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보는 엊그제 보았던 심야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 아마도 인류 멸망 그 후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였는데연거푸 들이켰던 카페인이 리포트 정리가 끝난 뒤에도 가시지 않아 억지로 보았던 것이다.

 

아무튼 인류가 멸망한 뒤 남겨진 개와 고양이들은 저마다의 생태계에 회귀, 적응하며 행복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괜찮네, 인류 멸망. 사보는 생각한다. 루피는 개도 고양이도 좋아하니까. 초원으로 변해버린 거리에서 개와 고양이와 함께 마음껏 달리고 있는 루피를, 시시싯 기분이 좋을 때 내는 특유의 웃음소리를 떠올렸다. 금세 사보는 행복을 느낀다.

 

만약에 개와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문득 허무맹랑한 전제가 떠오른다. 그렇다면 너는 나를 좋아해줄까. 개도 고양이도 없는, 아무도 없는 단 둘만의 세상에서라면 루피는 자신을 좋아해줄까. 그렇다면 사보는 인류 멸망을 기원한다. 너만 나를 좋아해준다면 인류 따윈 얼마든지 멸망해도 좋다고.

 

 

: 인류 멸망 하루 전

 

 

혹시나 싶어 들린 대학도서관에서(검색 엔진에 접속하자마자 멍청한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사보는 약간의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몇 번의 큰 전쟁과 전염병을 겪고도 경이로운 생존을 거듭해온 인류의 역사이다. 저출산 시대라곤 하지만 지금도 1분당 4.3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고 있고 운석 충돌의 기회는 이미 2012년에 지나가 버렸다.

 

허무함과 함께 도리어 가슴에 묘한 죄책감을 떠안고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곧은 자세는 장신인 그를 더욱 커보이게 만들었지만 지금은 늘 단정하던 셔츠에 구김이 생긴 것도 모르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터덜터덜 걷고 있는 한심한 남자만 있을 뿐이다. 입학 이래 계속 수석을 차지하고, 남녀를 따지지 않고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는 사보이지만 한 가지 주제에 따라선 어김없이 얼빠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가방에 들어있는 사회이론 서적처럼 냉철한 이성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아니 그보다 오래전부터 그래왔다. 사보의 인생은 저보다 한참 작은, 여전히 마르고 어리게만 보이는 한때는 정말 남동생이라 생각하기도 했던 그 아이를 위주로 돌아가고 있다. 전부가 아니라도 좋다. 조금이라도 괜찮으니까 그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마치 어떠한 개념과 해석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난제에 부딪힌 기분이었다.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루피가 좋아해줄까. 혹시나 루피에게 미움을 산다면 자신은 더 이상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지? 모두가 사랑해마지않을 그이건만 사보는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이토록 형편없다.

 

 

* * *

 

 

이러고 있으니까 꼭 재난영화 같다~”

그러게.”

 

눈앞의 상황이 연출되기까지 어떠한 목적과 의도도 개입하지 않았음을 사보는 맹세한다. 그는 태풍을 부를 수도 없을뿐더러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장대비를 쏟아 부어서 열차운행을 멈추게 할 수도 없고 나아가 이 일대에 정전을 일으켜 고립 상태를 만드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어쩌면 신께서 그의 염원을 들어주신 것일까. 일렁거리는 촛불을 곁에 두고 체온이 떨어지지 않게 맞닿은 어깨위로 담요를 나눠 걸치고 있는 현 상황은 루피가 말한 것처럼 재난영화의 한 순간이었다. 인류 멸망을 앞두고 지구에 남은 마지막 한 쌍이 그와 루피였다.

 

처음 TV에서 태풍 속보가 떴을 때 루피는 흔쾌히 사보의 집에서 자고 갈 것이라 말했다. 거센 비바람을 맞으며 길가의 가로수가 춤을 추듯 흔들리는 모습에 루피가 창문을 열고 싶어 하는 것을 말리느라 조금 애를 먹긴 했지만 금세 사보가 끓여낸 카레에 관심이 돌아갔다. 원래 돼지고기조림을 만들려던 것을 루피를 신경 쓰느라 너무 푹 익혀버렸는데 응급처치로 넣은 카레가루가 발군이었다. 다행히 루피는 평소처럼 요란하게 카레를 몇 그릇이나 비워냈고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사보의 행복이었다. 그의 행복은 이토록 사소했다.

 

그래도 비 때문에 게임도 못하고, 나가 놀지도 못하고. 재미없어!”

이제 곧 잘 시간이야, 루피.”

 

바람은 아까보다 잠잠해졌지만 루피는 지루하게 내리는 장맛비에 질려가는 모양이었다. 슬슬 졸음에 잠겨오는 눈꺼풀을 하고도 심심하다며 발가락을 꼼질거리는 루피와 달리 사보는 불어나는 생각들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이곳은 노아의 방주 안일까. 그렇다면 방주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그는 작은 상자 하나를 가슴에 품고 있는 기분이었다. 사보는 어리석은 여자처럼 상자를 열고 싶진 않았다. 불행이 예견되어있는 그 상자를 끝까지 열지 않고 들키지 않게 숨겨두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기댄 작고 동그란 머리가, 맞닿은 팔을 통해 전해지는 아이처럼 뜨거운 체온이 덩달아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 상자 안에 든 것이 어쩌면 혹시나 모를 희망이라는 것을 알아서 사보는 계속 입가가 간지러웠다.

