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이와 싸웠다.

 

몇 번 투닥거린 적은 있었지만 반나절 이상 연락을 안 한 것은 처음이니까 이건 아무래도 싸운 게 맞겠지. 나랑 임재림이 싸울 수도 있었구나. 태경은 새삼 놀랐다. 기념비적인 첫 번째 싸움의 원인이란 게 너무 하찮아서 그게 좀 쪽팔릴 뿐이다.

 

시초는 주말에 있는 자선파티에 뭘 입고 가냐 였다. 영국으로 워킹홀리데이를 온 뒤로 태경은 대부분의 생활을 재림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 상가들은 한국보다 문을 일찍 닫아요. 빵은 왼쪽에 있는 게 내꺼, 물은 오른쪽에 있는 걸 마시면 돼요. 가이드가 따로 없으니 태경의 입장에선 편리했다. 하지만 자선파티에 가자는 말을 먼저 꺼낼 줄이야. 막 유학을 왔을 때 신세를 진 부부라 했지만 여전히 사람 많은 곳을 달갑잖아 하는 임재림 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교류란 게 필요한 거잖아요.

설마 태경쓰 재리미를 독점하고 싶은 거? 재림이 심장 터져 버려!

 

이제는 익숙해진 호들갑을 무표정으로 넘어가긴 했지만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재림의 인스타를 확인할 때 이따금 느꼈던 씁쓸한 기분처럼, 모르던 사이에 점점 더 넓어진 임재림의 세계를 마주할 때면 태경은 제가 속 좁은 인간임을 알게 된다. 아무튼 그러니까 싸움의 원인은 금요일 저녁, 파티에 입고 가라며 임재림이 들고 온 옷 때문이었다.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셔츠가 그것도 세벌. 형한테 뭐가 어울릴지 몰라서 다 사왔어요. 어때요 재리미 센스 오졌다. 본인을 플래티넘이니 다이아 수저니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우태경 한정 임재림은 씀씀이가 지나쳤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에 휴대폰을 선물한 것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뭐가 그렇게 주고 싶은 게 많은지 재림은 태경에게 아무거나 열심히 선물했다. 길가다 본 구제인형이 뚱한 게 형을 닮았다고 사오고, 잡지에 나온 재킷이 그 모델이 입는 것보다 형이 입는 게 더 어울릴 것 같다고 사오고. 내가 이런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예전처럼 환불이라도 시킬라치면 형아~이거 텍 떼서 환불 못해요. 재림이 무서워서 혼자 환불하러 못가. 가서 지리면 어떠케요? 순전히 꾀만 늘었다. 이번엔 나도 그냥 안 넘어가. 선물로 환심 사는 일 그만두라고 했지. 욱한 나머지 목소리가 크게 나갔는데...

 

사실 재림이가 어떤 표정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제가 지른 고함에 제가 놀라선 허겁지겁 임재림을 아파트 밖으로 내쫒았으니까. 재림이 앞에선 화내지 않겠다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번엔 임재림도 잘못했으니까. 파티에는 알아서 갈게. 메시지를 보낸 뒤로 휴대폰을 보지 않았다. 재림이와 사귀고 처음으로 싸운 날 밤 심장이 쿵쾅거려 잠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선파티 당일. 이럴 줄 알았으면 재림이 차타고 같이 올걸. 아는 사람이 없는 장소는 태경에게도 곤혹이었다. 내내 쭈뼛거리며 벽에 달라붙듯이 기대서있던 태경이 목을 축이기 위한 샴페인 잔을 들어 올렸을 때 맞은 편에는 임재림이 있었다. 저와 같은 연보라색 셔츠를 입고서. , 너 그게 뭐야. 보아하니 임재림도 저 못지않게 놀란 모양이었다. 집에 CCTV라도 달아놨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재림이 먼저 달려들었다. 소오오름. 소름 돋는 거 인정하는 각? 역시 나랑 태경쓰는 운명의 데스티니!

