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서코에 배포했던 재황소설입니다
19금 부분은 잘랐습니다. 씬 부분은 얼마 안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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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음
언젠가부터 거리는 자유의 대명사처럼 불리고 있었다.
“Where Stars are Born and Legends are Made.”
스타들이 태어나고 전설이 만들어지는 곳이라며 댄스홀에 불과했던 아폴로극장이 일종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으면서 부서진 보도블록과 하수구의 오물냄새를 운치로 여기는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것이었다. 모닝 사이드 스트릿(Morning Side Street)에 늘어선 쾌적한 신축건물과 사랑과 평화 등을 외치는 화사한 그래피티에 사람들은 뿌리박고 있던 불안을 잊었다.
똑같은 맥도날드의 햄버거였지만 그들이 먹는 음식은 소울푸드가 되었고, 거리의 홈리스가 부르는 노래는 블랙 가스펠이란 이름으로 박수를 받았다. 범죄지구라는 과거의 오명을 벗고 7월의 거리는 정말로 자유와 낭만으로 충만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자유라는 이름의 방종임을 키세 료타는 알았다. 시당국에 의해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었지만 jack은 독버섯의 색을 바꾸는 것뿐이라며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번화가 뒤편은 여전히 무질서의 영역이었고 음습한 골목의 사이사이 개미굴처럼 얽힌 불온의 꼬투리를 잡아낼 수단이 그들에겐 없었다.
가판대에 내놓고 파는 아로마 원액통의 밑바닥에 헤로인을 숨겨두고, 부랑자들의 한손엔 낡은 가스총이 들려있다. 이미지 개선을 위한 부단한 노력에 불구하고 목숨이 아까운 자들이라면 한밤중에 할렘의 거리를 걷는 정신 나간 짓은 하지 않는다.
신의 은총이 닿지 않는 이곳에서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흔히 하는 우스갯소리처럼 흑인이라면 농구선수가 되거나 힙합퍼가 될 수도 있겠지만 흑인도 아니거니와 무리지은 히스패닉도 아닌 동양인 고아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가이드를 자청해 관광객을 안내하고 바가지 팁을 받거나, 주위를 얼쩡거리다 지갑이나 가방 등을 갖고 튀는 식으로 한동안을 버텼지만 저보다 덩치 큰 녀석들의 텃세에 그것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그 시기에 만난 것이 jack이다.
jack은 흑인 갱이지만 언제나 여유 있는 중년신사처럼 반듯하게 다린 와이셔츠를 입고 광이 잘 닦인 구두를 신었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이상 jack은 교회의 신부마냥 친절했다. 당시 대부가 새로운 가족을 들이듯 갱스터들이 동생이나 자식처럼 어린 소년, 소녀들을 수중에 데리고 다니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참이었다.
처음에는 담배심부름을 시키고 잔돈을 챙겨주는 식이었으나 차츰 다른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빈민가의 아이치곤 예쁜 얼굴이거나 부드러운 피부를 가진 아이들은 특히 인기가 있었다. jack은 키세의 얼굴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고 아무것도 없는 고아에게 그것은 행운이었다. 새끼고양이처럼 뺨을 부비거나 좆을 빠는 일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 정도 비유를 맞추는 것만으로도 식사가 마련되고 잠들 수 있는 보금자리가 있었다.
키세가 14살이 되자 jack은 손수 키세의 머리를 금발로 염색시켰다. 산화제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아 바짝 마른 지푸라기 마냥 끝이 갈라진 얇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풀풀 날렸지만 남자는 무릎 위에 올려 진 새끼동물의 털을 쓰다듬듯 키세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그 날은 펍(pub)에서 jack의 어깨에 동그란 머리를 기댄 채 간질간질하니 어루만져주는 감촉을 느끼며 남자가 시켜준 깔루아 밀크를 홀짝이고 있었다. 짓궂은 그는 가끔 마티니나 데킬라 등을 권하기도 했지만 아직 어린 키세가 마실 수 있는 칵테일은 우유가 대부분을 차지한 깔루아 정도이다.
