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 피는 새벽

[19세미만 구독불가 / A5 / 56p / 떡제본 / 6,000원]

 

 

 

청황(아오미네X키세)AU소설입니다.

케스 레드존 I-10 '이 부스 모냐'에 있습니다.

술도가의 마지막 후계자 키세의 문하로 들어간 머슴(...)아오미네의 이야기입니다.

표지는 코나님 커미션입니다~

 

 

 

 

 

 

 

 

 

<<sample>>

 

 

 

마른 먼지를 일으키며 커다란 몸이 넘어간다.

 

그럼에도 몽둥이를 내리치는 손들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장대비처럼 쏟아 붓는 매타작에는 아무리 장정의 사내라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저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묽은 피가 흘러내리는 머리를 끌어안고 불어터진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잃지 않도록 견디어 내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바위처럼 웅크려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는 꿋꿋한 모습이 오히려 그들의 화를 돋우었는지 가래침 섞인 걸쭉한 욕설이 너른 등 위로 뱉어졌다.

 

천하의 상놈 같으니라고, 짐승의 사료로도 네 놈은 쓰이지 않을 것이야!”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축축한 가래덩어리에 화가 이는 것이 아니었다. 땅바닥을 기어 사는 미천한 놈이라지만 짐승과 비하는 것은, 더구나 이 몸뚱이를 갈아 돼지에게라도 주겠다는 것인가. 수치심을 넘어 끓어오르는 울화에 사내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갈기갈기 찢겨 옷이라고도 볼 수 없는 거적 사이로 울긋불긋 피멍으로 뒤덮인 등판이 퉁퉁 부어올라서야 팔뚝만한 몽둥이가 쩍하고 갈라져 내린다. 지나가는 똥개에게 생각 없이 내리치는 돌팔매질처럼 뭇매에는 연유가 없었다. 천한 것들이 저보다 천한 것들을 찾아 주인 행세를 하며 호기를 부리는 것이다. 흡사 광기라고 할 만큼 비틀린 눈을 가진 이상자들의 분풀이만이 저잣거리의 뒤편을 채우고 있었다.

 

살이 터지는 고통과 온몸에서 발화되는 열은 사내의 머릿속까지 뒤흔든다.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기분에 굵은 선의 눈썹이 들썩이고 부릅뜬 푸른색 눈동자가 형형히 빛났다. 부득 이가 갈리던 그때 사내의 손끝에 무언가가 걸려들었다. 갈라져 떨어진 몽둥이의 토막이 그곳에 있었다. 얼룩무늬마냥 핏방울이 튀어있는 날카로운 끝에 두 눈이 질끈 감기고, 그러쥔 주먹 안에 힘이 들어갔다. 반죽음 상태이던 사내의 기세가 불길한 살기를 타는 것도 모르고 농을 주고받으며 히죽거리던 그들이 다시 한 번 몽둥이를 크게 들어 올리던 때였다.

 

그만 두십시오.”

 

울림은 종소리처럼 귓가에 선명하였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사내도, 그를 둘러싼 패거리도 휘두르려던 손을 멈추었다. 맑은 파도에 씻긴 듯 신기하게도 흉흉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흥분이 가라앉는 숨들에 사내가 땀이 엉긴 눈꺼풀을 소 마냥 느리게 껌뻑거렸다. 웅성거리는 구경꾼들의 무리를 헤치고 다가오는 걸음은 가벼우니 거추장스러움이 없다. 타박타박 이내 코앞에서 소리가 멎고 팔락이는 백색의 유카타 자락 아래로 크지 않은 발이 단정한 게다 위를 딛고 있었다.

 

제가 그를 거두겠습니다.”

 

올려보는 고개를 따라 샛노란 호박(琥珀)의 눈동자가 마주쳐 왔다.

 

 

 

* * *

 

 

 

호박을 어찌 아느냐 하면. 떠돌이여정 중 가진 건 풍채뿐이니 가끔 행랑에 묵으며 잔돈을 받고 굳은 일을 할 적이 있는데 저택 안주인의 머리채에 꽂혀 있던 칸자시 비녀가 바로 호박 보석이었다. 한나절의 진한 태양처럼 노란 빛깔을 띤 호박은 여간 귀한 것이 아니라며 간드러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분 냄새나는 몸을 비벼오곤 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나는 냄새는 서양분의 역한 냄새와는 달랐다. 주름 없이 깨끗하게 다려진 옷깃과 소매가 바람에 나부낄 때마다 은은한 연꽃의 향기가 풍겨져 나오는 것이다.

 

아오미넷치!”

 

뒤를 따르는 것도 잊은 채 멀뚱히 서 있는 사내를 키세가 돌아보았다.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놀란 머리를 좌우로 털어내며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뿌리도 없는 상놈에게 과분하다며 저마저도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장난스런 애칭까지 덧붙여서 불러지는 호칭이 맞지 않은 옷이라도 걸친 듯 목 언저리가 영 근지럽고 어색하다.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나리.”

아오미넷치야 말로 나리라고 부르는 것 관두세요.”

 

그럼 무어라 부르나. 멋쩍어하는 표정에 싱긋 미소 짓는다. 키세라고 부르면 되지요. 제대로 된 경어도 알지 못하지만 감히 하인 주제 주인댁의 성을 함부로 부르다니 집안의 지체 높은 어르신이 아신다면 불호령이 떨어질 일이었다. 그러나 키세의 유일한 가주는 바로 눈앞의 청년이다.

 

그나저나 어제 내준 숙제는 다 했나요?”

 

요 며칠 익숙하지 않은 붓을 억지로 손에 쥐어주며 한자쓰기를 가르쳤었다. 여태껏 나무를 패고 밭이나 일구던 억센 손이었으니 힘 조절이 될 리가 만무하다. 형체가 잡히지 않아 삐뚤빼뚤한 글자에 수십 장의 종이가 흥건히 젖거나 찢어질 동안에도 키세는 아오미네의 곁에서 몇 번이고 밤바다 같은 먹을 갈았다.

 

글 따위 몰라도 상관없잖아. 써먹을 데도 없구만.”

그러니 무시 받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배우려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책을 읽진 않아도 글을 알아야 현판을 내걸고 장사라도 하지요. 사뭇 단호한 음성을 뒤로 그가 문을 나섰다. 낡은 고택은 백련의 밭에 둘러싸여 있었다. 마을에서도 멀리 떨어져 귀퉁이에 자리 한 오래 된 술도가는 규모는 작지만 막부에 진상을 올릴 정도로 저명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다 옛날 얘기이지요. 명맥만을 겨우 이어가고 있는 형편이지만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주시는 손님을 위해 조금이나마 술을 빚고 있습니다. 곁에서 덤덤히 말을 잇는 이가 바로 술도가의 마지막 계승자인 키세 료타였다. 뜻밖에 나타난 명인은 포악한 패거리의 사이를 비집고 선언하듯 말하였다.

 

-그를 문하로 들이겠습니다.

 

아직 여린 티가 가시지 않은 청년에게서 위압감일랑 느껴질리 없겠지만 그럼에도 곧은 목소리에 다들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가 자신을 거두었다.

 

후사가 없던 아들 며느리 부부가 산적에게 변을 당해 죽고 별다른 위세라곤 없이 그저 술을 빚는 것이 전부인 변변찮은 가문이었다. 그대로 대가 끊기는가 싶었는데 여느 날 웬일로 아흐레씩이나 집을 비운 어르신이 무려 에도까지 나가 사내아이를 데려왔다. 암암리에 도는 얘기로는 과거 프랑스 선교사와 하룻밤 배가 맞은 것이라 하는데 무슨 영문이었건 외곬이던 어르신은 아이에게 키세 료타라는 성과 이름을 주었고 아들이자 하나뿐인 후계자로 삼아 연꽃으로 술 빚는 법을 가르쳤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조차 모호하던 작고 마른 사생자가 노인의 주름진 손을 잡고 고택의 문지방을 넘을 때 하인들이야 못내 하고픈 말을 목구멍 뒤로 삭혔지만 우물가 아낙들의 재잘대는 입까지는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어쩜 그리 하나도 닮지 않았지? 그도 그럴게 치자 물로 염색한 듯 샛노란 금발이나 오리마냥 보드라운 솜털로 감싸진 흰 뺨, 차양처럼 드리워진 기다란 속눈썹 등은 곰보 같은 주인어르신과 어디 하나 닮지 않은 것이다. 극성맞은 아랫것이 손가락, 발가락, 허벅지의 점이나 귓바퀴의 구부러진 모양까지 샅샅이 비교해보았지만 비슷한 구석일랑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볕에 물든 금발은 시골마을 어디에서나 눈에 띄었고 어쩌다가 방물장수가 들여오는 서양 인형처럼 곱게 생긴 모양새에 남세스런 소문이 따라붙기도 하였다. 아오미네도 일찍이 귀동냥을 들어 알고 있다. 명색에 문장이 있는 가문이라고 얼마 되지 않는 전답을 노리고 어린 것이 요망하게 노인네를 꾄 것이 아니냐. 또 다른 이에 따르면 병에 걸린 사창가의 소년을 어르신이 거두어 낫게 해주고 양자로 삼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따금 보이는 파리한 안색이나 좀처럼 살이 붙지 않는 나뭇가지 같은 길쭉한 팔 다리를 보면 병치레를 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저잣거리의 구설수들이 대부분 뜬구름과 같듯 속 시원하게 밝혀진 것은 어느 하나 없다.

 

어르신이 병환으로 명을 달리 한 뒤 우려와는 다르게 키세는 착실히 예를 차려 장례를 지냈다. 가문의 후계자로서 상복을 입고 밤새워 조문객을 맞았고 봉안당에 선향을 피워 올렸다. 신통하게도 별다른 식솔도 부리지 않고 홀로 고택을 돌보며 지내는 모습에 소문은 차차 수그러들었고 전과 다름없이 고택 주위엔 해마다 백련 꽃이 만개하였다.

 

문하라니.

 

그는 자신을 종으로 부리지 않았다. 다시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뜻조차 모르는 단어에 표정을 구기자 키세가 그런 아오미네의 생각을 눈치 챘다는 듯 손을 잡아챘다. 구부러지는 고사리의 끝처럼 감겨드는 손가락의 온도는 서늘하다. 갑작스레 닿아온 낯선 감각에 주춤 뒤로 물러서려는 것을 놓치지 않고 키세가 재빨리 아오미네를 잡아 당겼다.

 

이 손과 시간만 있으면 됩니다.”

 

흉터자국과 굳은살이 박여 고목의 껍질 같은 손은 그보다 살갗이 얇은 섬섬옥수에도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기세 좋게 앞서가는 걸음을 따라 도착한 곳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아득한 연꽃의 밭이었다.

 

꽃이 보이지 않는데.”

만개하는 것은 다음입니다, 오늘은 봉오리가 틔우는 것을 도우러 왔어요.”

 

아오미네는 작은 벌레가 되어 거대한 수풀 속에 빠진 기분이었다. 고개를 둘러보아도 시야에 차는 것은 시릴 만큼 선명한 녹음뿐이다. 간간히 주먹만 하게 맺힌 흰 봉오리가 눈에 띄기도 했지만 너도나도 활짝 펼친 손바닥처럼 우거진 연잎에 작은 밥풀떼기처럼 보일 뿐이다. 이파리만이 무성한 밭은 아무래도 꽃밭이라 하기엔 황량한 감이 있다.