 

진땀을 흘리며 태경이 방방 뛰는 재림의 어깨를 겨우 붙잡았다. 그래도 아직까진 저보다 조금 작다. 우리 아직 싸우는 중이거든. 위협이 되지 못했는지 재림이 볼을 붉혔다. 헐 갓태경 셔츠빨 지리구요. 이게 지금껏 임재림이 난처한 상황을 넘어가는 방법이다. 재림아. 낮은 목소리로 말하니 그제야 진지한 상황이란 걸 눈치 챈 모양이다. 너도 잘 어울려. 어디서 이렇게 예쁜 셔츠를 골라왔어. 원래하고 싶은 말과 다른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파티 끝날 때까지 나한테 말 걸지 마. 아마도 아까 마신 샴페인이 무알콜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지금 우태경은 후회하고 있다. 사실은 파티에서 재림을 보면 바로 화해하고 싶었다. 더 이상 연락을 안 하는 것도 싫다. 임재림이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게 제일 싫은데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샴페인을 몇 잔 들이키자 이것도 알콜이라고 취기가 밀려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재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재림아 내가 잘못했어. 어디 간 거야.

 

태경, 파티는 재미있나요?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파티의 호스트인 재림이가 신세졌다는 부부였다. 부부의 품에는 4살 남짓의 여자아이가 안겨 있었다. 인사를 하며 태경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아이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리곤 태경에게 손에 꼭 쥐고 있던 헝겊인형을 내민다. 에밀리 그건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이잖아, 그걸 태경에게 주려고? 태경이 멋쩍게 웃었지만 에밀리라 불린 아이는 태경이 인형을 받을 때까지 손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인다. 받는 척이라도 해주세요. 찡긋 보내온 부인의 사인에 태경이 에밀리의 인형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에밀리. 주위에서 본 것처럼 에밀리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자 쑥스러운 모양인지 엄마의 겨드랑이 안쪽으로 파고든다.

 

에밀리는 태경이 마음에 드나 봐요, 가장 좋아하는 인형을 선물로 줬네요. 인상이 좋은 부부였다. 이런 부부가 재림의 유학생활을 도와주었다니 감사한 일이었다. 정말 제가 마음에 든 걸까요. 아이들은 단순하니까요.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바로 표현하죠. 전에는 아빠가 미니토마토가 좋다하니까 하루 종일 미니토마토만 입에 넣어주지 뭐예요. 곤란한 듯 말하지만 표정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짧은 대화 사이 에밀리는 졸린 모양인지 눈꺼풀이 반쯤 감겨있었다. 에밀리를 재워야겠네요. 헝겊인형은 지금 돌려줄래요. 자고 일어났을 때 이게 없으면 난리가 날 거예요. 행복해 보이는 부부가 졸음에 겨운 에밀리를 끌어안고 돌아설 때 태경이 물었다. 혹시 재림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아마 집 뒤에 호숫가에 있을 거예요. 재림은 그 호수를 좋아하거든요. 데려오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랑 꼭 호수를 보고 싶다고 했어요.

 

부인의 말대로 임재림은 호숫가에 있었다. 사람 많은 곳을 꺼리는 재림이 좋아할 만한 장소였다. 그리고 한적한 호수는 태경의 마음에도 들었다. 드물게 화창한 날씨이고 바람도 적당해서 한없이 호수를 바라보며 앉아있기에 알맞았다. 부스럭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등장한 태경에 재림은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금세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언제나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는 미소에 부재의 외로움도 슬픔도 순식간에 잊게 된다. 형이 먼저 말거는 건 괜찮은 거죠? 태경은 대답대신 재림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형 여기는 그때 호수랑 닮았어요. 그때? 민속촌에서 봤던 호수요. 다시 보니 얼핏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여기에 피어있는 나무도 꽃도 다르지만 그래도 그 호수랑 비슷해요. 그래서 여기 있으면 형이랑 있었던 게 생각나요. 내려쬐는 정오의 햇볕 아래서 언젠가와 같이 바람에 살랑이는 임재림의 머리카락을 본다. 또다시 수줍지만 맑은 눈동자가 마주쳐온다. 재림이는 몇 번이나 이 호숫가에서 자신을 생각했을까.

 

태경아 너한테도 보여주고 싶었어.

 

태경은 생각한다. 자신으로부터 피어나는 임재림의 찬란한 세계를. 공기는 지금처럼 포근하고 빛은 따스하다.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있고 같은 풍경을 바라본다.

 

 

 

 

 

 

 

Posted by 모노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