재즈음악의 흐르는 나른한 분위기에 사르르 눈꺼풀이 감기려는데 문득 입구 쪽에서 웅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소란이라도 났는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려하자 커다란 손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귓가로 넘겨주며 시야를 가리었다.
녀석과는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아.
jack은 키세가 다시 얌전히 머리를 기대주길 바랬지만 불붙은 호기심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고개를 빼어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는 주인공을 찾던 그때 두리번거리던 시선이 무언가와 부딪쳤다.
“놈들의 사냥개다.”
분노와 흥분이 혼재되어 가라앉은 jack의 목소리와 동시에 한껏 치켜 올라간 애쉬 그레이의 눈동자가 갈고리 마냥 날카롭게 박혀든다. 예의 하이자키 쇼고였다.
* * *
열기로 달궈진 코트를 두드리는 공의 소리가 빈터 가득 울려 퍼진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상대의 디펜스를 피해 발돋움한 키세가 그대로 레이업슛을 성공시켰다. 헤진 그물을 통과한 농구공과 함께 가벼운 체중이 무리 없이 바닥에 착지하였다. 태생부터 탄력으로 다져진 흑인들의 비복근에는 비할 수 없지만 또래들 중에서는 나름 재능이 있는 편이었다. 한손으로 통통 튀어 오르는 공을 낚아채곤 키세가 달려오는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검댕처럼 묻은 먼지와 함께 밀빛으로 탄 얼굴이 아직 앳되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내던 무렵 철사매듭이 늘어난 낡은 철장 너머에서 두둥 두둥 우렁찬 엇박자의 울림이 들려왔다. 그것이 프레임 안에서 요동치는 엔진의 소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도로 위를 질주하며 멀어져가는 점멸등의 궤적을 넋을 놓고 바라보며 사내 녀석들이라면 한번쯤 야생마와 같은 머신 위에 올라타길 선망하는 것이다. 한창 중이던 3:3시합은 잊은 채 시선은 어느새 다가오는 바이크 무리에게 향했다.
개선장군마냥 번쩍이는 알루미늄 휠의 바퀴가 코트 위로 올라오는 것에 숨을 죽이는 와중에도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탄성 속에서 키세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불에 할퀴어지듯 보기 싫은 검은 자국이 남은 코트는 아랑곳 않고 할리데이비슨 883R에서 내려서는 이는 익히 얼굴을 알고 있는 녀석이다.
농구공을 들고 있는 모습이 코흘리개마냥 우습다는 듯 바람소리를 내며 비틀리는 입술에 자존심 강한 눈매가 들썩인다. 호기심에 기웃거리다 눈이 마주쳤던 펍에서의 첫 만남 이후 자연스레 녀석에 대해 이것저것 전해들을 수 있었다.
한번 물은 것은 절대로 놓지 않는 핏불. 놈들이 풀어놓은 사냥개.
이따금 실제 갱단들의 구역싸움에서 턱을 부수는 주먹을 휘두르며 앞장을 서고 클럽의 가장 좋은 자리도, 가장 가슴이 크고 예쁜 계집애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제 것으로 만든다는 도시전설과 같은 이야기들이 모두 하이자키 쇼고라는 이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빈민가의 소년들에게 하이자키는 공포의 대상임과 동시에 집단의 영웅으로 추대 받았다. 그 증거로 할렘의 거리에서 좆을 빨지 않는 것은 하이자키 뿐이다.
키는 저와 비슷했지만 선이 날카로운 얼굴엔 보드라운 구석이라곤 찾을 수 없이 또래의 녀석은 완전히 깎인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색인종들 사이에서도 보기 드문 애쉬 그레이와 그보다 인상적인 살기등등한 분위기가 가시처럼 녀석의 주위에 돋아나 있다. 괜스레 발끈하는 기분에 키세가 팔을 뻗어 양손으로 붙잡고 있던 농구공을 하이자키를 향해 던졌다. 민첩한 신경이 어렵지 않게 공을 잡아내긴 했지만 가슴으로 파고든 패스는 제법 둔탁하니 무겁다.