 

기골이 장대한 아오미네지만 우후죽순으로 자라난 연잎덤불은 그의 머리끝까지 닿아 있었다. 앞을 막고 있는 줄기를 치우며 아오미네가 인상을 찌푸릴 동안 키세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길이 있는지 요령 있게 덤불을 비켜서 앞으로 나아갔다. 지느러미를 미끄러뜨리며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노란 머리카락의 끝이 보이지 않을까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졌다. 저를 미아로 만들려 짓궂게 구는 것은 아닐까. 기다리란 말은 차마 할 수 없어 아오미네는 마구잡이로 줄기를 헤치며 키세의 뒤를 쫓았다.

 

어느 정도 다다랐을까 외딴섬 같은 공터가 나왔고 앞서 도착해있던 키세가 신고 있던 나무게다를 벗어 한쪽에 두었다. 그리곤 말없이 유카타의 밑자락을 끌어 올렸다. 일꾼들이 하는 것처럼 활동에 편하게끔 옷깃을 말아 올려 매듭을 지자 그 아래로 새하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그 순간 걸음을 내딛기 위해 붙잡고 있던 연꽃의 줄기가 으득 부러지고 흔들리는 눈동자를 남겨둔 채 키세가 물속으로 맨발을 담그었다.

 

제법 깊이가 되니 조심하세요.”

 

 

 

(이어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곧이어 사립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오미네는 돌아보지 않았다. 매듭을 풀어낸 뒤 옷감이 맨살 위로 쓸려 내려가는 부스럭거림에 이어서 참방 물보라가 이는 것이 들려왔다. 아오미네는 묵묵히 불씨를 부칠 뿐이다. 은근한 열기만이 남고 타버린 숯불이 잿더미가 되었음에도 그는 실없는 부채질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순간 뒷목에 투둑 물방울이 튀었다. 천장에 맺힌 이슬이 떨어졌나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자 다시 한 번 물줄기가 등 뒤를 적신다. 지난날 그가 손바닥 위에 연잎을 담아 기울였던 것처럼 익숙한 기시감에 고개를 돌려보니 욕탕 안에서 장난스러운 얼굴을 한 키세가 아오미네를 향해 아이처럼 손가락 끝으로 물방울을 튀기고 있었다.

 

뜨겁지는 않아?”

딱 좋아요. 고마워요, 아오미넷치.”

 

오목한 손바닥에 한 움큼 물을 기어 어깨 위로 천천히 붓는다. 덩달아 모락모락 김이 나는 흰 살이 더할 나이 없이 보드라워 보인다. 또르르 흘러내린 물방울은 동그란 어깨 봉우리 너머로 떨어지기도 하고 움푹 파인 쇄골에 샘처럼 고이기도 하였다. 마른 살가죽 위로 도드라진 굴곡이 안쓰러우면서도 괜스레 화하고 열이 오른다.

 

목 아래까지 푹 담가라.”

 

뽀얀 수증기 속에 아롱거리는 살결이 얄미워 아오미네는 차라리 키세를 물속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신경이 쓰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얹어진 두 손은 마음과 달리 그의 어깨 위를 고집스레 머무르는 것이었다.

 

기분 좋네요.”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마냥 굽어진 무릎 사이를 빈 공간이 없게끔 붙인 채 둥글게 말아져 있던 허리가 따뜻한 물속에서 기지개를 켜듯 뒤로 천천히 젖혀졌다. 다완 속에서 새순의 찻잎물이 노랗게 우러나는 것처럼 긴장이 풀려 한결 녹진해진 몸이 편안하게 등을 기댄다. 물의 온도가 익숙해진 무렵 아직 피로가 뭉쳐있는 딱딱한 언저리를 짚으며 키세가 으읏 작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주물러줄까?”

 

아오미네는 키세가 자신의 어떠한 불순한 의도도 눈치 채지 못하기를 바랐다. 태연스럽게 얹어져 있던 손끝에 힘을 주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반점 하나 없이 정결한 피부를 느릿하게 쥐었다 놓았다. 놓는 순간 그 찰나가 터무니없이 아쉬워져 다시금 손아귀를 구부렸다. 할 수 있다면 계속해서 붙잡고 싶었다. 찰거머리마냥 끈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목욕물이 지나치게 뜨거운 것은 아닐까.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끔거리는 열기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아오미네는 알 수 없다.

 

다행히 기분이 좋은 듯 어깨를 주무르는 동안 키세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오미네에게 온전히 몸을 맡긴 채 티끌의 의심도 보이지 않는다. 제 손 안에서 쉬고 있는 그의 모습에 가슴 한편이 벅차다. 동시에 다른 한편에선 스물 스물 피어나는 욕심이 눈을 가리었다.

 

에도로 가는 길에 나도 함께 가.”

집은 누가 지키고요?”

나리만 에도 구경을 하나. 촌놈도 한번 데려가라.”

안됩니다. 어차피 성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릴게.”

 

조금 굳은 얼굴 표정에는 난처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여전히 희미하게 여려있는 미소에 기대를 걸며 아오미네가 손가락 끝을 장난스럽게 굴렸다. 가망도 없이 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도 아오미네는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턱 아래 휑한 목덜미나 어깨와 겨드랑이로 이어지는 사이 등 간지러움을 태우는 손길에 꼼짝없이 붙잡힌 키세가 온몸을 배배 꼬며 웃음을 터트렸다.

 

 

 

 

 

 

 

 

 

 

 

 

 

 

 

 

부스 위치는 레드존 I-10 이 부스 모냐 입니다!!

 

 

 

 

Posted by 모노님 :

 

 

 

세이렌이라고 했다. 꽃으로 뒤덮인 바위섬에서 신비로운 노래를 불러 선원들을 끌어들여선 배를 난파시키거나

스스로 물에 뛰어들어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신화 속 님프.

 

 

[청황] 바닥에서

 

 

하지만 선원들을 유혹하는 아름다운 님프와 다르게 키세 료타는 남자였다. 이 대목에서부터 아오미네는 그녀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모델 일을 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 정도로 그가 치명적인 마력을 지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는 노래 따윈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을 뿐. 키세 료타의 시선을 온전히 독차지할 수 있는 짧은 순간을 위하여 그녀들은 난간 위에 올라선 것일까. 그것은 죽음을 각오할 만큼, 혹은 정말로 허공 속에 몸을 던질 만큼 가치 있는 것일까. 시시하다. 시시해. 아오미네의 미간이 크게 찌푸려지면서 벌어지는 입과 함께 졸음에 겨운 하품이 새어나왔다.

 

지금까지 세 명의 여학생이 죽었다. 네 명의 여학생이 뛰어내렸고 운 좋게 한명이 나뭇가지에 옷이 걸리는 바람에 화단으로 떨어져 목숨을 건졌다.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었기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들었으나 며칠이 지난 후에도 더 이상 교내에서 그녀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학을 가거나 아니면 완전히 학교를 관두었을지도 모르지만 거기까지는 관심외이다. 하나같이 예쁘장한 얼굴들이었기에 아오미네는 그것이 조금 아쉬웠다. 휴일에 번화가를 걷다보면 헌팅이 적어도 세 번 이상은 들어오는, 남학생들이 몰래 매기곤 하는 외모랭킹의 상위권에 줄줄이 자리했던 여학생들이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세 번째로 뛰어내린 아이는 마이쨩을 닮은 데다 가슴도 제법 빵빵했었는데.

 

재학생이 네 명이나 뛰어내렸기에 학교옥상에는 출입금지 표지판과 함께 자물쇠가 걸렸지만 녀석은 어떻게 열쇠를 구했는지 매번 불길한 장소를 찾고 있었다. 오래된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음과 함께 아오미네가 두꺼운 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에도 키세 료타는 옥상 가운데 위치한 물탱크의 얕은 그늘 아래서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누워 있었다.

 

단잠에 든 모양인지 아오미네가 타박타박 발소리를 울리며 다가가는 중에도 녀석은 움직이는 기척이 없었다. 자세히 보면 들이 내쉬는 숨을 따라 살짝 오르내리는 가슴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아오미네는 어쩐지 키세가 죽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늘 아래 바로 누워있는 흰 피부가 꼭 시체처럼 창백했다. 어쩌다 우연히 복도를 지나칠 때마다 그에겐 누렇게 말라 죽은 풀냄새가 났다. 권태로움에 사무친 노란 눈알이 죽어버린 생선의 것을 하고 의미 없는 시선이 몇 번인가 스쳤다. 갑작스런 여학생들의 죽음보다 가장 먼저 옥상 아래로 뛰어내릴 것 같은 것이 그였다. 언제나 한쪽 발을 허공에 걸친 채 언제라도 쓰러져 떨어질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처럼 위태로웠다. 그렇기에 더욱 괘씸했다. 그녀들이 죽은 뒤에 녀석도 뛰어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야. 치졸한 놈.

 

사람을 넷이나 병신 만들어놓고 잠이 오냐.”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숱이 많은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더니 이윽고 그가 고개를 돌아보았다. 놀라는 기색 없이 키세가 천천히 허리를 세워 상체를 일으켰다. 처음부터 아오미네가 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마른 입술을 한번 쓱 훑어낸 혀가 태연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녀들이 멋대로 증명하려 한 거예요.”

증명?”

“...내 사랑이 이렇게나 커, 키세군. 료타 나는 너를 이만큼이나 사랑해.

그러더니 멋대로 뛰어내려 버렸어요. 등을 떠밀거나 재촉한 것도 아닌데.”

 

감흥 없는 목소리가 건조한 공기와 함께 옥상 위에 작은 돌풍을 만들다 사라졌다. 멀찍이 서선 키세를 노려보던 아오미네의 굳은 입매가 간지러운 것 마냥 꿈틀거리더니 이내 바람이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정말 바보들이네. 악문 잇 사이로 들려오는 음성이 싸늘하게 느껴지던 것도 잠시 키세를 지나친 아오미네가 어슬렁어슬렁 느린 걸음으로 사방이 뚫려있는 옥상의 바깥쪽으로 향했다.

 

도약하듯 단번에 난간 위로 올라선 아오미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벌써 몇 번이고 핏자국이 번졌다가 부랴부랴 지운 시멘트의 흰 바닥이 보인다. 아득하게 멀지는 않지만 사람의 머리가 깨져서 죽기에는 충분한 높이이다. 아래로 숙였던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자 찬바람이 볼가를 스친다. 나부끼는 옷자락과 함께 바로 선 몸뚱이가 바로 땅바닥에 곤두박질칠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 그녀들이 보았을 마지막 풍경. 녀석 또한 이 풍경을 보았을까. 아니 계속 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테지. 비겁한 놈. 고갯짓으로 뒤를 돌아보자 슬쩍 상체만을 일으켰던 키세가 완전히 일어서려는 듯 손으로 바닥을 짚고 있었다. 마주친 눈동자가 늪 속에 일어난 물결처럼 철렁거린다.

 

뭐하려는 거예요, 아오미넷치.”

너도 증명해봐.”

“...위험하니까 내려와요.”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증명해봐. 키세.”

 

나를 향한 네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증명해봐. 옥상 밖의 회색빛이 섞인 하늘을 등진 채 아오미네가 여전히 주저앉아있는 키세를 쳐다보았다. 지금 내 시선은 온전히 다 네 꺼다. 난 끝까지 너한테서 눈을 떼지 않을 거야. 기쁘냐. 언제나 목말라 죽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잖아.

 

, 무슨 소리에요. , ...”

아니면 내가 떨어질까?”

아오미넷치!”

이게 네가 바라던 것 아니냐. 키세.”

