을 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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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 악도

아름다움도 추함도 모두 공존하는 그곳을 너는 아는가

 

 

 

: 실낙원 

 

 

 

남자는 서두르지 않았다. 세공 된 원석처럼 고도로 제련 된 육체에는 신이 내린 테라듀가 깃들었고 잔해를 걷어낸 뒤 남은 감정의 편린들 가운데 그는 자신의 미의식에 따라 조급함 없는 시간을 보냈다. 철제 프레임이 그대로 드러난 침대맡에는 살풍경 속에서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꽃다발이 청동병에 꽂아져 있다. 흐드러지게 핀 푸른색 장미였다. 그의 입술이 물었다 놓은 듯 짙은 꽃잎의 색깔은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은실의 머리카락을 떠올리며 준비한 것이다. 만개한 수술과 꽃잎이 한가득 벌어져 내일이면 숨이 죽으면서 낙화가 시작되겠지만 향기가 없는 장미꽃다발은 충분히 아름다웠기에 그는 불만 없이 침대 위에 누워있는 은발의 주인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과연 어떤 얼굴을 보여줄까. 눈을 마주치면 돌로 변해버리고 만다는 메두사의 신화처럼 경직된 얼굴로 두려움에 떨까. 남자의 심장은 인간이던 그 시절과 다름없이 뛰고 있다. 

 

-광대와 같은 모습이군. 어리석고 저급하다.

 

얇은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고 가지런한 속눈썹을 두 어번을 깜빡이는가 싶더니 은발의 주인을 금세 그가 처한 상황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낯선 천장과 등 아래 구겨진 시트와 그림자를 드리우며 내려보는 시선에도 당황하는 기색은 찾아 볼 수 없다-그래서 이제부터 서커스라도 할 셈인가-최면 종류의 주술, 혹은 페로몬과 같은 모종의 비약을 사용한 것인지는 모르나 침대 위에 나부러져 있는 온몸의 근육의 단단하게 이완되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의 유희를 기대하듯 형형하게 빛나는 남자의 눈을 보아 저의 몸에 무슨 짓을 했는지 묻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볕을 많이 보지 않은 것처럼 창백한 빛의 뺨을 굳히자 다소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눈매가 더욱 날카로워진다. 주눅 들것 없이 오똑 선 콧날 아래 입술이 과즙을 짓이기듯 깨물어졌다. 비웃듯 쏘아진 목소리는 태연했지만 한껏 날이 선 기세엔 경계의 뜻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에 개의치 않고 남자의 얼굴이 가까워져 오는 것이다. 고개를 도리질하는 것조차 무리라 끝까지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던 마음과 달리 본능적인 반감으로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오랫동안 말라있었던 것같은 입술을 누르는 움직임에 그는 이윽고 찾아올 통증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파고들어 구강을 할퀴어낼 축축하게 젖은 혀는 간데없이 톡하고 내려앉는 가벼운 무게만이 입술 위에 닿았다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를 세워 얇은 표피를 뜯어내고 붉은 피를 내지도 않았다. 그의 눈이 말하듯 정말로 즐거운 유희처럼, 이건 정말 어린애 장난같지 않은가. 이번만큼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묻어있는 여운을 핥아내듯 혀를 빼어 꼬리가 올라간 입술을 훔치는 남자를 보면서 벨져는 덜덜 떨리는 잇사이를 부수어져라 악물었다. 감정을 드러낼수록 남자의 구미만 당길 뿐이다. 어떻게든 그를 동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쓰다 버리는 부속품주제. 인간이 아니니까. 설탕물에 꼬이는 개미떼처럼 인간의 감정에 이끌린다면 남자의 앞에서만큼은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내가 보여줄 것이라곤 기대하지 마라. 수치심에 견딜 수 없다면 진즉 혀를 깨물었을 테지.

-그건 실망이네.

-이런 것으론 나를 굴복시킬 수 없다. 강화인간.

-...늑대인간을 죽이는 것은 은으로 만든 총알이고 뱀파이어를 불태워 죽이는 것은 은으로 된 십자가라고 하던데.

-자신이 괴물이라는 자각은 있나 보군.

 

그건 다 상상 속 이야기이지 않나. 허무맹랑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도리어 남자는 고개를 갸웃이는 것이었다. 이어서 등을 받친 침대의 한쪽이 움푹 들어가면서 남자의 무릎이 침대 위를 딛었다. 그가 무릎을 기어 다가오고, 손을 뻗어 바닥을 짚을 때마다 부스럭 시트가 쓸리는 소리가 간지럽게 들려왔다. 낯선 천장의 무늬가 보이지 않을 만큼 이제는 완전히 우위를 점령한 남자는 입가로 새어나오는 광기어린 웃음소리를 숨기지 않으며 커다란 손을 벨져의 뺨에 가져갔다. 맞닿은 온도는 강철처럼 싸늘했다. 마디가 길고 끝이 날카로운 손가락이 유려한 선의 턱을 따라 부드럽게 훑어내리기에 일순간 호흡이 느려졌다. 팽팽하던 긴장의 끈이 느슨해지던 그때 문득 남자가 알 수없는 악력으로 가는 목을 움켜쥐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기도가 눌리면서 차마 삼키지 못한 숨이 고통스럽게 터져 나오고 덩달아 구역질이 치민다. 남자의 정체만큼이나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존재였다.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눈 앞이 노래지기 직전에서야 남자는 서서히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어지러운 머릿속에 정상적인 사고는 불가능해진지 오래였다. 뭍으로 던져진 아가미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피어난 덩굴처럼 흐트러진 머리칼과 붉어진 얼굴, 힘겹게 오르내리는 숨소리와 삼키지 못한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의 조화는 빈틈없이 견고하던 기사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마 그 조차도 모를 생경한 모습. 제 손으로 만들어낸 광경을 감상하듯 내려다 보며 남자가 속삭였다. 실재하는 나를 어디까지 참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사실은 말이야. 굴복시키는 것따윈 관심 없어. 발정난 암캐처럼 다리를 벌리던 처녀처럼 피를 흘리던 난 상관없이 이 구멍에 내것을 쑤셔박을 거다. 설사 혀를 깨물고 자결한다 해도, 몸뚱아리가 반토막이 난다해도 네 식어버린 구멍에 내 뜨거운 정액을 쏟아부을 것이다. 나를 경멸하던 수치심을 느끼던 아무런 상관이 없어. 처음부터 그랬던 거다. 무엇도 어떠한 것도 내게는 상관없어.

 

-오늘은 오직 너만을 위해 기도해주지.

 

성전의 페이지를 넘기듯 기다란 손가락이 무방비한 피부 위에 닿는다. 기도를 읊는 목소리는 나지막하면서도 강렬해서 들뜬 숨을 트이게 한다. 아찔해지는 시야 속에서 그는 남자의 등 뒤에서부터 뻗어져 나온 테라듀의 갈퀴가 자신의 심장을 꿰뚫길 간절히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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