“1 on 1 할 줄 알아요?”
대답도 듣지 않고 키세가 골대 앞으로 달려가 수비자세를 취하듯 허리를 낮추었다. 다분히 도전적인 모양새에 가늘게 뜬 눈 밑에 번져있던 그림자가 사라지고 되살아나는 야성처럼 빛나는 동공이 번뜩인다. 겁 많은 구경꾼들은 뒤로 물러나고 어느새 둘만이 대치하고 있는 코트 위에서 물러설 것 없이 하이자키가 능숙하게 농구공을 튕기며 키세의 앞으로 나섰다.
힘줄이 선 종아리의 근육이 단번에 팽창하면서 신호도 없이 하이자키의 상체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대로 여유롭게 압도적인 차이를 선보이며 링 속으로 공을 박아 넣을 셈이었는데 순간 옆에서 뻗어온 흰 팔에 골대로 달려가던 걸음이 주춤하는 것이다. 재빨리 허리를 돌려 다른 방향을 공략하려 했지만 따라붙는 반응이 빠르다. 도약하듯 뛰어드는 험악한 기세에 위축될 만도 하건만 기생오라비마냥 비실해 보이는 녀석을 제치는 것이 생각 외로 간단치가 않다.
짧은 사이 농구공과 접촉하는 손바닥 안에 진득한 땀이 고이고 있었다. 이쯤하면 단순한 게임이 아닌지라 말라가는 입술에서 거친 슬랭이 흘러나온다. 그만큼 거친 드리블이 칠이 벗겨진 코트 바닥을 부술 듯 쑤셔 박혔다 튀어 오르고 멈칫하는 것도 잠시 하이자키가 키세의 어깨를 밀치고 앞으로 돌진하였다. 이윽고 백보드를 때리는 커다란 굉음과 함께 출렁거리는 그물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흔들렸다.
명백한 테크니컬 파울이었지만 심판도 룰도 없는 무법의 스트릿 코트에서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다. 순간이었지만 드러낸 송곳니에 부닥친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쿵 바닥에 떨어져 저편으로 굴러가는 갈색 농구공을 줍지 않은 채 하이자키가 뒤로 나동그라진 키세에게 다가갔다.
살벌하던 분위기가 빈터를 한번 휘감고 떠나가는 바람과 함께 누그러지고 적막만이 남은 코트에서 녀석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쓰러진 키세를 보았다. 체중을 실어 정통으로 달려든 탓에 부딪힌 어깨가 아리다. 찌릿한 통증에 절로 입술이 깨물어지고 씩씩대는 숨소리엔 분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 모습에 무표정으로 내려다보던 미간이 딱딱하게 굳는다. 뒤늦게 고개를 들어 올리는 키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하이자키는 아무런 말없이 미련 없는 걸음을 돌렸다.
타박타박 발소리와 함께 코트를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키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치를 보는 동료들의 조심스런 안부와 흙먼지가 묻은 옷을 털어낼 생각도 않고 철장 너머로 멀어지는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대로 불청객인 놈을 보내는 게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게 달려 나가는 걸음은 녀석의 뒤를 쫓고 있는 것이었다.
녀석은 짙은 남색의 빈티지점퍼를 입고 있었다. 널찍하게 벌어진 등에는 U.S.A 미합중국의 국기가 별이 모자란 채로 색이 바라고 저항하는 레지스탕스의 상징처럼 오렌지색 금지마크가 위에 그러져 있다. 등대의 하나뿐인 신호를 따라가듯 그것에 의지하며 키세는 하이자키의 뒤를 쫓았다.