 

좁은 난간 위에 올라서고도 흔들림 없이 키세를 주목하며 담담히 말하는 아오미네와 달리 어느새 키세의 어깨는 바닥 위에 두 발을 붙이고도 두려움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떨고 있는 눈동자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가득 고여서 뚝뚝 떨어져 내렸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바닥 위에 동그란 얼룩을 만들다 금세 사라지길 반복한다.

 

나한테 왜 이렇게 잔인해요...아오미넷치...!”

 

순식간에 허겁지겁 달려가는 거친 발소리가 쿵쿵쿵 옥상 가득 울려 퍼지고 필사적으로 뻗어진 손이 허공에서 팔락거리던 옷깃을 붙잡았다. 그대로 아오미네의 멱살을 끌어 잡은 채 키세가 울부짖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에 얼굴이 가득 젖어 엉망이다. 숨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키세를 내려 보며 아오미네의 입술이 비틀린다.

 

넌 그 바보들만도 못한 거야. 시시한 새끼.”

 

 

 

 

 

 

Posted by 모노님 :

 

 

 

 

 

 

[화황] 백일몽

 

 

 

 

이 곳은 마굴이다.

 

마구잡이로 지어진 건물의 숲. 거대한 쓰레기장. 우후죽순 몰려든 난민들의 피난처. 홍콩에서 가장 유명한 성매매업소, 가장 성황 한다는 도박장, 가장 많은 아편을 거래한다는 개미굴이 모두 이 곳에 있었다. 무허가 식당, 무허가 치과, 무허가 장의사까지 빼곡히 들어찬 녹슨 간판의 대부분이 불법업소이다. 경찰조차 돌보지 않는 무법지대. 국가조차 없는 치외법권. 화폐보다 통용되는 규칙은 헤로인이 든 봉투와 그것을 사고 파는 흑사회의 손이었다. 시멘트로 발라진 성채.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신이 버린 구룡성.

 

콩콩거리는 소리에 처음에는 천장에서 쥐가 돌아다니나 했다. 이어서 쿵쿵쿵 좀더 커진 소음에 이번엔 고양이인가 싶었다. 이곳에선 흔한 것들이니까. 증축과 개축을 반복하다 보니 미로와도 같은 골목과 닭장처럼 빽빽하게 들어찬 불법개조건물 사이에 자연히 시궁쥐와 벌레가 들끓는다. 욕실 한켠에서 죽은 쥐의 시체를 발견하는 것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키세는 덮고있던 낡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하지만 쿵쿵쿵 두드리는 소리는 좀처럼 멎지 않는 것이었다. 입구에서부터 침실까지 이어진 넉 평 남짓의 좁은 집안 탓에 소리는 여과없이 고막을 쑤셔온다. 졸음에 겨운 미간을 잔뜩 찌푸리다가 뒤늦게 그것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먼지가 내려앉은 듯 뻑뻑한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리자 대낮임에도 어두컴컴한 시야 가운데 수도관과 전기배선이 그대로 드러난 황량한 천장이 보인다. 들이마시는 숨과 함께 어김없이 축축한 습기가 폐부를 채우고 어지러운 이마를 짚으며 침대에서 일어난 키세가 한 손으로 머리맡에 놓여져 있던 권총을 집어 들었다. 지난번 삼합회의 내부숙청이 끝난 후 시체와 함께 공터를 나뒹굴고 있던 것을 새벽에 몰래 주워온 것이다. 안타깝게 총알은 없다. 하지만 위협용으로는 충분했다.

 

"oh gosh!"

 

벌겋게 녹이 슨 자물쇠가 철컥 소리를 내며 풀리고 얼굴이 겨우 보일 만큼 살짝 열린 틈 사이로 키세가 권총의 뭉특한 총구를 내밀자 문 밖에서 낯선 감탄사가 들려왔다. 이 곳에서 아직도 신을 찾는 사람은 단 한명 뿐이다.  처음 그가 영어를 썼을 때 키세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권총을 들이대며 가장 먼저 출신지를 물었다. 출신지 뿐만 아니라 이름까지 말할 줄은 몰랐지만. 다행히 그의 고향은 태평양 건너 아메리카였다. 꼬부랑 말을 쓰는 놈들은 그게 그거지만 그래도 영국만 아니면 된다. 키세의 어머니를 타지에 남겨두고 본국으로 돌아간 남자는 영국군인이었다. 물론 그녀 또한 홍콩 길거리에 어린 소년을 버리고 떠나버렸지만. 익숙한 목소리에 긴장이 풀린 키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몇 번이나 아니라고 말했잖슴까. 문틈 사이에 놓여진 총구는 여전하다.

 

"605호 다음엔 606호니까 당연히 바로 옆집이라고 생각했어."    

 

엉거주춤 어깨에 매고있던 달걀바구니를 고쳐매며 카가미가 담담히 말했다. 촛불을 밝혀두지 않아서 밖에선 어두운 안쪽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을 테지만 키세에겐 카가미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하늘이 가려질 만큼 엉기성기 엮인 슬럼의 검은 전선들 사이로 그의 붉은 머리 위에만 햇볕이 내리고 있었다. 카가미가 찾는 606호는 이 곳이 아닌 옆집이다. 키세의 집은 605호와 606호의 벽면 사이에 지어진 불법개조건물이니까 주소는 커녕 호수도 없는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곳에선 파다한 경우이다. 벽에 벽을 붙여 쌓아올린 괴기한 시멘트 정글. 매번 길을 잃고 헤맨다해도 무리가 아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수면제 없이 가까스로 잠들었던 참이라 키세의 신경은 극도로 날카로워진 상황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수면제는 커녕 달걀 한 판 살 돈도 없다. 도박장의 허드렛일을 도우면 한동안 먹고 살수 있을테지만 당장 급한 것은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일이다.

 

"다신 문 두드리지 마십셔."
"오우, 잠깐!"

 

총구를 빼내고 문을 닫으려는 순간 카가미가 덥썩 문을 붙잡았다.  커다란 손이 철문에 부딪히는 철썩 소리와 성큼 다가선 그의 얼굴에 화들짝 놀란 키세가 허겁지겁 내렸던 총구를 다시 세워 올렸다. 선이 굵은 눈썹 아래 붉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자신을 즉시하고 있었다. 혹시 총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게 아닐까. 그렇다면 손에 들린 이것은 그저 고철덩어리에 불과하다. 처음 보았을 때 삼합회의 조직원이 아닐까 오해했을 만큼 건장한 체격의 그라면 문짝 하나 떼어내는 것 쯤은 일도 아닐테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로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흐르고 손끝이 떨려오기 시작한다.

 

"이름, 이름을 알려줘. 너는 가르쳐주지 않았잖아."

 

다급하게 외친 고함치고 그가 꺼낸 소원의 내용은 터무니없기가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대로 쾅 문을 닫아버리고 싶었지만 문틈 사이를 단단히 붙잡고 끼어든 그의 손가락이 어쩐지 신경 쓰인다. 겨누어진 총구가 두렵지도 않은지 당당한 기세에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도리어 이쪽이 위축될 지경이었다. 몰래 마른침을 목 뒤로 삼키고는 키세가 애써 매섭게 건너편의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그걸 내가 왜 가르쳐줘야 함까."
"...혹시 내가 널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어이를 넘어서 크게 당황해버린 키세는 하마터면 손에 들린 권총을 떨어뜨릴 뻔 했다. 그는 혹시 정신이상자이거나 마약중독자는 아닐까. 내뱉는 숨에서 수상한 냄새는 나지 않는데. 순간 퓨즈가 나가듯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고 칙칙한 그림자 속에 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어지는 것이다. 넋이 나간 키세를 모르는지 카가미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미 말했다고 생각했어. 미안."

 

저 거리의 헤로인처럼. 아니 그보다 진득한 기운을 담고 나지막히 들려오는 울림에 온몸의 힘이 빠지고 있었다. 바닥을 향해 미끄러지는 손끝에 권총의 방아쇠가 아슬아슬하게 걸리고 동시에 키세는 알 수 없는 탈력감마저 느꼈다. 꿈 속을 걷듯 부유하는 기분. 그리고 사르르 피부를 스치는 간질간질한 느낌.

 

"…키세 료타임다."
"키세라면 이 한자를 쓰는게 맞아?"

 

곧고 길쭉한 손가락이 더듬더듬 공중에 그리는 모양을 보며 키세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케 그것을 눈치챘는지 카가미가 활짝 입매를 올리며 웃었다. 강렬해 보였던 인상이 한층 누그러지면서 그를 소년처럼 보이게 한다.  

 

"네 머리색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그에게 모습을 보인 적이 있던가. 좁은 문 사이로 제대로 얼굴을  드러낸 적이 드물었을 텐데. 그마저도 검은 그늘에 드리워졌었다.

 

"내가 금발이란 것 어떻게 알았슴까?"
"그야."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처음 봤을 때 머리카락이 반짝거렸으니까." 

 

손을 뻗지도 않았는데 그가 자신의 손을 움켜 쥔 느낌이었다. 그대로 이끌리듯 문을 열던 움직임이 도중에 멈칫한다. 아직은 무리다. 그러니까 이 만큼.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볼수 있을 만큼의 간격.  못내 아쉬운 듯 했지만 그는 더이상의 강요하지 않았다. 피식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키세가 카가미를 바라보았다.

 

"내게도 달걀을 배달 해주겠슴까? 일주일에 한 번씩."

 

"이틀에 한번 씩 올게."

 

 

 

 

 

 

 

 

 

 

 

70년대 홍콩 슬럼가에 사는 빈민키세랑 달걀배달꾼(?) 카가미...시궁창에 피어난 무언가의 번데기...

Posted by 모노님 :

 

 

 

 

양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에게 남은 것은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 외곽의 넓은 부지와 막대한 채권 뿐이었다. 꽃을 키워보는 건 어떠세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아이스티에 손도 대지 않는 것을 보고 심리 상담사가 말했다. 그녀는 창가에 올려 둘 화분 하나 정도를 생각하고 권한 것이겠지만 이튿날 나는 모든 채권을 팔고 광활한 부지에 빼곡하게 장미를 심었다. 험악한 덩치의 서른을 넘긴 남자에겐 어울리지 않는다며 비웃음을 살수도 있었으나 무어라할 사람은 주위에 그 누구도 없었다.

샤를드골, 마리아칼라스, 골드마리84, 프래그런트 레이디, 뉴 아베마리아. 프로포즈용 붉은색만 생각했던 장미가 7000종이나 된다는 사실은 그때 처음 알았다.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반 정도의 장미가 이 화원에서 자라고 있다. 장미를 기르는 것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햇빛과 환기, 배수와 노균병도 주의해주어야 했기에 하루의 시간 대부분을 화원에서 보내야만 했다. 목언저리와 소매가 넉넉한 흰셔츠와 오래 된 블루진을 작업복 삼아 입은 채 가지를 치고 거름이 담긴 수레를 옮겼다. 모자를 제대로 쓰지 않아 햇볕에 드러난 뒷목이 벌겋게 타들어갔지만 이따금 고운 색의 개량종이 피어나면 노고의 보람이 있었다. 그렇게 3년을 정신없이 살았고 어느덧 나에겐 장미를 시들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날도 어김없이 화원을 돌보며 무너진 이랑을 손보고 있던 때였다. 문득 근처서 흥얼거리는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달콤한 게 좋아, 입안 가득한 젤리를 Hey, sugar daddyㅡ"

덤불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모퉁이를 돌아섰다. 언제 온 거야? 돌아오는 목소리는 인사가 아니라 유행가처럼 태연한 노랫소리였다. 예쁘게 준비한 사탕단지는 당신을 원해. 곁으로 다가서는 걸음에도 녀석은 돌아보지 않고 근처에 놓여있던 가위를 집어들었다. 마디 위가 도톰하니 말랑말랑해 보이는 손가락 끝이 줄기에 돋힌 가시를 스칠 때마다 가슴이 철렁인다. 배차간격이 큰 버스에서 내리고 나면 화원으로 들어오는 입구까지는 제법 거리가 되는터라 평소에는 지프를 타고 이동했다. 그 길을 걸어온 모양인지 흙먼지가 묻은 컨버스와 지푸라기같은 머리카락 끝에는 송글송글 구슬땀이 맺혀있었다. 그래도 지난번 훈계가 통하기는 한 모양인지 하교길인듯 해보이는 크로스백이 둘러매져 있다. 칭얼대며 조르기에 마지못해 가르쳐주었던 방법대로 날이 선 가위가 장미줄기를 사선으로 잘랐다. 여러모로 칭찬해줄까 싶던 무렵 흠흠 콧노래로 흥얼거리던 간주가 끝나고 또다시 낭랑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달콤하게 날 채워줘 sugar daddy 빨리 와.