 

만약에 말이야 루피.”

하아암, 왜 사보.”

누가 널 좋아한다고 하면.”

누가? ?”

그러니까 내, 내가.”

? 무슨 소리야?”

, 만약에 인류가 멸망한다면 어떨 것 같아?”

 

나는 희망이 싫어사보는 절망한다. 지금 이 순간 희망이란, 만약이란 가능성의 말은 그에게 고문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한심스러울 정도로 작아진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내가 너를 너무 많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좋아해도 괜찮은 걸까 싶을 만큼. 온 세상의 중심이 너이고,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내버리고 달려갈 수 있을 만큼. 왜 자신은 이렇게 지나친 사랑을 하게 된 걸까.

 

그건 좀 싫은데.”
?”

난 사보도, 에이스도 학교친구들도 다 같이 있는 게 즐거운걸.”

 

맞아, 그렇지. 네 말이 맞아.”

 

상자를 열고난 뒤 그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사보는 어리석은 여자에게 동감한다.

 

 

* * *

 

 

빗소리가 계속 귀에 거슬렸기 때문인지 루피가 잠든 뒤에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던 사보가 겨우 눈을 감은 것은 평소라면 해가 떠오를 시각이었다.

 

그 이후로 몇 시간이나 잠들었을까. 먹구름에 가려진 어스름한 빛 때문에 아침이 된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사보를 깨운 것은 몸 위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였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뻑뻑한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자 익숙한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다. 배 위에 걸터앉은 루피가 그를 흔들고 있었다.

 

사보 일어나! 비가 그쳤어!”

 

비가 그쳤다는 말처럼 고개를 돌려보니 강한 햇빛이 눈을 찔러왔다. 어느새 날이 개었는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희었다. 묵은 때를 벗긴 듯 한껏 씻어낸 찬 공기가 가슴 속으로 들어온다. 늦잠을 자기 일쑤였던 루피가 먼저 일어나 소란을 벌일 법했다. 태풍이 지나갔구나.

 

나가자. 비 때문에 웅덩이가 생겼어. 완전 수영장 같아."

그럼 운동화 말고 장화를 신어, 루피.”

사보 얼른 일어나아~에이스도 불러야지.”

 

어깨를 잡고 흔들어 봐도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는 그에 루피는 기운이 빠진 모양인지 장화를 찾으러 가버렸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반대로 사보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비가 그쳐버렸다.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하늘 아래 단 둘 뿐이던 밤이 지나가 버렸다. 결국 인류는 멸망하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개와 고양이는커녕 세상에 그와 루피 단 둘만이 오롯이 남는 일 따위 가능할 리가 없었다. 마치 약에 취했다 깨어난 것처럼 허무맹랑한 망상을 꿈꿨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이제 루피는 문 밖으로 나갈 것이다. 빛나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한데 뒤섞여 즐겁게 웃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여전하겠지.

 

사보 지금 울어?”

, 아니야.”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가가 축축했다. 비운의 주인공처럼 아니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눈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지만 의아한 얼굴로 다가오는 루피를 보자마자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네가 내 곁을 떠난다는 생각만으로 이렇게 죽고 싶어져.

 

"왜 우는 거야 사보? 어디 아파?”

, 울긴 누가 운다고 그래.”
지금 엉엉 울고 있잖아.”
너 때문이잖아!”


지금까지 한 번도 루피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는데 사보는 울컥해버렸다. 제법 손이 매운 편이라 에이스처럼 뒤통수를 치거나 하진 않았지만 아무튼.

 

난 정말 너만 있으면 괜찮은데, 넌 그게 아니니까.”
? , 내가 잘못 한 거야?”

난 인류가 멸망해도 괜찮아.”

에에?”
"인류가 멸망하고 아무도 없으면 그땐 네가 날 좋아해줄 거 아냐!”

그런 거 안 해도 난 사보가 좋다고!”

?”

 

막바지에 가선 거의 둘 다 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루피의 마지막 말에 사보의 사고가 멈췄다. 말도 안 돼. 뒤늦게 그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차마 벌어진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진 않았다.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는 사보의 옆으로 루피가 털썩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리곤 아무렇게나 걷어차 두었던 담요를 가슴께까지 올려 덮고 누웠다.

 

루피?”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다시 자자.”

?”

 

껌뻑껌뻑 당황한 눈동자를 감추지 못하는 사보의 손을 끌어당겨 억지로 제 옆에 눕히곤 루피가 정말로 잠들 모양인지 눈을 감았다. 아이를 재우듯 사보의 손등을 토닥이기까지 한다.

 

자고 일어나면 인류는 멸망해있을 거야."

, 루피 지금 무슨!”

난 잔다! 쿨쿨~”

 

말을 마치자마자 정말로 잠들었는지 고롱고롱 숨소리가 들려온다. 갑작스레 닥쳐온 상황이 조금도 이해가지 않았지만 일단 루피의 말대로 사보도 눈을 감았다. 햇빛이 눈가를 간질이긴 했지만 금세 개의치 않아졌다. 맞닿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체온과 기분 좋은 피로감에 따뜻한 물에 잠기듯 서서히 온몸이 나른해진다.

 

이렇게 잠들었다 눈을 뜨면 우거진 초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인류도, 개도 고양이도 없는 세상에는 너와나 단 둘만이 남게 된다. 단 둘만의 사랑을 하게 된다.

 

 

 

 

 

Posted by 모노님 :