양옆으로 늘어선 삭막하기 그지없는 회색벽돌집들과 희뿌연 시멘트가루가 날리는 폭이 좁은 골목길에서 가물거리는 녀석이 당장이라도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아 불안하였다. 바이크를 밀며 가면서도 보폭이 큰 편이라 키세가 허겁지겁 걸음을 재촉했다. 흔들리는 어깨가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멈춰 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달라붙는 집요한 눈길과 골목 가득 울려 퍼지는 숨 가쁜 소리에 그제야 하이자키가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마주한 얼굴은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도 일그러진 인상이 퍽 사나웠지만 헐떡이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키세가 입술을 달싹였다. 입안이 말라 조금은 쉰 소리가 나온다.
“그거, 쇼고군 검까?”
근사하게 튜닝 된 883R 바이크를 가리키며 뒤늦게 들어 올려 진 손에 하이자키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무슨 개소리냐며 걸쭉한 욕설이 날아올 거라 예상했으나 천연덕스런 키세의 얼굴을 마주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씁쓸한 입가가 비틀렸다.
“아니.”
“그럼 훔친 거?”
“훔친 건지, 뺏은 건지 몰라. 어쨌든 내건 아냐.”
애초에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처럼 담담하게 움직이던 혀가 다시 굳은 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짤막한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넋을 놓고 있던 그때 잠깐 변덕에 어울려준 것일 뿐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등을 돌린 하이자키가 가벼운 동작으로 바이크에 올라탔다.
“jack은 당신을 사냥개라고 불러.”
대답대신 시동이 걸리고 급속으로 엔진을 데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과거 행인이 드문 심야의 거리에서 통제되지 않는 머신을 타고 달리는 하이자키를 본 적 있다. 그때는 녀석임을 몰랐지만 포악하기 그지없는 주행을 떠올리며 짐작할 수 있었다. 하이자키의 바이크는 늘 당장이라도 새까만 어둠 속에 곤두박질칠 것처럼 온몸을 던지며 홀로 부서진 아스팔트 위를 질주한다.
“그러다 죽을 거야.”
뱉어진 외마디에 가늘게 찢어진 시선이 마주친다. 대수롭지 않게 비웃는가 싶었는데 순간 애쉬 그레이의 눈동자의 색이 짙어졌다. 그에 쓰라린 어깨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전율하듯 떨려오는 것이었다. 처음 펍에서 마주친 찰나 통째로 숨을 빼앗으며 두고두고 그를 떠올리게 했던 갈고리와 같은 시선. 숨기지 않은 노골적인 욕망.
“애완견보다는 낫지. 아니면 암캐인가?”
화염처럼 아귀를 벌리던 열기를 어느새 감추고, 다시금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만 남긴 채 폭음과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883R 앞으로 나아갔다. 덩그러니 키세를 남겨둔 채 콘크리트 정글 속에서 하이자키의 뒷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
키세를 품에 안은 채 jack은 이따금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했다. 대부분이 느와르영화를 모작한 갱스터의 과장된 무용담으로 그저 원숭이인형마냥 그냥 간격을 두고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깜짝 놀란 것처럼 휘둥그레진 눈과 탄성을 흉내 내며 둘러댈 뿐 키세에겐 더 이상 흥미로운 시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유독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이 있었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
어느 동양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라는 남자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었지만 허무맹랑한 소리에 멍청한 짓이라 비웃는 키세의 뺨을 쓰다듬으며 jack이 말했었다.
그만큼 두려운 것이다. 언제 제 목덜미를 물어올지 알 수 없는 놈은.
뉴욕을 비롯한 전국에 건조주의보와 함께 노약자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일사병 주의보가 내려진 뜨거운 7월 말. 홍역과 같은 전염병으로부터 아이를 격리시키듯 연례행사처럼 일어난 갱들의 분쟁으로부터 jack은 키세에게 외출금지령을 내렸다.
평소라면 얌전히 순종하며 그의 말을 듣겠지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이었다. 전보다 더욱 인적이 드물어진 거리에서 찝찝한 기분을 끌어안은 채 자연스레 스트릿 코트 근처로 향하고 있었다.