"키세, 그 노래 부르지 마."
"왜요?"

샛노란 구슬같은 눈동자가 마주쳐오자 숨이 막힌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 노래는 누구한테 배운 거야. 오렌지 카운티에서 녀석과 자지 않은 남자는 없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애잖아. 오 키세 제발 질 나쁜 친구들과는 만나지 마. 그러다 문득 자신은 질 좋은 놈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더욱 더 잠긴 목 안에서 가래가 끓었다. 달궈진 공기와 4월의 햇볕이 너무나 뜨겁다.

"...그 노래는 너무 야해."

초등학교 선생님같은 지적에 키세는 입술을 벌리며 웃었다. 뺨과 귀가 화끈하니 열이 고인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미리 사두었던 냉장고 속을 떠올리고 간신히 말을 이었다. 들어가면 바닐라아이스크림이 있어. 난 장미에 물도 주고 잡초도 뽑아주어야 하니까 먼저 들어가서...횡설수설하던 찰나 무릎을 세워 일어난 녀석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래봤자 동그란 머리는 턱밑에 겨우 닿는다. 열다섯살. 어려도 너무 어렸다.

"카가밋치 오늘은 면도 안 했나봐요?"
"새벽에 묘종이 들어와서..."
"시내에선 당신을 산골짜기에 처박힌 괴짜취급하는데, 이러면 정말 야수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잖아."

손을 뻗어 거뭇한 턱을 쓰다듬으며 짖궂은 목소리가 속삭인다. 야수같을지 모를 부끄러운 모습보다도 꺼칠한 표면에 쓸렸을 녀석의 보드라운 손가락이 더욱 걱정되었다. 잘생겼는데 아까워. 예쁘장한 얼굴이 말하는 혀놀림에는 어쩐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미간을 찌푸리자 또다시 붉은 입술이 미끄러졌다. 곧이어 밑으로 내려온 작은 손이 굳은살이 박히고 상처가 난 투박한 손을 붙잡았다. 녀석이 나를 붙잡았는데도 맞닿은 흰 살결에 금세 발간 자국이 생겼다. 뿌리치려 했지만 어느새 한발을 내딛은 키세가 힘을 주어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내가 면도를 해줄게요. 아프지 않게. 나 꽤 잘해요. 억셀 것 하나없는 가벼운 손길에 그리도 쉽게 끌려가는 것이었다. 키세를 따라 아직 손질을 하지 않아 줄기가 엉킨 장미덩굴을 지나쳤다. 무수히 피어난 겹꽃잎은 팔 수 없는 불량종이다. 그럼에도 풍성하니 아름다웠다. 아이스크림은 그 다음에 상으로 먹여줘요. 오렌지빛 눈이 부신 듯 사르르 기다란 눈매가 접힌다. 덩달아 현기증처럼 눈앞이 아찔해졌다. 장미향기보다 녀석이 더욱 진했다.

 

 

 

 

 

 

Posted by 모노님 :

 

 

 

 

 

건조한 코 안이 시큰거리면서 영하의 밤에 새하얀 입김이 밖으로 새어 나왔다. 늦은 귀가 길에 하늘에선 얼음 알갱이와 빗물과 먼지와 온갖 나쁜 것들이 추적추적 섞여 내렸다. 푹 눌러쓴 후드가 젖는 찝찝한 기분에 하이자키는 상대 없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어둠을 뚫고 걸어 나갔다. 저만치 횡단보도에선 파란 불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걸음을 서두르면 건널 수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신호를 따라서 첫 발을 내딛은 그 순간 어설프게 덮여있던 살얼음이 발밑에서 와삭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고여 있던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뒤늦게 웅덩이로부터 물러서지만 이미 흠뻑 젖은 운동화 위로 차가운 흙탕물이 얼룩을 그리며 스며들고 있었다.

사나운 인상이 찌푸려지고 더듬거리는 손이 습관적으로 주머니 안에 구겨진 담배를 찾던 무렵 그제야 그의 일행이 떠올랐다는 듯 하이자키가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의 방향을 따라 재티가 흩날리는 것 같은 풍경 속에서 자신이 지나온 길을 녀석이 따라오고 있었다. 절뚝거리는 그림자가 텅 빈 길 위에 드리워지고 내리는 눈을, 비를, 먼지를 죄다 뒤집어쓰며 걸음이 더딘 녀석은 아직도 한참은 멀어 보였다. 씨발. 달싹여지는 입술과 함께 등 뒤에선 그새 신호가 바뀌었는지 멈추었던 바퀴가 굴러간다.



[재황] 진눈깨비



이유는 없었다. 다만 행동에 따른 결과는 따라왔다. 그날 이후로 동네양아치에 불과했던 하이자키는 어엿한 조직의 일원으로 인정받았고 퇴원 후 키세는 학교를 관두었다. 원인은 너에게도 나에게도 없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너에겐 불운이고 나에겐 행운이었다. 알 수 있는 미래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설사 알았다 해도 무엇이 달라졌을까.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이자키가 내려친 각목은 키세 료타의 다리를 부수었을 것이다.


돌아가는 길에 들린 편의점에선 렌지에 데워먹는 도시락과 맥주캔 여러 개, 안주거리를 조금 샀다. 뒤늦게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선 녀석은 덥수룩한 앞머리까지 적신 진눈깨비를 툭툭 털어내었고 그동안 계산대 앞에선 하이자키가 점원에게 담배의 이름을 말했다. 가판대에 붙여놓은 종이를 보니 또 담배 값이 올랐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뭐가 들어갔는지 기다란 손가락으로 한쪽 눈을 비비고 있었다. 뒤늦게 하이자키의 시선을 눈치 챈 듯 벌겋게 얼은 볼을 끌어올리며 키세가 웃었다. 라이트로 주세요. 이윽고 담뱃갑 두개의 바코드를 찍는 소리가 들려오고 먼저 계산 된 봉투 안을 뒤적이던 키세가 중얼거렸다. 매일 인스턴트만 먹으면 몸이 견디지 못할 검다. 대충 처먹어. 거칠게 봉투를 낚아채며 등을 돌린 하이자키가 편의점 문을 나섰다.


어째서 자신이었는지 이유를 묻고 싶었던 것일까. 대답대신 하이자키는 몇 번이고 웅크린 몸을 발길질 했다. 노란 물을 토해낼 때까지 움푹 들어간 복부를 발로 차고 검붉게 멍이 든 허벅지를 질근 밟았다. 터진 입술에서 삼키지 못한 타액이 피와 함께 쏟아져 바닥에 핏덩어리가 고였다. 흔들리는 이빨과 함께 골 안까지 어지럽고 두 눈이 퉁퉁 부어 시야가 보이지 않는 녀석이 까무룩 기절하고 나면 아랫놈들을 시켜 짐짝마냥 버려두었다. 뒈지기 직전까지 패두었으니 정신이 박힌 놈이라면 얼씬도 하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아 키세는 절뚝거리는 발을 질질 끌면서 하이자키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찢어진 상처 위에 겨우 딱지가 앉고 간신히 거동만이 가능한 상태였다. 어처구니가 없다가도 화가 났고 까닭 없는 분노가 들끓는다. 녀석에게 들려줄 수 있는 대답은 없다. 독종 같은 새끼. 병신새끼.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냉대와 욕설. 또다시 환자복 차림의 키세에게 무자비한 폭력이 쏟아지고 피할 생각도 없이 그저 웅크린 녀석은 모든 것을 묵묵히 감내해냈다. 그렇게 1년을 버티고 나니 키세는 자연스럽게 하이자키와 같은 조직에 섞여들게 되었다.


“잠이 안와요, 쇼고군?”

드르륵 베란다 문을 미는 소리와 함께 빼꼼 고개를 내미는 키세의 얼굴이 보였다. 대답대신 피우고 있던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다. 폐부 깊숙이 차오르는 매캐한 연기와 씁쓸해진 입안. 외풍이 심한 연립아파트의 녹슨 파이프 난간에 등을 기대선 채 하이자키의 회색 눈이 키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반쯤 밀었던 문을 마저 열고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의 키세가 베란다로 따라 나온다. 이렇게 흐린 날이면 다리가 쑤셔서 곧잘 깨곤 함다. 그리곤 대수롭지 않게 하이자키가 물고 있던 담배를 빼내다 제 입술로 가져가는 것이다. 입술 사이로 짓눌리는 필터가 침에 젖고 숨을 들이마시자 타들어가는 붉은 점이 짙어진다. 이미 반 이상을 태워 거의 꽁초밖에 남지 않은 담배가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짧은 처마 아래로 진눈깨비가 섞인 바람이 비켜간다.

조직에 들어와 함께 움직이게 된 이후에도 눈에 띄는 족족 하이자키는 키세를 팼다. 온몸엔 멍 자국이 가실 날이 없고 상비되어있는 반창고와 붕대를 다루는 것에 익숙해졌으며 마른 품에선 언제나 소독약 냄새가 났다. 그럼에도 계속 시야에 걸려드는 것이다. 하이자키의 곁에 머물며 절름발이는 그림자처럼 그의 자취를 따라 움직인다. 짓궂은 조직원들은 키세를 하이자키의 정부취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만은 알 수 있었다. 차라리 그 날 다리가 아니라 네 목을 졸랐어야 했다.

“지금 키스하면 똑같은 맛이 날 테죠.”

타르가 섞인 독한 연기를 뱉어내며 키세가 말했다. 등을 켜지 않아 어둑했지만 시선을 맞춰오는 가는 눈웃음이 이제는 퍽 익숙하다. 굳어있던 입매를 비틀며 하이자키가 순식간에 키세가 피우던 담배를 뺏어 베란다 밖으로 던졌다. 새까만 허공에 붉은 점이 불똥처럼 떨어져 내리더니 이내 눈과 비에 섞여 희미해진다. 숙였던 허리를 세우고 걸음을 옮긴 하이자키가 문 앞에 서있는 키세를 밀치며 안으로 들어섰다. 닿았다 떨어지는 체온은 달아오를 새도 없이 식어 내린다.

“좆같은 소리하네. 병신새끼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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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원 재황

죄지은 소년들에게 벌을 내려줘

by. 모노

 

 

 

 

 

 

우리는 녀석을 씨발년이라고 불렀다.

 

옆에 누가 있건 말건 하루에 딸을 다섯번은 친다는 8번 방 열외 대빵새끼가

 

첫 눈에 보자마자 씨발 이쁘네, 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고

 

그야말로 성격이 씨발스러워서 씨발년이라는 소문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제대로 정신 박힌 놈이라면 이런 곳에 들어올 일이 없고

 

그저 다들 얼굴값하게 생긴 녀석에게 짓궂은 별명을 붙여주고 싶은 것 뿐이다.

 

똑같이 물 빠진 수용복을 입고도 금발머리의 녀석은 잘 먹고 잘 자란 도련님 마냥 얼굴에서 빛이 났다.

 

어찌되었던 달릴 것 달린 남자이기에 년이라는 호칭은 수치심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녀석을 씨발년이라 부르는 것만으로도 놈들은 예쁘장한 깔을 옆구리에 낀 듯 대리만족을 느꼈고

 

밤마다 새하얀 얼굴이 앙칼진 신음을 뱉는 상상을 하며 진하게 사정하였다.

 

하지만 의외로 녀석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발끈하거나 붉어진 얼굴로 울음을 터트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녀석은 담담하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는 듯, 심지어 부르면 고개를 돌아보기도 하였다.

 

그래서 녀석은 계속 씨발년이었다.

 

이름을 알았더라면 누군가 고쳐부를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우리가 녀석에게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15번 방을 혼자 배정 받았다는 사실과 가슴 한쪽에 붙어있는 758이라는 넘버 뿐이다.

 

이 곳에서 독실을 받는다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한다. 살인.

 

그리고 나 또한 17번 독실을 쓰고 있었다. 내가 죽인 사람은 나의 술 취한 아버지였다.

 

 

 

여기에 있는 모든 놈들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 폭력, 사기, 방화, 강도, 강간, 심지어 나와 같은 살인까지.

 

범죄의 강도를 따지자면 사형을 당해도 쌀 놈들도 수두룩 했다. 하지만 법원에서 만난 판사는 우리에게 면죄부를 내려주었다.

 

너무 어리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형 대신, 교도소 대신 그들은 갱생의 희망을 걸고 우리를 소년원으로 보냈다.

 

다행히 법원을 시끄럽게 할 희생자의 유가족이 내겐 없었다. 어머니는 흘러내리는 눈물 탓에 내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셨고

 

형은, 형은 화가 났을까. 아니면 다행이라고 안심했을까. 법원을 나서기 직전 내 팔을 붙잡는 형의 얼굴에는 침을 뱉어 주었다.

 

쫄보새끼. 얼굴을 흘러내리는 걸죽한 침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형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무 탈 없이 나와야 한다. 어머니가 걱정 하시니까. 그것이 마지막이다.

 

하지만 이곳을 나간 뒤에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그래서 모두가 궁금한 것은 과연 녀석이 누구를 죽이고 이곳에 들어왔는가 였다.   

 

저 가느다란 팔로 누구를 죽였을까. 흉기는 칼을 썼을까. 복상사가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으나

 

거기에 비중을 두는 이는 없었다. 농담을 하는 도중에도 발기를 하는 놈들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섹스 생각밖에 없었으니까.

 

비밀이 밝혀진 것은 금방이었다. 교사들의 허술한 관리에 때마침 캐비넷 부근을 청소하던 놈이

 

서류에 적혀있는 녀석의 인적기록을 전부 까발렸다. 이름이나 가족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워낙 파격적인 내용이

 

아래에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녀석의 죄목은 게이섹스 후 파트너 살인. 그것도 싸구려마약에 취한 채로.

 

흉기는 침대 위에서 식사를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쇠젓가락이었다. 기다란 끝으로 몇번이나 눈을 찔러 죽였다고 한다.

 

합의간의 섹스였는지, 화대를 받고 흔히 말하는 원조교제라는 것인지, 강간이였는지는 모른다.

 

살인에, 마약에, 미성년자의 문란한 성관계까지. 그야말로 미성년자라는 이유 때문에 녀석은 이곳으로 왔다.

 

정말 어른들은 녀석을 갱생시킬 수 있다고 믿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수감된 문제아들 중에서 녀석의 죄질은 결코 무시할만한 것이 못되었다.

 

 

 

녀석이 정말로 씨발년이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8번 방의 대빵새끼였다.

 

그 날은 야외봉사활동이 있어서 도시락이 나왔다. 돌덩이처럼 딱딱해진 주먹밥을 부수어 먹고 십여 분간 남은 쉬는 시간.

 

여느때와 다름없이 구석에서 혼자 쉬고 있는 녀석에게 대빵새끼가 다가갔다.

 

당시는 그늘 좋은 자리에서 얼쩡거리는 놈들을 쫒아내고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누워 있었기에 

 

자세한 상황까지는 보지 못했다. 자신이 사건을 알아챈 것은 이미 소란이 벌어지고 난 후였다.

 

엉덩이를 만졌다고 한다. 아니 목덜미를 핥았다고 했나. 귓바퀴를 깨물었다는 것 같기도 하다.

 

하루에 다섯번을 싸는 놈 답게 그때도 발기를 하고 있었다. 언젠가 놈이 녀석에게 추근덕거릴 것은 알고 있었기에

 

모두가 보고 있는 공터의 한 쪽이라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문제는 녀석의 반응이었다. 여태 씨발년이라고 불러도 꿈쩍하는 기색하나 없던 녀석이 

 

놈의 손이 닿자마자 노란 눈깔을 뒤집고 길길이 날뛰는 것이었다. 거의 세배 가까이 체구 차이가 났지만

 

녀석은 아귀같이 놈에게 달려들었다. 대빵새끼의 손바닥 한대면 조막만한 얼굴은 입술이 터지고 고막이 나갈 것이다.

 

주먹으로 치면 이빨 여러개는 거덜내겠지. 누가 봐도 불리한 싸움에서 녀석이 악을 쓰는 소리가 공터 가득 울렸다.

 

녀석에게서 그렇게 커다란 목소리는 처음 들었다. 땀에 젖은 금발이 태양빛 아래서 신랄하게 흩날렸다.  

 

먼저 덮쳐든 것이 유효했는지 결국 대빵새끼는 늘 데리고 다니는 애새끼들의 부축으로 받으며 보건실로 향했다.

 

소년원 안에선 기본적으로 어떠한 무기도 소지할 수 없다. 날카로운 것, 둔탁한 것. 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금지다.

 

교사들은 주먹밥을 먹으라며 함께 나눠준 나무젓가락이 무기가 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나무젓가락이 대빵새끼의 손바닥을 어떻게 갈기갈기 찢었는지. 끝이 부러져 뾰족해진 끝이 몇번이나 손등을 관통했는지.

 

새빨간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이제는 갈라진 나뭇가지밖에 남지 않은 젓가락을 들고 씩씩 거친 호흡을 토해내는

 

녀석의 얼굴이 얼마나 소름끼쳤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녀석은 씨발미친년이 되었다.

 

 

 

 

주말마다 억지로 참여해야 하는 예배시간에 선교사는 말했다.

 

너희의 죄를 사하노라. 신께선 모두를 용서하고 구원하실 것이다.

 

좆같은 개소리. 죄의 무게만큼 벌을 받아야만 했다. 지옥이 있다면 그 곳에 떨어져야 한다.

 

악마같은 새끼가 저렇게 노란 눈을 치켜뜨고 있는데 왜 신은 벌을 내리지 않는 것일까.

 

왜 자신에게 벼락을 내리지 않는걸까.

 

우리는 죄를 지었는데.  

 

 

 

8번 방 대빵새끼를 보건실로 보냈다는 이야기에 갖가지 무용담과 허무맹랑한 소문들이 섞여

 

안그래도 화려한 녀석은 소년원의 주요인물로 떠올랐다. 무슨 에이즈환자나 미친년 보듯이 꺼리면서도

 

놈들은 계속 녀석을 반찬삼아 자위하였다. 자극은 더욱 강해져서 이제는 공터에서 씩씩댔던

 

녀석의 숨소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쌀것 같다는 새끼들이 파다했다.

 

그것 때문에 호기심이 생긴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도 녀석은 껄끄러운 상대였다.

 

하지만 언젠가 녀석의 얼굴을 마주보는 날이 찾아오리라고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다. 

 

요동치는 파도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혼자 복도를 걷는 녀석에게

 

자신이 다가가자 북적하던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또라이새끼."

 

 

 

노란 눈깔과 함께 싱긋 접히는 기다란 눈매.

 

전혀 뜻밖이 아니라는 듯 녀석 또한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웃는다.

 

 

 

"씨발년, 미친년 말고 날 그렇게 부른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쇼고군."

 

 

 

"키세 료타. 내 이름이에요."

 

 

 

부디 신이 있다면

 

우리에게 벌을 내려줘

 

  

 

 

 

 

 

 

Posted by 모노님 :

 

 

 

평일특가 - 꿀범벅 키세료타 7kg

 

  

[청황화 / R-19 / A5 / 12p / 중철카피 / 2,000원]

 

 

귤요정ㅋ키세가 아오미네랑 카가미랑 3p하는 떡책입니다.

표지는 대천사 삐삐님이 그려주셨습니다.

 

 

 

 

 

 

 

<<sample>>

 

 

 

크리스마스의 악몽이란 이런 것일까. 아니다, 크리스마스가 오려면 아직 이주 가량 남았다. 혹시 지난 핼러윈의 저주가 이제야 발휘된 것일까. 카가미가 만든 호박스튜가 먹을 만했고 가짜 피를 흘리며 뱀파이어분장을 한 키세가 우스웠던 것 말고는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어째서?

 

다이쨩 지금 농담하는 거지? 사츠키가 안다면 배를 잡고 웃을 법한 허무맹랑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닐 만큼 아오미네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곧잘 오해를 사곤 하는 어둡게 굳어진 미간 외에는 겉으로 잘 티가 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는 카가미는 휘둥그레진 눈동자가 거의 갈라진 눈썹 아래에 닿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작은 모습을 녀석은 본적이 없기에 이해는 간다. 고작 가슴께에 어른거리는 아담한 키와 가느다란 팔다리. 근육이 덜 배인 말랑말랑해 보이는 흰 피부. 볼가엔 발갛게 홍조가 올라서 보송보송한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까지.

마치 테이코 시절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키세는 작아져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제 정체를 밝힐 수밖에 없겠군여.”

 

더구나 금발 정수리 위에 오도카니 얹어진 저 동그랗고 노란 귤은 뭐란 말인가.

 

 

 

-가장이 돌아왔는데 반겨주지도 않슴까? 아오미넷치! 카가밋치!

-가장은 개뿔.

-, 키세.

 

어제도 딱 코타츠 밖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은 날씨였다. 온기에 취해 투닥거리는 것도 잊은 채 아오미네와 카가미가 나부라져 있던 그때 핑크색 목도리를 두른 키세가 귤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코타츠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눈이 내렸다더니, 바깥의 찬 기운이 남아있어 빨개진 코끝을 훌쩍거리며 양손으로 노랗게 익은 귤을 까선 오물오물 먹는다.

 

-겨울엔 역시 귤이져. 쿠로콧치한테 받아 왔슴다!

-해마다 먹는 거 지겹지도 않나.

-으앗 셔요! 아직 덜 익었나봄다.

-귤은 주무르면 달아 진다던데.

-어머 주무른다니 카가밋치 엣찌!

-,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그렇게 셋이서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귤을 까먹다 그대로 코타츠에서 잠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언제부턴가 주위를 맴도는 상큼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자고 일어나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어려진 키세는 머리 위에 얹어진 귤 말고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무심코 하반신으로 시선이 가지 않기 위해 애쓰는 아오미네와 카가미에 비해 녀석은 춥지도 않은지 태연하게 숱 많은 속눈썹을 깜빡거렸다.

 

전 사실 귤의 요정임다!”