부글부글 끓는 바닥에서부터 아지랑이를 피우며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에 철근이 녹지 않을까 머릿속에서 실없는 걱정하는데 문득 쐐기마냥 얽혀있는 철장 너머로 익숙한 인영이 눈에 띄었다. 몇 번이고 시선을 사로잡는 애쉬 그레이. 넘어진 거목처럼 늘어진 철장에 등을 기대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하이자키였다.
옷감이 찢겨져 나간 옆구리를 손으로 감싼 채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가만히 두 눈을 감고 있기에 죽은 줄 알았다. 그러나 황급히 다가서 무릎을 굽히는 인기척에 날카로운 눈매가 퍼뜩 뜨여지더니 키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마른 입술을 비트는 것이었다. 변함없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던 그때였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팔이 느닷없이 뻗어와 뼈가 불건 손목을 움켜쥔 것은.
중심을 잃고 쓰러진 상체가 뒤로 넘어가자 틈을 놓치지 않고 하이자키가 키세의 위로 덮쳐들었다. 얇은 소재의 티셔츠를 사이에 두고 등 뒤로 닿는 꺼칠하니 달구어진 코트바닥의 감촉에 이어서 만만치 않은 무게가 복부를 짓눌렀다. 놀랄 새도 없이 하이자키의 억센 손이 키세의 바지를 붙잡았다. 늘어나는 고무줄과 함께 너무나 쉽게 내려가는 바지를 속옷 째 함께 끌어 내리더니 순식간에 벌거벗은 허벅지가 야외로 노출되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치부에 식은땀이 맺힌 키세의 얼굴이 불타오르듯 달아올랐다.
“미친 개새끼!”
버둥거리는 키세를 억누르며 발정한 녀석이 뜨거운 숨을 내쉬고 있었다. 굳이 내려 보지 않아도 슬쩍슬쩍 의도적으로 닿는 녀석의 불룩한 사타구니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대변해주었다. 혀를 섞어 키스를 하거나 성감대를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길 따윈 바라지도 않지만 굳은 몸을 풀어주는 최소한 애무도 없이 하이자키는 곧장 키세의 다리를 벌리는 것이었다.
(중략)
떨고 있는 어깨를 끌어안고 녀석은 한동안을 더 키세의 안을 머물다 빠져나왔다. 섹스라고 볼 수 없는 그야말로 폭력만이 전부였던 관계 이후 움찔거릴 힘도 없이 엉망으로 구겨져 늘어진 키세의 위에서 하이자키는 여전히 비켜서지 않고 있었다.
“…잘 들어, 새끼야.”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얼굴이 보이지 않아 불안하던 찰나 귓가 바로 옆에서 흥분에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울대가 도드라진 목덜미에 뜨거운 숨이 와 닿았다. 이를 드러내고 우는 낮은 울음에 삐쭉 소름이 돋는다.
“내가 널 가진 거야.”
“넌 내꺼야.”
가슴을 짓누르는 목소리에 차라리 송곳니를 박아 넣는 것이 덜 고통스러우리라 생각되었다. 피부를 찢고 생살을 물어 베어내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 여기며 뜨거운 물기가 고이는 눈꺼풀을 애써 감으려던 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터지는 폭음이 들려왔다.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쇠붙이의 끝에서 연기를 일으키며 쏘아져 나오는 작은 폭발은, 건조한 공기를 가르며 들려오는 날카로운 총성은 할렘가의 소년들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시간을 두고 기다리자 겨우 참았던 숨을 토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불규칙한 박동을 뛰던 심장이 겨우 안정을 찾아가려는데 문득 뭔가 이상하였다. 저와 비슷한 움직임으로 가까이 맞닿아있던 또 하나의 박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초조함에 어서 상체를 일으키기 위해 키세가 미동도 하지 않는 하이자키를 밀어내려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끝에서 축축한 것이 만져졌다. 덜컥 겁이 나 차마 녀석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고 제 옷까지 적시며 멈추지 않고 배어나오는 뜨거운 감촉에 우물거리는 발음이 뭉개지자 현실을 깨우듯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아득히 멀리서 개울음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