 

아오미넷치와 카가밋치의 새콤달콤한 겨울을 책임지기 위해 찾아왔답니다!

뭐라고? 당황할 틈도 주지 않고 부리 같이 모아진 입술이 재잘거린다. 처음부터 이쪽의 이해는 상관없던 모양으로 자칭 귤의 요정이라는 키세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진지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두 손까지 모아가며 늘어놓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련이 부족한 바람에이대로 가단 당도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아여!”

시험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데?”

, 상대해주지 마.”

 

이번엔 또 무슨 유치한 장난질이냐며 쯧쯧 혀를 차는 아오미네와 달리 무릎을 굽혀 키세와 눈높이를 맞추는 카가미는 제법 귀가 솔깃한 모양이다.

 

아오미넷치와 카가밋치의 곁을 떠나야만 함다후엥 이제 어떡하져?”

그럼 큰일이잖아!”

저도 떠나고 싶지 않슴다. 하지만 이대론 귤이 달지 않아서.”

 

이미 한 명은 귤의 요정인지 뭔지 하는 꿈같은 소리에 넘어가 버렸다. 무시하려했지만 카가미의 품에 찰싹 안겨 떠나고 싶지 않다며 눈물을 글썽거리는 꼴을 보자니 아오미네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이다. 걱정 마, 키세. 절대 보내지 않을 테니까. 덩달아 진지해진 얼굴로 감미롭게 속삭이는 카가미를 보자니 더욱 속이 울컥한다.

 

귤은 주무르면 달아 진다며?”

 

 

 

 

 

 

 

 

 

 

 

 

 

 

부스 위치는 레드존 M11 쿠로바스칵테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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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가 무너지고 물살처럼 밀려온 개화의 봄. 녀석과 자신은 함께 제복을 입었다. 딱 맞게 제단 된 어깨와 가슴 위로 금박의 흉장이 번쩍였지만 빳빳하게 풀을 먹인 셔츠 깃보다 녀석은 전에 입던 하오리가 더 잘 어울려 보였다. 동류의 알파로서 놈은 자신의 친우였다. 주위에서 그렇게 불렀다. 둘 다 여러 장의 배속추천서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그 동안 약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도쿄에서 머무는 마지막 봄이었다.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도시에 숨겨져 있는 홍등가를. 숨어있다 기보단 그것은 틈바구니를 스물스물 기어 다니는 버러지처럼 건물과 건물 사이에, 골목과 골목 사이에 끼어있다. 향락의 극치라고 불리는 요시와라에는 비할 것이 못되고 그의 아류쯤 되는 싸구려천국이라고 봐도 좋겠지. 고르게 정제되지 않은 술이 독하고 양귀비를 흉내 낸 모조품이 판을 치는 곳. 음습한 뒷골목이다보니 당연히 햇빛이 들지 않고 환기와 배수가 되지 않아 곳곳에 물때처럼 피어난 곰팡이를, 누군가 나서 청소하는 일이 없어 먼지와 오물이 쌓인 길바닥을 놈은 이해하지 못한다. 도쿄구경을 시켜달라는 핑계로 일부로 질색할 장소만을 골라 안내를 부탁했으니까.

 

"이게 뭐냐, 아오미네."

"왜 처음 보냐? 완전 쑥맥이구만."

 

풍차라는 거야, 재밌지? 풍차? 돌아가면서 대주잖냐. 사방으로 다리를 벌려 두꺼운 좆을 받아 삼키는 금발머리의 남창을 가리키며 손가락 끝을 빙글빙글 돌리자 갈라진 눈썹이 사납게 치켜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발정난 숨을 토해내며 시뻘건 몸뚱이를 흔들던 사내가 도중에 멈칫하자 기어오르는 뱀마냥 땀이 맺힌 허벅지를 조이며 남창이 꼬리가 긴 눈매를 접었다. 안에, 안에 싸줘요. 어쩐지 뱃속에 열이 고이게 하는 오메가의 목소리. 결국 한참을 박아대던 사내는 졸라대는 남창의 얼굴에 사정하였다. 후두둑 콧대 위에 떨어지는 희묽은 덩어리에 움찔하며 앙탈을 부려대면서도 촉촉하게 젖은 붉은 혀를 뺴내어 묻은 정액을 맛있게 핥아 먹는다. 애액으로 질척거리며 벌름거리는 구멍엔 박는 놈이 바뀌었다.

 

소리내어 헛구역질만 하지 않았을 뿐 소태라도 씹은 듯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이 비틀렸다. 굳이 더 찔러보진 않았지만 물정 모르는 순진한 도련님이 쫄았다는 것 정돈 알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집 마나님한테 잘 말해줘. 양산 아래서 레이스장갑을 끼고 가꾸는 호화로운 정원이 아니라 하나뿐인 아들이나 좀 불러달라고. 슬슬 이곳이 지루해지고 있었다. 도쿄에서 즐길 마지막 볼거리는 이걸로 충분하다. 사츠키 너도 봤어야 했는데. 카가미 타이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 새끼 짓고 있는 표정이 정말 병신같았거든.

 

 

 

 

 

< 기만의 봄 > 

 

 

 

 

 

"키세를 살 거야."

"그게 누군데."

 

내일이면 도쿄를 떠나 본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건 유학이 아니라 유배지. 짐을 챙기는 것은 하인에게 맡기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늘어져 있던 무렵 낯선 이름이 들려왔다. 든든하게 점심식사를 마친 후였다. 나른하기 짝이 없는 심드렁한 목소리에 놈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맛 좋은 술이 있다면서 네녀석이 끌고가서 보여주었잖아? 결국 술은 한모금도 못 마셨지만.

 

그제야 어렴풋 금발의 남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깟 남창 이름 알게 뭐야. 그렇게 한가하면 고양이새끼나 주워와라. 애완동물이라면 차라리 그쪽이 낫지. 그렇게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눈을 감으려는데 우연히 마주친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정말로? 그래. 올곧은 시선이나 단호한 입매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그야말로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데려와서 어쩔 건데?"

"우선 씻긴 다음에 식사라도 제대로..."

"그 남창에게 네 좆을 박을 거야?"

 

오메가 뱃속에 네 정액을 쏟아 넣을 거야? 임신할 때까지? 말아 올라가는 입술이 내뱉는 노골적인 투에 구김없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고고한 샌님처럼 굴때마다 구역질이 난다고. 똑같은 알파 주제에. 팔에 머리를 베고 누운 상태로 눈길만 들어 놈을 올려다 보았다. 이쯤하면 주먹을 휘두르지 않을까 싶었다. 유순한 녀석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참을성은 없었다. 부족한 말주변보다 뻗는 손이, 생각보다 마음이 먼저 향한다는 점만큼은 서로 비슷했다. 그림자를 드리우며 내려다 보는 시선이 제법 섬뜩해졌다고 느끼며 본능적으로 움켜쥔 주먹에 힘줄이 곤두서던 찰나 푹 내쉬는 한숨소리를 뒤로 나지막한 울림이 들려왔다.

 

"키세를 그렇게 말하지 마."

 

간질이듯 부들부들 떨리던 입가를 참지 못하고 기어코 커다란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쉬워 죽겠다, 역시 사츠키 너도 이 병신같은 표정을 봐야하는 건데. 허리를 구부려 배를 잡고 조금은 유난스럽게 웃으면서 한편으론 놈이 데려올 고양이의, 금발 남창의 이름을 낮게 되새겨 보았다. 혀안에 감기는 느낌이 낯설면서도 감칠맛처럼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어쨌든 하인을 다시 불러 짐을 풀어야지. 이제 막 도쿄가 즐거워지는 참이었다.  

 

 

 

* * *

 

 

 

다이쨩이 도쿄에 계속 머문다는 소식에 어머님은 기뻐하셨어. 돌아오면 분명 무신경한 군홧발로 정원의 잔디를 전부 짓이겨 놓을 테고 그 커다란 덩치로 여린 순이나 가지들을 단숨에 꺾어버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셨거든. 대신 도쿄에서 카가미군과 함께 더 많은 것을 배우길 바란다고 말씀하셨어. 어머님은 아직 다이쨩이 어린 아이처럼 보이시나 봐. 정원에는 어제 장미묘목을 심었어. 오키나와에서 특별히 공수해온 것인데 듬뿍 사랑 받은 만큼 분명 예쁜 색으로 피어날 거라고 잔뜩 기대하고 계셔. 다음 편지에는 꽃잎도 함께 동봉할게. 오후의 햇빛을 닮은 노란색 아이야.  

 

모모이가 보낸 편지를 대충 갈무리해 넣으며 그는 걸음을 옮겼다. 하이칼라라고도 불리는 신식의 취향이 그대로 담긴 고향 저택과 달리 카가미家의 정원은 혼마루의 옛 풍경이 그대로 남아있다. 계곡을 닮은 산수경석과 닦아놓은 듯 반짝이는 수석. 연못 사이를 가로질러 아치형의 돌다리가 놓여있고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을 빙 둘러 붉은색 잉어가 한가로이 노닌다. 고즈넉한 풍류에 대해선 이해할 수 없지만, 유년시절 장난에 지친 녀석들은 바람에 울리는 풍경소리를 들으며 그늘진 마루 위에서 잠들곤 했다. 별안간 떠오른 기억에 멈춰서 있던 때였다. 저만치서 부스럭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척은 그의 시야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아른거리는 것을 쫒아 아오미네가 고개를 돌렸다. 오후의 햇빛을 닮은 색. 실처럼 가는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반짝인다. 굳이 보지 않아도 장미 꽃잎의 색깔을 쉬이 떠올릴 수 있었다. 아래는 아무것도 신지 않은 채였다. 새하얗게 헐벗은 발이 연두빛 잔디 대신 양탄자처럼 깔린 보드라운 이끼를 밟으며 얕은 자국을 남기었다.

 

녀석을 사온 날, 카가미는 고운 천의 유카타와 게다 한 켤레를 사왔다. 향초 몇방울을 떨어트린 따뜻한 물에 뒷골목의 지저분한 땟국과 비릿한 냄새를 닦아내고 벌벌 떠는 살결에 손수 유채기름을 발라주었다. 홀쭉한 가죽에 사내들의 정액이나 받아먹던 녀석은 요며칠 사이 뽀얗게 살이 올라서 반질반질한 피부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치장을 어색해하는 고양이처럼 녀석은 옷을 입는 것을 싫어했는데 그럴때마다 카가미는 흘러내린 옷깃을 단단히 추스려주며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맞닿은 온기에 마음이 놓였는지 조금씩 날이 섰던 눈꼬리가 풀어지고 쭈뼛거리던 기색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놈의 등에 두 팔을 감으며 안겨들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펑퍼짐한 소데를 휘적거리며 돌아다니는 꼴에 잠시 후면 팔불출같은 잔소리가 따라 붙을 터였다. 벌써부터 귀안이 울리는 기분이라 아오미네는 새끼손가락을 세워 마른 귓구멍을 후볐다. 그러자 펄럭이는 유카타 자락의 소리가 더욱 선명히 들려왔다. 벌어진 품 사이로 보이는 피부는 잘 반죽 된 밀빛이다. 그 아래 조그맣게 곤두선 젖꼭지가 발갛게 익어있었다.

 

좀 더 밑으로 내려가면 마른 허리와 말랑한 살이 숨어있는 허벅지 안쪽에 아직 아물지 않은 생채기와 누군가 씹어놓은 잇자국을 따라 보라색 멍이 남아 있다. 카가미가 투박한 손가락 끝에 약을 덜어 발라줄 때 옆에서 보았다. 멍하니 시선을 던져두던 무렵. 순간 눈이 마주쳤다. 목덜미를 살짝 덮는 머리카락의 색만큼, 입안에서 가볍게 발음되는 이름을 따라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멈칫하던 모습도 잠시 숱이 많은 속눈썹을 내리깔며 키세가 웃었다.   

 

사흘 전. 손가락 끝에 걸린 나무게다가 아슬아슬했다. 맨발로 아치형의 돌다리 위를 걸으며 휘청거리는 녀석의 뒷모습이 퍽 우스웠지만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쳤다. 부딪쳐왔다. 꼭 지금처럼. 아오미네 시야안에 발광하는 노란빛이 걸려들었다.

 

쩌억 하품을 하며 기둥에 등을 기댄 채 기지개를 펴던 그때 풍덩 물보라를 일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눈길을 돌려보니 잉어가 노는 작은 연못에 게다 두짝이 빠져있었다. 돌다리 위에 걸터앉은 녀석의 뾰족한 발끝이 수면 위를 톡톡 두드리며 작은 파동을 그렸다. 곧이어 그 모습을 발견한 카가미가 연못에 들어가 게다를 건져왔다. 허겁지겁 뛰어든 군화를 비롯해 금세 물기를 빨아들인 제복의 밑단이 무겁게 젖었지만 개의치 않아했다. 하인이 수건을 가져올 때까지 커다란 두 손으로 하얀 발을 감싸쥐고 끌어안듯 어루만졌다.

 

문득 떠오른 풍경에 덤덤하던 눈매가 가늘어졌다. 고루 깔린 이끼를 짓이기며 한걸음 한걸음 묵직한 걸음이 저도 모르게 키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망치는 움직임은 없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싸늘하게 식은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 볼 때까지도 마주친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바위처럼 단단한 주먹이 떨리던 그때였다. 싱긋 미소 짓는 붉은 입술을 따라 감출 생각이 없는 단내가 코끝에 물씬 끼쳐왔다. 머릿속이 절로 아찔해지는 농익은 냄새이다. 

 

아오미네는 녀석의 안에 남아있을 카가미의 정액을 떠올렸다. 뱃속을 가득 채운 알파의 진한 정액. 동류의 씨앗. 샛노란 눈동자 속에 어려있는 우월감. 오르가즘 마냥 도취 된 표정. 명백하기 짝이 없는 조소. 천연한 기만. 오메가 주제에. 암컷 주제에.

 

 

 

* * *

 

 

 

다이쨩 어머님이 울고 계셔. 장미군락이 만발한 것까진 좋았는데 어느새 옆 화단까지 가시덤불이 뻗쳐서 다른 꽃들이 죄다 죽어버렸지 뭐야. 아무래도 비료를 너무 많이 준 탓이 아닐까 싶어. 향기가 진한 터라 벌이나 나비가 끊이질 않고 흩날리는 꽃가루 때문에 기침이 멈추질 않아. 전에 말한대로 편지 사이에 꽃잎을 함께 끼워 보냈어. 색이 참 곱지?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야. 어머님이 무척 화를 내셨거든. 날이 선 가위를 꺼내서 노란색 탐스러운 장미송이들을 전부 잘라버리셨어. 아름답지만 그만큼 괘씸하다고 말이야.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어.

 

 

 

 

 

 

 

 

 

 

 

 

 

이게 뭘까...난 여기서 턴을 마치겠다(노양심

Posted by 모노님 :

5월서코에 배포했던 재황소설입니다

19금 부분은 잘랐습니다. 씬 부분은 얼마 안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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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음

 

 

언젠가부터 거리는 자유의 대명사처럼 불리고 있었다.

 

“Where Stars are Born and Legends are Made.”

 

스타들이 태어나고 전설이 만들어지는 곳이라며 댄스홀에 불과했던 아폴로극장이 일종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으면서 부서진 보도블록과 하수구의 오물냄새를 운치로 여기는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것이었다. 모닝 사이드 스트릿(Morning Side Street)에 늘어선 쾌적한 신축건물과 사랑과 평화 등을 외치는 화사한 그래피티에 사람들은 뿌리박고 있던 불안을 잊었다.

 

똑같은 맥도날드의 햄버거였지만 그들이 먹는 음식은 소울푸드가 되었고, 거리의 홈리스가 부르는 노래는 블랙 가스펠이란 이름으로 박수를 받았다. 범죄지구라는 과거의 오명을 벗고 7월의 거리는 정말로 자유와 낭만으로 충만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자유라는 이름의 방종임을 키세 료타는 알았다. 시당국에 의해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었지만 jack은 독버섯의 색을 바꾸는 것뿐이라며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번화가 뒤편은 여전히 무질서의 영역이었고 음습한 골목의 사이사이 개미굴처럼 얽힌 불온의 꼬투리를 잡아낼 수단이 그들에겐 없었다.

 

가판대에 내놓고 파는 아로마 원액통의 밑바닥에 헤로인을 숨겨두고, 부랑자들의 한손엔 낡은 가스총이 들려있다. 이미지 개선을 위한 부단한 노력에 불구하고 목숨이 아까운 자들이라면 한밤중에 할렘의 거리를 걷는 정신 나간 짓은 하지 않는다.

 

신의 은총이 닿지 않는 이곳에서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흔히 하는 우스갯소리처럼 흑인이라면 농구선수가 되거나 힙합퍼가 될 수도 있겠지만 흑인도 아니거니와 무리지은 히스패닉도 아닌 동양인 고아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가이드를 자청해 관광객을 안내하고 바가지 팁을 받거나, 주위를 얼쩡거리다 지갑이나 가방 등을 갖고 튀는 식으로 한동안을 버텼지만 저보다 덩치 큰 녀석들의 텃세에 그것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그 시기에 만난 것이 jack이다.

jack은 흑인 갱이지만 언제나 여유 있는 중년신사처럼 반듯하게 다린 와이셔츠를 입고 광이 잘 닦인 구두를 신었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이상 jack은 교회의 신부마냥 친절했다. 당시 대부가 새로운 가족을 들이듯 갱스터들이 동생이나 자식처럼 어린 소년, 소녀들을 수중에 데리고 다니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참이었다.

 

처음에는 담배심부름을 시키고 잔돈을 챙겨주는 식이었으나 차츰 다른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빈민가의 아이치곤 예쁜 얼굴이거나 부드러운 피부를 가진 아이들은 특히 인기가 있었다. jack은 키세의 얼굴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고 아무것도 없는 고아에게 그것은 행운이었다. 새끼고양이처럼 뺨을 부비거나 좆을 빠는 일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 정도 비유를 맞추는 것만으로도 식사가 마련되고 잠들 수 있는 보금자리가 있었다.

 

키세가 14살이 되자 jack은 손수 키세의 머리를 금발로 염색시켰다. 산화제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아 바짝 마른 지푸라기 마냥 끝이 갈라진 얇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풀풀 날렸지만 남자는 무릎 위에 올려 진 새끼동물의 털을 쓰다듬듯 키세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그 날은 펍(pub)에서 jack의 어깨에 동그란 머리를 기댄 채 간질간질하니 어루만져주는 감촉을 느끼며 남자가 시켜준 깔루아 밀크를 홀짝이고 있었다. 짓궂은 그는 가끔 마티니나 데킬라 등을 권하기도 했지만 아직 어린 키세가 마실 수 있는 칵테일은 우유가 대부분을 차지한 깔루아 정도이다.

 

재즈음악의 흐르는 나른한 분위기에 사르르 눈꺼풀이 감기려는데 문득 입구 쪽에서 웅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소란이라도 났는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려하자 커다란 손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귓가로 넘겨주며 시야를 가리었다.

 

녀석과는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아.

 

jack은 키세가 다시 얌전히 머리를 기대주길 바랬지만 불붙은 호기심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고개를 빼어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는 주인공을 찾던 그때 두리번거리던 시선이 무언가와 부딪쳤다.

 

놈들의 사냥개다.”

 

분노와 흥분이 혼재되어 가라앉은 jack의 목소리와 동시에 한껏 치켜 올라간 애쉬 그레이의 눈동자가 갈고리 마냥 날카롭게 박혀든다. 예의 하이자키 쇼고였다.

 

 

* * *

 

 

열기로 달궈진 코트를 두드리는 공의 소리가 빈터 가득 울려 퍼진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상대의 디펜스를 피해 발돋움한 키세가 그대로 레이업슛을 성공시켰다. 헤진 그물을 통과한 농구공과 함께 가벼운 체중이 무리 없이 바닥에 착지하였다. 태생부터 탄력으로 다져진 흑인들의 비복근에는 비할 수 없지만 또래들 중에서는 나름 재능이 있는 편이었다. 한손으로 통통 튀어 오르는 공을 낚아채곤 키세가 달려오는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검댕처럼 묻은 먼지와 함께 밀빛으로 탄 얼굴이 아직 앳되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내던 무렵 철사매듭이 늘어난 낡은 철장 너머에서 두둥 두둥 우렁찬 엇박자의 울림이 들려왔다. 그것이 프레임 안에서 요동치는 엔진의 소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도로 위를 질주하며 멀어져가는 점멸등의 궤적을 넋을 놓고 바라보며 사내 녀석들이라면 한번쯤 야생마와 같은 머신 위에 올라타길 선망하는 것이다. 한창 중이던 3:3시합은 잊은 채 시선은 어느새 다가오는 바이크 무리에게 향했다.

 

개선장군마냥 번쩍이는 알루미늄 휠의 바퀴가 코트 위로 올라오는 것에 숨을 죽이는 와중에도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탄성 속에서 키세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불에 할퀴어지듯 보기 싫은 검은 자국이 남은 코트는 아랑곳 않고 할리데이비슨 883R에서 내려서는 이는 익히 얼굴을 알고 있는 녀석이다.

 

농구공을 들고 있는 모습이 코흘리개마냥 우습다는 듯 바람소리를 내며 비틀리는 입술에 자존심 강한 눈매가 들썩인다. 호기심에 기웃거리다 눈이 마주쳤던 펍에서의 첫 만남 이후 자연스레 녀석에 대해 이것저것 전해들을 수 있었다.

한번 물은 것은 절대로 놓지 않는 핏불. 놈들이 풀어놓은 사냥개.

 

이따금 실제 갱단들의 구역싸움에서 턱을 부수는 주먹을 휘두르며 앞장을 서고 클럽의 가장 좋은 자리도, 가장 가슴이 크고 예쁜 계집애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제 것으로 만든다는 도시전설과 같은 이야기들이 모두 하이자키 쇼고라는 이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빈민가의 소년들에게 하이자키는 공포의 대상임과 동시에 집단의 영웅으로 추대 받았다. 그 증거로 할렘의 거리에서 좆을 빨지 않는 것은 하이자키 뿐이다.

 

키는 저와 비슷했지만 선이 날카로운 얼굴엔 보드라운 구석이라곤 찾을 수 없이 또래의 녀석은 완전히 깎인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색인종들 사이에서도 보기 드문 애쉬 그레이와 그보다 인상적인 살기등등한 분위기가 가시처럼 녀석의 주위에 돋아나 있다. 괜스레 발끈하는 기분에 키세가 팔을 뻗어 양손으로 붙잡고 있던 농구공을 하이자키를 향해 던졌다. 민첩한 신경이 어렵지 않게 공을 잡아내긴 했지만 가슴으로 파고든 패스는 제법 둔탁하니 무겁다.

 

“1 on 1 할 줄 알아요?”

 

대답도 듣지 않고 키세가 골대 앞으로 달려가 수비자세를 취하듯 허리를 낮추었다. 다분히 도전적인 모양새에 가늘게 뜬 눈 밑에 번져있던 그림자가 사라지고 되살아나는 야성처럼 빛나는 동공이 번뜩인다. 겁 많은 구경꾼들은 뒤로 물러나고 어느새 둘만이 대치하고 있는 코트 위에서 물러설 것 없이 하이자키가 능숙하게 농구공을 튕기며 키세의 앞으로 나섰다.

 

힘줄이 선 종아리의 근육이 단번에 팽창하면서 신호도 없이 하이자키의 상체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대로 여유롭게 압도적인 차이를 선보이며 링 속으로 공을 박아 넣을 셈이었는데 순간 옆에서 뻗어온 흰 팔에 골대로 달려가던 걸음이 주춤하는 것이다. 재빨리 허리를 돌려 다른 방향을 공략하려 했지만 따라붙는 반응이 빠르다. 도약하듯 뛰어드는 험악한 기세에 위축될 만도 하건만 기생오라비마냥 비실해 보이는 녀석을 제치는 것이 생각 외로 간단치가 않다.

 

짧은 사이 농구공과 접촉하는 손바닥 안에 진득한 땀이 고이고 있었다. 이쯤하면 단순한 게임이 아닌지라 말라가는 입술에서 거친 슬랭이 흘러나온다. 그만큼 거친 드리블이 칠이 벗겨진 코트 바닥을 부술 듯 쑤셔 박혔다 튀어 오르고 멈칫하는 것도 잠시 하이자키가 키세의 어깨를 밀치고 앞으로 돌진하였다. 이윽고 백보드를 때리는 커다란 굉음과 함께 출렁거리는 그물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흔들렸다.

 

명백한 테크니컬 파울이었지만 심판도 룰도 없는 무법의 스트릿 코트에서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다. 순간이었지만 드러낸 송곳니에 부닥친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쿵 바닥에 떨어져 저편으로 굴러가는 갈색 농구공을 줍지 않은 채 하이자키가 뒤로 나동그라진 키세에게 다가갔다.

 

살벌하던 분위기가 빈터를 한번 휘감고 떠나가는 바람과 함께 누그러지고 적막만이 남은 코트에서 녀석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쓰러진 키세를 보았다. 체중을 실어 정통으로 달려든 탓에 부딪힌 어깨가 아리다. 찌릿한 통증에 절로 입술이 깨물어지고 씩씩대는 숨소리엔 분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 모습에 무표정으로 내려다보던 미간이 딱딱하게 굳는다. 뒤늦게 고개를 들어 올리는 키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하이자키는 아무런 말없이 미련 없는 걸음을 돌렸다.

 

타박타박 발소리와 함께 코트를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키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치를 보는 동료들의 조심스런 안부와 흙먼지가 묻은 옷을 털어낼 생각도 않고 철장 너머로 멀어지는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대로 불청객인 놈을 보내는 게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게 달려 나가는 걸음은 녀석의 뒤를 쫓고 있는 것이었다.

 

 

녀석은 짙은 남색의 빈티지점퍼를 입고 있었다. 널찍하게 벌어진 등에는 U.S.A 미합중국의 국기가 별이 모자란 채로 색이 바라고 저항하는 레지스탕스의 상징처럼 오렌지색 금지마크가 위에 그러져 있다. 등대의 하나뿐인 신호를 따라가듯 그것에 의지하며 키세는 하이자키의 뒤를 쫓았다.

 

양옆으로 늘어선 삭막하기 그지없는 회색벽돌집들과 희뿌연 시멘트가루가 날리는 폭이 좁은 골목길에서 가물거리는 녀석이 당장이라도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아 불안하였다. 바이크를 밀며 가면서도 보폭이 큰 편이라 키세가 허겁지겁 걸음을 재촉했다. 흔들리는 어깨가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멈춰 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달라붙는 집요한 눈길과 골목 가득 울려 퍼지는 숨 가쁜 소리에 그제야 하이자키가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마주한 얼굴은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도 일그러진 인상이 퍽 사나웠지만 헐떡이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키세가 입술을 달싹였다. 입안이 말라 조금은 쉰 소리가 나온다.

 

그거, 쇼고군 검까?”

 

근사하게 튜닝 된 883R 바이크를 가리키며 뒤늦게 들어 올려 진 손에 하이자키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무슨 개소리냐며 걸쭉한 욕설이 날아올 거라 예상했으나 천연덕스런 키세의 얼굴을 마주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씁쓸한 입가가 비틀렸다.

 

아니.”

그럼 훔친 거?”

훔친 건지, 뺏은 건지 몰라. 어쨌든 내건 아냐.”

 

애초에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처럼 담담하게 움직이던 혀가 다시 굳은 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짤막한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넋을 놓고 있던 그때 잠깐 변덕에 어울려준 것일 뿐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등을 돌린 하이자키가 가벼운 동작으로 바이크에 올라탔다.

 

“jack은 당신을 사냥개라고 불러.”

 

대답대신 시동이 걸리고 급속으로 엔진을 데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과거 행인이 드문 심야의 거리에서 통제되지 않는 머신을 타고 달리는 하이자키를 본 적 있다. 그때는 녀석임을 몰랐지만 포악하기 그지없는 주행을 떠올리며 짐작할 수 있었다. 하이자키의 바이크는 늘 당장이라도 새까만 어둠 속에 곤두박질칠 것처럼 온몸을 던지며 홀로 부서진 아스팔트 위를 질주한다.

 

그러다 죽을 거야.”

 

뱉어진 외마디에 가늘게 찢어진 시선이 마주친다. 대수롭지 않게 비웃는가 싶었는데 순간 애쉬 그레이의 눈동자의 색이 짙어졌다. 그에 쓰라린 어깨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전율하듯 떨려오는 것이었다. 처음 펍에서 마주친 찰나 통째로 숨을 빼앗으며 두고두고 그를 떠올리게 했던 갈고리와 같은 시선. 숨기지 않은 노골적인 욕망.

 

애완견보다는 낫지. 아니면 암캐인가?”

 

화염처럼 아귀를 벌리던 열기를 어느새 감추고, 다시금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만 남긴 채 폭음과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883R 앞으로 나아갔다. 덩그러니 키세를 남겨둔 채 콘크리트 정글 속에서 하이자키의 뒷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

 

 

키세를 품에 안은 채 jack은 이따금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했다. 대부분이 느와르영화를 모작한 갱스터의 과장된 무용담으로 그저 원숭이인형마냥 그냥 간격을 두고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깜짝 놀란 것처럼 휘둥그레진 눈과 탄성을 흉내 내며 둘러댈 뿐 키세에겐 더 이상 흥미로운 시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유독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이 있었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

 

어느 동양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라는 남자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었지만 허무맹랑한 소리에 멍청한 짓이라 비웃는 키세의 뺨을 쓰다듬으며 jack이 말했었다.

 

그만큼 두려운 것이다. 언제 제 목덜미를 물어올지 알 수 없는 놈은.

 

 

뉴욕을 비롯한 전국에 건조주의보와 함께 노약자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일사병 주의보가 내려진 뜨거운 7월 말. 홍역과 같은 전염병으로부터 아이를 격리시키듯 연례행사처럼 일어난 갱들의 분쟁으로부터 jack은 키세에게 외출금지령을 내렸다.

 

평소라면 얌전히 순종하며 그의 말을 듣겠지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이었다. 전보다 더욱 인적이 드물어진 거리에서 찝찝한 기분을 끌어안은 채 자연스레 스트릿 코트 근처로 향하고 있었다.

 

부글부글 끓는 바닥에서부터 아지랑이를 피우며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에 철근이 녹지 않을까 머릿속에서 실없는 걱정하는데 문득 쐐기마냥 얽혀있는 철장 너머로 익숙한 인영이 눈에 띄었다. 몇 번이고 시선을 사로잡는 애쉬 그레이. 넘어진 거목처럼 늘어진 철장에 등을 기대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하이자키였다.

 

옷감이 찢겨져 나간 옆구리를 손으로 감싼 채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가만히 두 눈을 감고 있기에 죽은 줄 알았다. 그러나 황급히 다가서 무릎을 굽히는 인기척에 날카로운 눈매가 퍼뜩 뜨여지더니 키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마른 입술을 비트는 것이었다. 변함없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던 그때였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팔이 느닷없이 뻗어와 뼈가 불건 손목을 움켜쥔 것은.

 

중심을 잃고 쓰러진 상체가 뒤로 넘어가자 틈을 놓치지 않고 하이자키가 키세의 위로 덮쳐들었다. 얇은 소재의 티셔츠를 사이에 두고 등 뒤로 닿는 꺼칠하니 달구어진 코트바닥의 감촉에 이어서 만만치 않은 무게가 복부를 짓눌렀다. 놀랄 새도 없이 하이자키의 억센 손이 키세의 바지를 붙잡았다. 늘어나는 고무줄과 함께 너무나 쉽게 내려가는 바지를 속옷 째 함께 끌어 내리더니 순식간에 벌거벗은 허벅지가 야외로 노출되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치부에 식은땀이 맺힌 키세의 얼굴이 불타오르듯 달아올랐다.

 

미친 개새끼!”

 

버둥거리는 키세를 억누르며 발정한 녀석이 뜨거운 숨을 내쉬고 있었다. 굳이 내려 보지 않아도 슬쩍슬쩍 의도적으로 닿는 녀석의 불룩한 사타구니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대변해주었다. 혀를 섞어 키스를 하거나 성감대를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길 따윈 바라지도 않지만 굳은 몸을 풀어주는 최소한 애무도 없이 하이자키는 곧장 키세의 다리를 벌리는 것이었다.

 

 

(중략)

 

 

떨고 있는 어깨를 끌어안고 녀석은 한동안을 더 키세의 안을 머물다 빠져나왔다. 섹스라고 볼 수 없는 그야말로 폭력만이 전부였던 관계 이후 움찔거릴 힘도 없이 엉망으로 구겨져 늘어진 키세의 위에서 하이자키는 여전히 비켜서지 않고 있었다.

 

잘 들어, 새끼야.”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얼굴이 보이지 않아 불안하던 찰나 귓가 바로 옆에서 흥분에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울대가 도드라진 목덜미에 뜨거운 숨이 와 닿았다. 이를 드러내고 우는 낮은 울음에 삐쭉 소름이 돋는다.

 

내가 널 가진 거야.”

넌 내꺼야.”

 

가슴을 짓누르는 목소리에 차라리 송곳니를 박아 넣는 것이 덜 고통스러우리라 생각되었다. 피부를 찢고 생살을 물어 베어내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 여기며 뜨거운 물기가 고이는 눈꺼풀을 애써 감으려던 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터지는 폭음이 들려왔다.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쇠붙이의 끝에서 연기를 일으키며 쏘아져 나오는 작은 폭발은, 건조한 공기를 가르며 들려오는 날카로운 총성은 할렘가의 소년들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시간을 두고 기다리자 겨우 참았던 숨을 토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불규칙한 박동을 뛰던 심장이 겨우 안정을 찾아가려는데 문득 뭔가 이상하였다. 저와 비슷한 움직임으로 가까이 맞닿아있던 또 하나의 박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초조함에 어서 상체를 일으키기 위해 키세가 미동도 하지 않는 하이자키를 밀어내려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끝에서 축축한 것이 만져졌다. 덜컥 겁이 나 차마 녀석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고 제 옷까지 적시며 멈추지 않고 배어나오는 뜨거운 감촉에 우물거리는 발음이 뭉개지자 현실을 깨우듯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아득히 멀리서 개울음소리가 들려왔다.

 

 

 

 

 

Posted by 모노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